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소년심판`서 법복 입고 돌아온 김혜수 “어느 때보다 무거운 책임감, 소중한 작품”
박세연 기자
입력 : 2022.03.30 15:07:36
수정 : 2022.03.30 15:08:39
<깜보> <어른들은 몰라요> <잃어버린 너> <첫사랑> <한지붕 세가족> <파일럿> <짝> <복수혈전> <국희> <장희빈> <닥터봉> <신라의 달밤> <YMCA 야구단> <얼굴 없는 미녀> <타짜> <도둑들> <관상> <직장의 신> <차이나타운> <굿바이 싱글> <시그널> <국가부도의 날>….
1986년 영화 <깜보>로 데뷔, 35년 넘게 맹활약 중인 김혜수(52)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필모그래피다. 아역스타에서 청춘스타를 지나 그 이름 석 자로 모든 게 설명되는 명품스타가 되기까지, 김혜수는 브라운관과 스크린을 넘나들며 쉼 없이 달렸다.
청순, 섹시, 코믹, 카리스마 등 다양한 장르가 가능한 ‘천의 얼굴’ 김혜수가 이번엔 법복을 입고 돌아왔다.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된 드라마 <소년심판>을 통해서다.
<소년심판>(연출 홍종찬)은 소년범을 혐오하는 판사 심은석이 한 지방법원 소년부에 부임하면서 마주하게 되는 소년범죄와 사건을 담당하는 판사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김혜수는 극 중 이성적이고 냉철하게 소년범죄를 다루는 판사 심은석으로 분해 최근작 <시그널> <국가부도의 날>에 이어 더없이 묵직한 메시지를 던진다.
“그 어느 때보다 무거운 책임감으로 임한 작품이에요. 이렇게 미디어가 순기능을 할 수 있는, 다채롭고도 균형 있는 시각으로 방향성을 제시하는 작품이 나오기 쉽지 않잖아요. 소중한 만큼 정말 제대로 잘 해야겠다는 마음뿐이었어요. 우리 모두가. 실제 법관들을 만나고 소년법정을 참관하며 더 크게 느꼈죠. 극 중 판사들이 하는 얘기는 실제 얘기예요. 작가님이 이 작품을 얼마나 오랜 취재 끝에 책임감과 균형감을 가지고 예민하게 신경 쓰면서 객관적인 시선으로 접근했는지 느꼈습니다.”
김혜수가 연기한 심은석의 시그니처 대사인 ‘저는 소년범을 혐오합니다’라는 발언은, <소년심판>을 본 시청자들이라면 뇌리에 깊게 박히지 않을 수 없다. 소년범에게 법의 심판을 내리는 게 직업이지만, 소년범과 운명적으로 엮인 심은석이기에, 중립을 유지해야 하는 판사 신분으로 너무도 당당하게 전하는 소년범 혐오 발언은 아이러니하기까지 하다.
자신이 연기한 심은석에 대해 김혜수는 “초지일관 혐오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실체를 혐오하되 실체에 대한 태도, 책임에 대해 끊임없이 고뇌하고 행동하는 인물”이라 소개하며 “그게 우리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와 굉장히 밀착돼 있기에 무거운 책임감을 가지고 진정성을 담아 연기했다”고 말했다.
“겉으로 봤을 땐 소년범죄, 소년범을 혐오하고 저주하는 판사 같지만, 실체를 냉철하게 바라보되 실체 이면에 어떤 것들에 대한 고민을 해야 하고, 어떤 문제를 고려해야 하고, 어떤 것들을 이후 염두에 두고 관심 가져야 하는지 고르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아주 이상적인 판사라고 생각해요. ‘심은석’에게 집중하고 그의 신념을 유지하는 것 자체가 중요했어요.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했죠.”
전례 없이 ‘소년범죄’를 적나라하게 다룬 이 드라마는 초등생 납치 살인 사건, 시험지 무단 유출 사건, 집단 성폭행 사건, 벽돌 추락 사망 사건 등 실화에서 모티브를 얻은 에피소드들의 향연이었다. 피해자와 피해 유가족의 슬픔을 어깨에 짊어지고 작품에 임해야 했던 만큼, 카메라 앞에서 작품의 메시지를 전달해야 하는 배우들이 가져야 할 책임감은 어느 때보다 무거웠다.
김혜수 역시 마찬가지. 그는 “매 작품마다 최선을 다하지만, 이번 작품의 경우는 현장에서 서있을 기운이 없을 정도로 준비하고 나갔던 것 같다. 논의하고 다시 확인하고, 준비하는 과정의 무한 반복이었다”고 촬영 과정을 떠올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장에서 버틸 수 있게 한 건 이 작품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 메시지였어요. ‘제대로 만들어져서 많은 분들이 공감하고 인식이 조금이라도 달라질 수 있다면’ 하는 바람이 커서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잘 해내고 싶은 마음뿐이었죠.”
▶시청자들 ‘완벽’ 찬사 쏟아져
치열한 내적 고민 속 탄생한 김혜수의 연기에 대해 시청자들은 ‘완벽’이라는 찬사를 보냈다. 유튜브에는 극 중 심은석의 명대사 명연기를 편집해 소개하는 영상이 넘쳐나고, 누리꾼들은 김혜수의 압도적인 열연에 ‘쌍따봉’을 전하고 있다. 공개 초반 기대에 비해 다소 부진한 성적으로 출발한 <소년심판>은 입소문을 타고 승승장구하더니 최근까지 넷플릭스 비영어 시리즈 순위에서 2주 연속 1위를 달리고 있다. 그야말로 ‘롱런’ 각이다.
뜨거운 반응과 성적만큼이나 고무적인 부분은 작품이 전하는 메시지가 시청자들에게 오롯이 전달되고 있다는 점이다. 시청자들 사이에 소년범죄는 결코 가해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부모의 무관심과 가정 폭력, 나아가 어른들의 무책임한 방임, 구멍 난 사회 시스템에서 기인한 범죄라는 데 대한 공감대와 함께, ‘촉법소년’에 대한 한층 깊어진 담론이 형성되고 있다.
명대사 퍼레이드 속 김혜수가 특별히 기억하는 심은석의 대사는 무엇일까.
“작품 속에 마음을 뒤흔드는, 여전히 기억에 남는 대사들이 정말 많아요. 특히 첫 회와 마지막 회에 ‘저는 소년범을 혐오합니다’라며 선포하듯 내뱉는 대사나, ‘처분은 소년들한테 내렸지만, 그 처분의 무게는 보호자들도 함께 느껴야 한다’라는 대사가 귓가에 맴돌아요. 소년 범죄자에게 변명의 여지를 주려는 것이 아니라, 그 범죄 이면에 우리 사회가 어떤 부분에 책임이 있는지, 어른들은 얼마나 관심을 두고 아이들을 책임 있게 이끌어야 하는지 등을 생각하게 하는 대사였죠. 개인적으로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이자 다짐이기도 했습니다.”
김혜수는 또 “작품을 선택할 때만 해도 소년범죄에 꽤 관심이 있는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작품을 준비하며 법관들의 이야기를 듣고 재판을 경험하고 나니 내 관심이 분노하고 슬퍼하는 감정적인 접근이었다는 걸 알게 됐다”며 “소년범을 바라보는 시선 자체가 편협했다는 걸 깨달았을 때, 나 같은 사람이 많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라고 되돌아봤다. 그러면서 “소년범죄를 어떻게 바라봐야 한다고 강요하는 작품은 아니지만, 소년범에 대한 의견을 지인들 간에 말해보는 대화의 시작점이 되길 진심으로 바란다”고 덧붙였다.
작품에서 호흡을 맞춘 배우들에 대해서도 깊은 애정과 고마움을 표했다. 극 중 소년범에 대한 정반대의 견해와 태도를 지닌 차태주 판사를 열연한 김무열에 대해 김혜수는 “대단한 배우였다”고 극찬했다.
“전체의 흐름을 잘 읽고 하모니를 탁월하게 이뤄내요. 정말 작고 사소한 부분 하나하나까지 그 인물을 디테일하게 연기하더라고요. 강성 판사들 사이에서 대립과 융화에 가장 중심적인 역할을 해줬죠. 또 스마트하게 접근하고 집중해 진정성을 담아 연기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어요. 많은 걸 느끼고 배우게 해준 최고의 파트너입니다.”
법복을 벗기 직전, 가족의 치명적인 범죄에 맞닥뜨린 강원중 판사 역의 이성민의 열연도 김혜수에게 큰 힘이 됐다고. 그는 “이성민 선배님은 현실에서 만날 수 있는 참 좋은 어른 같다. 극 중 강원중과 대립하는 장면을 재촬영하고 싶다고 부탁드린 적이 있었다. 내가 부족해 다시 촬영하는 거라 너무 죄송스러웠는데, 선배님이 ‘얼마든지’라고 응원해 주셔서 큰 힘이 됐다”고 떠올렸다.
소년판사계의 베테랑이지만 너무도 닳고 닳은 나근희 판사 역의 이정은과의 갈등도 시청자들에게 쫀쫀한 볼거리였다. 상대역 이정은에 대해 “좋은 배우”라며 아낌없는 찬사를 전하면서 말을 이어갔다.
“이정은 씨는 같은 또래임에도 불구하고 참 포근하고 어른스러워요. <내가 죽던 날>을 통해 같은 공간에서 연기하고 내면을 주고받은 경험 자체가 소중했죠. 좋은 배우를 현장에서 만나는 것만큼 좋은 수업은 없으니까요. 이번에도 저에게 좋은 자산이 됐는데요, 작품을 다 보고 이정은 씨에게서 저를 보면서 참 많이 반성했다는 내용의 문자가 왔어요. 우리가 하는 연기라는 일을 얼마나 진중하고 겸손하게 대하는지 느껴졌죠.”
<소년심판>의 주인공은 비단 소년범을 심판하는 판사들뿐만이 아니었다. 각양각색 얼굴의 소년범으로 분해 소름 돋는 열연을 보여준 많은 배우들이 작품의 또 다른 ‘진짜’ 주인공이다.
▶“각양각색 소년범 열연 배우들이 찐 주인공”
“에피소드별로 사건이 있어 모두가 정말 잘해줘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만큼 감독님도 촬영을 앞두고 엄청난 시간을 할애해 오디션을 보셨고요. 대부분 많이 노출되지 않았지만 실력을 갖춘 배우들이라 진짜 사건을 접하는 것 같은 느낌을 최대한 잘 살려준 것 같아요. 그런 지점이 작품에서 아주 주효했다고 생각하고, 후배들이 모두 잘 해줘서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성별과 나이를 바꿔가며 백성우를 연기한 이연부터 연기에 처음 도전한 황현정, 그리고 강채영 등 모든 배우들이 저마다의 색깔로 김혜수를 놀라게 했다. 한 명 한 명을 호명하던 김혜수는 “백성우 역의 이연은 의상 피팅을 하며 처음 봤는데 그 순간 심장이 떨리더라. 성별이나 나이를 뛰어넘을 정도의 에너지가 느껴졌다. 저력이 있는 배우를 우리 작품을 통해 만나 우리 작품으로 소개할 수 있게 돼 진심으로 좋다”고 웃으며 말했다.
한예은 역을 연기한 황현정에 대해서도 “어린 연기자고 연기 경험이 전혀 없는데도 불구하고 이 캐릭터의 본질에 가까운 연기를 하기에 깜짝 놀랐다. 이 케이스와 유사한 해외 사례도 찾아보고 열심히 준비해 왔더라. 작품을 하는 동안에는 실제 그 인물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꽃잎>의 이정현 씨를 보는 느낌도 있었다”고 칭찬했다. 집단성폭행 피해자 강선아 역의 강채연에 대해서는 “보고 있으면 저절로 그 인물에 몰두하게 하는 힘이 있다. 엄청난 내공을 갖고 연기하는 배우라서 촬영 끝나고 제작진에게 그 배우의 이름을 물어봤다. 그만큼 강렬했다”고 극찬했다.
<소년심판>에 대해 가장 기억에 남는 반응에 대해 묻자 김혜수는 지인의 반응을 소개했다. “무거운 소재인 만큼 마음 먹고 첫 회를 봤는데 멈출 수 없어 끝까지 봤다고 하더군요. 극적인 재미도 있었지만 그만큼 마음이 무거웠다고. 그리고 정말 많은 걸 생각하게 됐다고요. ‘혜수야. 이 작품에 출연해줘서 고마워. 제작진에게 이런 작품을 만들어줘서 감사하다고 꼭 전해줘’라는 당부도 함께요. 듣는데, 가슴이 정말 먹먹했어요. 마음이 찡할 정도로요(웃음).”
김혜수는 인터뷰 말미까지도 <소년심판>에 대해 “봐야 할 이유가 너무나 명확한 작품”이라며 작품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냈다. “재미나 완성도도 중요하지만, 이 작품이 전달하는 참여자들의 진심이 정말 중요했고, 모든 분들이 한 마음으로 참여해 완성된 작품이에요. 재미와 함께 작품이 가진 메시지를 잘 전달하는 것이 영상매체의 엄청난 순기능이라고 생각해요. 이런 작품이 나오는 것도 쉽지 않고, 잘 만들어져서 시청자들의 동의를 얻는 것도 쉽지 않죠. 그렇기에 잘 해내고 싶은 마음이 컸어요. 이렇게 많은 분들과 공유할 수 있어서 감사하고, 작품을 준비하면서 모두가 염원했던 마음이 닿은 것 같아서 감사해요.”
그러면서 그는 “범죄 피해자분들께 이런 범죄 사례를 다룬 작품을 봐달라고는 감히 말할 수 없고, 그 분들이 쉽게 이 작품을 보실 수 없겠다는 생각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작품이 필요한 건 누군가에게는 인생이 무너질 만한 상처지만 우리가 그 고통을 잊지 않고 무엇을 해야 하는가가 핵심인 것 같다”면서 “저를 비롯해 작품을 보는 많은 분들이 함께 고민하고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길 바랄 뿐이다”라고 힘을 줘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