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이정재(50)가 인생의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으로 글로벌 스타로 도약한 데 이어 올여름 극장가를 꽉 잡은 영화 <헌트>의 메가폰을 잡으며 감독으로 데뷔하게 된 것. “감독이 될 줄은 저조차 몰랐다”라며 연신 쑥스러워하는 그였지만,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때면 날렵한 눈빛이 더욱 빛났다.
<헌트>는 이정재의 감독 데뷔작이자, 절친 정우성과 <태양은 없다> 이후 23년 만에 재회한 작품으로 일찌감치 국내외의 큰 관심을 받았다.
“(연출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기에 연출은 제 영역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욕심이 정말 하나도 없었는데…. 조금씩 시간이 남을 때마다 게임처럼 시작한 작업이, 어느새 완고가 나오고, 훨씬 어려운 작업으로 이어졌죠. 생각지도 못한 일들의 연속인 요즘이에요.”
기분 좋은 미소의 이정재는 감독 데뷔가 여전히 실감나지 않는다며 벅찬 표정을 지었다. 그가 처음부터 <헌트> 감독을 맡으려던 건 아니었다. 실상은 감독 아닌 제작자를 꿈꾸던 2016년, <헌트>의 원작 시나리오인 <남산>의 판권을 사들인 게 <헌트>와의 연의 시작이었다.
▶시나리오 완성에만 4년 걸려
당시 워드 문서 편집조차 제대로 할 줄 몰랐던 그는 오직 “시나리오를 쓰기 위해” 랩톱을 사 들고 다니며 틈틈이 글을 썼다. 작품 활동에도 쉼이 없던 탓에 물리적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음에도 묵묵히 글을 써내려갔다. 그렇게 <헌트> 각본이 완성되기까지 걸린 시간은 무려 4년. 각본 집필과 감독 물색은 거의 동시에 이뤄졌지만 그의 글을 영상으로 구현해줄 감독을 만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고, 고민 끝에 이정재는 직접 메가폰을 집어 들었다.
이정재는 “높은 리스크를 이겨내기 위해선 시나리오의 완성도가 높아야 한다고 생각했다”며 “저에게도 큰 도전이었지만 함께 참여한 분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감사한 마음 때문에 더 열심히 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책임감이 막중했다”고 제작 당시를 떠올렸다.
영화의 시대적 배경은 1980년대. 실제 군부 정권이 인권 유린을 자행하고 민주화 운동을 탄압하던 시기다. 들끓는 민주화의 열기, 그럴수록 정부의 유혈 진압 역시 심각했던, 처참하도록 모두가 뜨거웠던 혼란의 시대. ‘아웅산 테러 사건’을 모티프로 한 영화는 거대한 스케일과 ‘1호(대통령) 암살’을 두고 팽팽하게 맞서는 두 인물의 심리전이 주요 관전 포인트다.
감독 이정재가 <헌트>를 통해 보여주고자 했던 주제는 무엇이었을까. “근 몇 년 동안 양극화로 나뉘어 서로 분쟁하는 모습을 봤어요. 아주 어릴 때나 봤지, 그동안 잘 보지 못했던 현상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죠. 누가 이렇게 극단적으로 만들었을까, 우리의 가치관이나 신념이 누군가에 의해 생성된 것 아닐까 싶었어요. 그러면서 우린 왜 서로 화합하지 못할까 하는 주제를 잡았어요. 그래서 이념적인 성격이 강한 군인과 북한쪽 인물을 설정하게 됐습니다.”
<헌트>가 300만 관객을 넘어서며 승승장구를 이어가고 있는 가운데, 영화 자체를 넘어선 재미 요소는 ‘절친’을 넘어 ‘찐친’으로 통하는 이정재와 정우성의 23년 만의 재회다. 1998년 영화 <태양은 없다>에서 방황하는 청춘의 표상을 보여준 두 사람은 <헌트>에서 다시 한 번 투톱으로 나서 강렬한 시너지를 보여준다.
이정재는 “정우성에게 시나리오가 바뀔 때마다 보여주며 반응을 살폈다”고 정우성에게 은근한 애정 공세(?)를 벌인 과정을 떠올렸다. “아무래도 저와 우성 씨가 함께 나오면 많은 분들이 기대하실 텐데, 그 기대치를 뛰어 넘어야 한다는 부담감이 상당했어요. 그런 이유로 우성 씨가 (출연을) 거절하곤 했죠. 그럴 때마다 저는 ‘오케이, 그럼 다른 배우한테 갑니다?’ 하고 쿨하게 다른 배우와 접촉했어요. 그러다 안 되면 또다시 시나리오를 고쳐서 (우성 씨에게) 보여주고. ‘그래도 난 아닌 것 같다’ 하면 또 ‘그럼 다른 배우한테 갑니다?’ 하는 과정이 세 번 정도 있었어요. 말하고 보니 안 쿨하네…(웃음).”
이정재는 정우성에게 거절당할 때 “서운하진 않았다”면서도 “다만 포기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남이 아닌 우리가 직접 만든 작품에 함께 출연하게 된 게 정말 운명 같지 않냐”며 눈을 반짝였다.
영화 '헌트' 스틸컷
이정재는 데뷔작인 드라마 <모래시계>와 앞서 언급한 <태양은 없다>를 비롯해 수없이 많은 필모그래피를 쌓아왔고, 영화 <암살>, <관상> 등 다수의 묵직한 작품에서 강렬한 임팩트를 남긴 열연으로 그 가치를 스스로 입증해온 배우 중의 배우다. 어쩌면 데뷔 후 전성기가 아닌 시절이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닐 스타 배우인 그였지만, 특히 <오징어 게임>은 이정재에게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광폭 행보를 선물해주기도 했다.
그는 <오징어 게임>으로 미국배우조합시상식에서 TV 드라마 부문 남우주연상을, 크리틱스초이스시상식에서도 같은 부문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아시아 국적의 배우가 이들 시상식에서 후보에 오른 것도, 상을 받은 것도 최초였다. 9월 열리는 에미시상식에서도 유력한 남우주연상 후보로 이름을 올렸다.
▶“열심히 하면서 즐긴다”
어디 그뿐인가. 직접 출연, 감독으로 나선 <헌트>는 국내 개봉 전 제75회 칸국제영화제 미드나잇 스크리닝 부문에 공식 초청된 것을 비롯해 토론토 국제 영화제와 판타스틱 페스트 2022, 제55회 시체스영화제 오르비타 섹션에도 초청됐다. 이쯤 되면 2022년, 이정재는 절정을 달리고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까.
“선배님들 활동하시는 걸 보면서 제2의 전성기가 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고 있었어요. 저는 <관상>(2013)으로 너무 큰 사랑을 받아서, 이때 정말 감사하게도 제2의 전성기가 오는 건가 했죠. 그런데 <오징어 게임>이 공개된 뒤에 이런 일이 벌어진 거예요. 연출을 한 영화가 칸에도 갔고요.”
이정재는 그러면서 책임감과 즐기는 마음가짐 두 가지를 자신이 갖고 있는 철칙이라고 언급했다. “연기 준비를 제대로 해오지 않는 배우와는 누구도 일하고 싶지 않을 거예요. 반면 연기를 아무리 잘하는 사람이라도 함께 일하는 게 너무 괴롭고 힘들면 역시 같이 하고 싶지 않을 겁니다. 다행스럽게도 저는 제가 생각해온 두 가지 철칙을 잘 지킨 것 같습니다. 그래서 계속 연기할 수 있었죠. 그렇게 일하다 보면 더 큰 기회도 찾아오는 것 같아요.”
열심히 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이길 수 없다는 옛말도 있지만, 아뿔싸. 열심히 하면서 즐기기까지 하는 그를 어느 누가 따라갈 수 있으랴. 어쩌면, 이정재의 전성기는 아직 오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