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ar My Walking] 산책하듯 즐기는 설악의 색다른 코스 오색 주전골 자연관찰로
안재형 기자
입력 : 2021.11.01 14:49:18
수정 : 2021.11.01 14:49:46
“옴마나, 저기 갔다 오는데 두어 시간이면 된다고? 설악산인데 그걸로 된다는 거야?”
50대 엄마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20대 초반의 딸이 답한다.
“여기가 설악산 구경하는 가장 쉬운 코스래. 높이 오르는 게 아니라 둘레길 걷듯 걷다보면 절경이 나온다던데 무엇보다 걷기 편해서 좋은 코스래요.”
다시 엄마가 묻는다.
“그럼 가는 데 1시간 돌아오는 데 1시간인가. 엄마 다리 아픈 거 알지? 그래서 등산도 접었잖아. 여긴 괜찮다는 거야?”
다시 딸이 답한다.
“그렇다니까. 나무 데크가 깔려 있기도 하고 평평한 구간이 대부분이라 애들도 걷기 편하대요. 여기서 단풍구경하자고 요 앞 호텔에서 묵었는데 여길 빼놓고 갈 순 없잖아요. 갑시다!”
‘오색 주전골 자연관찰로’가 시작되는 약수터탐방지원센터 앞에서 등산이 두려운 엄마와 단풍이 보고 싶은 딸이 나눈 대화다. 결과적으로 딸이 맞았다. 이곳에선 성능 좋은 등산장비나 등산화가 필요 없다. 신던 운동화와 체온을 유지시켜줄 옷가지만 있으면 충분하다. 그렇다고 비경이나 절경이 설악산의 여타 코스에 비해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산책하듯 걷다 올려보고 내려다보면 설악이 품은 가을 풍경이 옴팍 한눈에 들어온다.
살짝 차가워진 가을 공기에 새파란 색이 더해진 용소폭포를 즐긴 후 다시 돌아 나오는 이 탐방로는 말 그대로 자연관찰로다. 주전골 계곡의 자연을 보고 느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쉼이 되고 놀이가 된다. 그래도 등산인데 주변만 둘러보는 것 아니냐고? 그럼에도 이곳은 설악이다. 가을 설악에 아쉬움이라니.
▶계곡을 빙 두른 나무데크, 가벼운 마음으로 한 걸음
개울가 암반 세 곳에서 철분과 탄산수의 성분을 가진 약수가 솟아오르는 오색약수는 늘 인기 좋은 명소다. 하루 1500ℓ의 약수가 난다는데, 가고 오는 이들이 한 번쯤 들러 맛을 볼 만큼 유명세가 여전하다. 주변에는 이 약수로 밥을 지어 갖가지 나물과 비벼먹는 산채정식집도 여럿이다.
“설악에서 이 주전골 단풍이 최고예요. 왜 그런지 아세요? 물이 좋으니 나무도 좋은 게 당연하지 않겠어요?”
주변 상인의 농이 농처럼 들리지 않는 건 ‘물이 좋다’는 ‘사실’ 때문이다. 이곳 단풍이 설악산에서 최고인지 확신할 순 없지만 물 좋은 곳이라는 건 16세기 무렵 성국사(城國寺)의 한 스님이 발견할 때부터 알려진 ‘사실’ 아니던가. 그래서인지 종이컵(오색약수터엔 컵이나 바가지가 없다.) 들고 줄 선 이들이 끊이지 않는다. 2011년에 홍천 삼봉약수, 인제 개인약수와 함께 천연기념물(제529호)로 지정됐다.
이곳부터 데크가 놓인 무장애 길이 이어진다. 어린 아이도 아장아장 걷기 좋은 길이다. 걷다보면 가을 계곡의 기운이 차갑다 못해 시리다. 앞서 가던 이가 같이 가던 이에게 해주던 얘기를 옮기자면, 주전골 골짜기가 하도 깊어서 한여름에도 한기가 느껴진단다. 역시 가을 산엔 두툼한 옷이 제격이다.
2006년 여름에 수해와 태풍이 몰아쳤던 주전골엔 다시금 자연의 붓칠이 덧씌워졌다. 할퀴고 쓸려나간 자국은 언제 그랬냐는 듯 알록달록한 나무와 기암괴석으로 덮여 훌륭한 풍경을 만들어냈다. 어떤 이는 ‘설악의 깊이를 느낄 수 있는 계곡’이라 했고 다른 이는 ‘가을 풍경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골짜기’라 했지만 말보단 한 번 더 눈에 담는 게 귀할 만큼 걷는 내내 눈이 즐거웠다.
고래바위, 상투바위, 새눈바위, 여심바위, 부부바위 등 이름 있는 바위들이 내뿜는 기운도 대단하다. 한 번 시선이 꽂히면 한참을 바라보게 될 만큼 풍광이 빼어났다. 그런데 이 경치 좋은 곳에 왜 쇠를 녹여 돈을 만든다는 주전(鑄錢)골이란 이름을 붙였을까. 지금도 설이 분분한데, 용소폭포 입구에 있는 시루떡바위가 마치 엽전을 쌓아 놓은 것처럼 보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하고, 옛날 이 계곡에서 도둑 한 무리가 위조 엽전을 만들었다고도 전해지며 불리게 됐다고도 한다.
▶달 밝은 날 선녀들도 내려와 목욕하는 계곡
절 뒤뜰에 다섯 가지 색깔의 꽃이 피는 나무가 있어 이름을 오색석사라 짓고 인근 지명도 오색리로 바꿨다는, 지금은 성국사라 불리는 사찰을 뒤로하고 나서면 얼마 안 가 독주암이 눈에 들어온다. 주전골 최고의 비경이라 손꼽히는 이곳은 정상부에 한 사람이 겨우 앉을 만큼 공간이 좁다 하여 홀로 독(獨), 자리 좌(座)를 써 독좌암이라 부르다 현재 독주암이 됐다고 한다. 뾰족한 바위를 둘러싼 산자락과 나무들은 천불동 계곡을 닮았다. 훌륭한 사진 배경이다. 실제로 가던 길 멈추고 사진 찍는 이들이 여럿이다.
좀 더 걸음을 옮기면 8자 모양의 작은 웅덩이와 계곡이 어우러진 선녀탕이 눈에 들어온다. ‘선녀와 나무꾼’에 등장하는 바로 그곳이라는데, 밝은 달밤에 선녀들이 내려와 날개옷을 만석 위에 벗어놓고 목욕하고 올라갔다 하여 선녀탕이라 부른다는 전설이 깃든 곳이다. 여기서부터 살짝 숨이 가빠진다. 길이 가파른 게 아니라 간간이 산길이 이어진다. 얼마 안 가 나타나는 2개의 커다란 돌은 금강문이다. 불교에서 잡귀가 미치지 못하는 강한 수호신이 지키는 문을 금강문이라 하는데, 이 두 개의 커다란 돌에 소원을 말하고 통과하면 이뤄진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곳이다.
오색 주전골 자연관찰로의 대미는 용소폭포다. 붉은 빛의 암반 사이로 하얀 계곡물이 쉼 없이 떨어진다. 잠시 쉬었다 가기도 좋은 곳이다. 좀 더 산행에 나서고 싶다면 이곳에서 만경대로 오를 수 있다. 그게 아니라면 다시 왔던 길로 돌아가 산책을 마무리하면 된다.
돌아가는 길이 벌써부터 버겁게 느껴진다면 기억해두시길. 오는 내내 뒤돌아보지 않았다면 전혀 새로운 풍경을 마주하게 된다는 걸….
만경대
찾아가는 길
▷대중교통
동서울터미널에서 오색리행 버스를 타거나 고속버스, 시외버스를 이용해 양양버스터미널에 도착하면 오색리행 버스가 하루 11회 운행된다. 오색리에서 주전골까지는 도보로 5분 거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