[Dear My Walking] 가족과 오르는 1500m 고지, 다시금 곱씹는 새해 결심… 강원도 평창군 선자령
안재형 기자
입력 : 2022.02.09 15:28:09
수정 : 2022.02.14 09:32:43
“딸, 여기 괜히 왔다 싶으면 내려가도 돼. 이곳이 생각보다 꽤 힘들거든. 경사가 완만하다고 하는데 그건 산을 어느 정도 탔던 사람들 얘기고 너는 꽤 힘들 거야. 괜찮겠어?”
올해 대학 입시에 성공한 딸은 한동안 말이 없다. 푹 숙인 고개 위로 가쁜 숨이 올라온다. 이를 악물었는지 이 사이로 삐져나온 숨소리가 간간히 휘파람 소리처럼 들린다. 조용하다 못해 적막한 산하에 꼴딱 넘어가는 숨소리가 서너 번 이어질 즈음 딸이 한마디 한다.
“아빠, 여기서 잠깐 쉬어가요. 죽겠어.”
20여m 뒤에서 부녀를 따라 오르다 앞을 바라보니 콘크리트로 마감된 산행길이 저 멀리까지 이어졌다. 뒤따라오던 한 무리의 아저씨들이 한마디 거든다.
“여긴 아직 초입인데 벌써 쉬면 어쩌누. 쉬지 않으면 두어 시간, 쉬면 서너 시간 걸려요. 어여 갑시다.”
잠시 배낭을 내리고 쉬는 부녀의 대화가 정겹다.
“야, 그 힘든 대학입시도 한번에 붙었는데, 정상도 한번에 찍어야하지 않겠어. 올해 첫 등산이잖아.”
“물 좀 마시고 가요. 아스팔트길이 더 힘든 거 같아. 계속 오르기만 하고. 블로그에는 완만하고 쉬운 길이라고 소개해놨던데, 어디가 쉽다는 거예요.”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디 있겠니. 아빠는 백두대간에 쉽다는 길 중 정말 쉬운 길은 못 본 거 같은데….”
강원도 대관령 선자령에 올랐다. 대관령 북쪽에 자리한 이 산은 백두대간의 주능선에 우뚝 솟은 봉우리다. 높이는 1157m. 먼저 오른 이들이 SNS에 남긴 ‘비교적 쉬운 완만한 등산길’이란 설명은 결론적으로 그들만의 호기로운 자랑일 뿐이었다. 해발 800여m에 자리한 대관령 마을 휴게소에서 시작된 산행은 처음엔 산책이었지만 완만한 산길이 정상까지 이어지며 숨을 헐떡이게 했다.
편도 5㎞ 구간에 아스팔트길과 산길, 정상 부근에선 대관령 목장이 펼쳐지며 호방한 풍경이 이어지지만 얕잡아보단 큰코다친다. 먼저 간 일행이 쉬지 않으면 두어 시간 쉬면 서너 시간이라고 했던 말, 괜한 말이 아니다. 구간을 왕복해야 하니 등반 시간만 최소 4시간인 셈이다. 오후에 오르면 짧아진 겨울 해에 마음이 급해져 발걸음도 빨라진다. 왕복할 생각이면 늦어도 오전 11시경에는 올라야 마음 편히 산행에 나설 수 있다. 겨울 산행에 등산화는 필수, 끈을 꽉 조이고 마음 다잡아야 큰 무리 없이 발을 내디딜 수 있다.
선자령 정상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누군가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 했던가. 어쩌면 선자령 등반에 딱 어울리는 말이다. 휴게소에서 이어진 길을 따라 걷다보면 뒷산에 오르는 것처럼 마음이 가볍다. 높게 솟은 풍력발전소의 이국적인 기운에 취해 흥얼흥얼 콧노래도 나온다. 사실 대관령에서 선자령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능선길은 겨울철 첫 손 꼽히는 눈꽃트레킹 코스다. 가파른 비탈길이 없어 겨울산행이 익숙지 않은 이들이 도전하는 코스이기도 하다.
여느 산길보단 평탄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편한 것만은 아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쉽게 생각해 대충 준비했다면 휴게소에서 왼쪽 길로 들어서면 나오는 양떼목장이나 구경하는 게 상책이다. 800m 능선에서 출발했다곤 하지만 선자령은 1000m가 넘는 고지다. 눈이 소복이 쌓인 겨울에 한국의 알프스라 불리는 이유다. 속초에 큰 눈이 온 후 ‘그래도 눈꽃 하나는 볼 수 있겠지’란 생각에 찾은 선자령은 그늘진 곳을 빼면 원래 모습 그대로였다. 양지바른 곳은 따뜻하기까지 했다.
캠핑을 위해 선자령을 오르는 백패커
하지만 정상으로 갈수록 날씨는 매서워진다. 좀처럼 바람이 멈추지 않는다. 해가 중천에 떴지만 강한 볕은 바람 앞에 제대로 서있질 못했다. 그만큼 춥다. 귀를 덮을 수 있는 등산용 모자가 어찌나 고마웠던지, 시린 눈에서 눈물이 났다. 이국적인 풍경을 연출했던 풍력발전소가 왜 이곳에 자리했는지 온몸으로 느껴지는 순간이다.
백두대간의 중심부에 자리한 선자령은 북쪽으로 오대산 노인봉, 남쪽은 능경봉과 연결되는 등산로다. 연간 수십만 명이 방문하는 관광 명소이기도 하다. 지난해엔 대관령 일대의 숲길이 국가숲길로 지정되기도 했다. 그만큼 자연풍광이 빼어나다. 계곡이 아름다워 선녀들이 아들을 데리고 와 목욕하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전설이 전해지는데, 바로 이 전설에서 선자령(仙子嶺)이란 명칭이 유래됐다.
선자령 정상에서 내려다 보이는 강릉 앞바다
▶탁 트인 고개, 알프스 어디쯤…
정상에 오르는 길은 두 갈래다. 능선을 타는 길과 계곡을 따라가는 길로 나뉜다. 대부분 능선길로 올랐다가 계곡길로 하산한다. 5㎞의 코스를 3㎞쯤 지나면 산길로 접어드는데, 여기부터 뒤를 돌아다보면 그야말로 탁 트였다. 정상 부근으로 갈수록 삼양목장과 맞닿아 있어 연출된 풍경이다. 사방이 뻥 뚫려있으니 바람도 제 맘대로다. 휑한 곳을 쌩하니 달려 나간다. 바람 센 곳에 발전소도 여러 개다. 산의 능선을 따라 가지런한 풍력발전소가 쨍한 방점을 찍는다.
선자령 정상을 300여m 앞둔 곳은 말 그대로 목장이다. 어느 산이나 깔딱고개가 있게 마련인데, 이곳이 바로 선자령의 마지막 고비다. 가쁜 숨 몰아쉬다 ‘아, 여긴 소도 오르는 곳인데…’라고 생각하면 미소와 함께 살짝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정상에 오르면 ‘백두대간선자령’이라 쓰인 커다란 비석이 기다리고 섰다. 이곳을 밟은 이들 중 열에 아홉은 이 커다란 비에 손을 얹고 뭔가 중얼거린다. 마치 새해 소망이나 결심을 다시 곱씹는 양 한참을 마주하다 고개를 돌리는데, 그 모습이 뿌듯하고 정겨웠다.
정상에 서면 우선 사방을 둘러봐야 한다. 이곳이 어디이고 어떤 곳인지 카메라에 담는 것도 좋지만 눈에 담는 게 먼저다.
남쪽으로 발왕산, 서쪽으로 계방산, 서북쪽으로 오대산, 북쪽으로 황병산이 자리한 선자령에선 날이 좋으면 강릉 시내와 동해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때마침 불어온 미세먼지가 아쉬웠지만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강릉 앞바다가 손에 잡힐 듯 가까웠다. 눈꽃트레킹이 가능하다면 하산길엔 적당한 경사에서 눈썰매도 경험할 수 있다. 가족과 함께 즐길 수 있는 트레킹 코스로 이만한 곳이 또 있을까. 먹을거리 풍부한 평창군의 관광코스는 덤이다.
▷선자령 코스
· 대관령 마을 휴게소→KT송신소→전망대→선자령(원점회귀)
· 대관령 마을 휴게소→국사성황당→전망대→선자령→재궁골삼거리→풍해조림지→양떼목장→대관련 마을 휴게소
▷강원도 평창의 먹을거리
평창의 주요 농산물은 곤드레나물과 감자, 고추, 메밀, 옥수수, 사과, 파프리카, 멜론, 양파, 고랭지채소 등으로 나열할 수 있다. 이들 특산물을 이용한 갖가지 요리가 유명한데, 우선 최고의 육질을 자랑하는 ‘대관령 한우’와 매서운 추위와 눈보라 속에서 숙성된 ‘황태구이’ ‘황태해장국’이 유명하다. 자연을 닮은 깔끔한 맛이 독특한 ‘산채정식’과 쫄깃한 주홍빛 붉은 살을 자랑하는 ‘송어회’도 빼놓을 수 없다. ‘메밀부침’과 ‘메밀막국수’도 빠지면 서운한 대표 요리다.
▷평창의 전통시장
평창군의 전통 5일 장에는 전통의 맛과 정취가 그득하다. 옛 먹을거리를 파는 시장 풍경에 고향의 인심이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