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기 특파원의 차이나 프리즘] ‘잔반과의 전쟁’ 선언한 시진핑 주석, 習 한마디에 ‘N-1’ 운동·1인용 코스 등장… 코로나·홍수·미중 갈등에 식량안보 위기
김대기 기자
입력 : 2020.08.26 10:05:43
수정 : 2020.08.26 10:11:50
중국 남부 양쯔강 유역에서 홍수 피해가 막심했던 7월 22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북부 지역인 지린성을 시찰했다. 시 주석은 쓰핑시 리수현에 위치한 옥수수 생산기지를 방문해 “식량 생산에 속도를 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당시 그의 행보는 궁금증을 불러일으켰다. 통상 국가 재난이 발생하면 국가 주석이 피해 지역을 찾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실제 후진타오 전 주석은 양쯔강 유역에서 대규모 홍수 재난이 발생했던 2007년 곧장 남부 지역으로 내려가 민심 달래기에 나선 바 있다. 시찰이 마무리된 7월 24일 저녁부터 인민일보와 신화통신 등 중국 관영 언론들은 시 주석의 지린성 방문 의미를 부각시키는 데 열을 올렸다. 중국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는 “시 주석의 최대 관심은 인민들이 배불리 먹고 잘 사는 데 맞춰져 있다”며 “식량안보의 기초를 다져 샤오캉 사회(小康社會·의식주 문제가 해결된 다소 풍요로운 사회) 진입 목표를 달성하고자 하는 의지를 보여줬다”고 보도했다. 다른 관영 매체들도 유사한 논조로 연일 대대적인 선전에 나섰다. 이를 두고 일각에선 중국 지도부가 식량안보에 대한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그 후 보름 남짓이 지난 8월 11일 시 주석은 ‘잔반(殘飯·먹고 남은 음식)’을 국가의 새로운 적으로 규정하고 ‘잔반과의 전쟁’을 선포하기에 이른다. 8월 12일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에 따르면 시 주석은 “매일 나오는 막대한 음식물 쓰레기의 양을 생각하면 충격적이고 마음이 아프다”며 “그릇에 담긴 음식과 쌀 한 톨 한 톨마다 농부의 고생이 배어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코로나19 대유행이라는 엄중한 사태를 맞아 식량안보에 대한 위기의식을 가져야 한다”며 “잔반을 남기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고 근검절약은 명예롭다는 인식이 생기도록 인민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잔반 퇴치를 위한 법제화와 관리 감독 강화를 관련 부처에 지시했다.
‘식량을 절약하고 낭비를 막자’라는 문구가 적힌 안내문이 놓인 식당에서 중국인들이 식사를 하고 있는 모습. <사진 = 환구시보>
시 주석의 말 한마디에 잔반을 둘러싼 변화의 바람이 중국 전역에서 불기 시작했다. 우선 중국의 의회 격인 전인대 상무위원회 법제위원회가 음식낭비 방지 관련 업무를 위한 태스크포스(TF)를 만들며 입법 절차에 착수했다. 각종 언론 매체와 소셜미디어(SNS)에선 ‘잔반 줄이기’ 캠페인에 열을 올렸고, 손님 수보다 1인분을 덜 주문하자는 의미의 ‘N-1’ 운동도 중국 외식업계에서 빠르게 퍼지고 있다. 베이징, 상하이 등 대도시를 중심으로 ‘음식을 남기지 맙시다. 남긴 음식량에 따라 추가 비용을 받을 수 있습니다’라는 문구를 메뉴판에 게재한 식당들도 생겨났다. 난징의 한 뷔페식당은 보증금을 받고 200g 이상의 음식을 남기면 되돌려주지 않는 정책을 도입하기도 했다. 또 일부 식당에선 반(半)인분 요리, 1인분 코스요리 등과 같은 메뉴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중국 중앙(CC)TV를 비롯해 관영 언론들이 음식 낭비 폐해를 지적하자 그동안 중국 SNS에서 큰 인기를 끌었던 먹방(먹는 방송) 콘텐츠가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중국 SNS인 틱톡과 콰이서우는 온라인 먹방에서 음식을 과하게 섭취하거나 음식 낭비를 조장하는 등의 내용이 담기면 스트리밍 중단을 비롯해 동영상 삭제, 계정 폐쇄 등으로 이어지는 단계별 제재에 나설 것이라고 밝혔다.
체면을 중시하는 중국인은 특히 손님을 접대할 때면 음식을 많이 주문하는 경향이 있다. 상대방이 배불리 먹고 음식을 남겨야 제대로 대접했다고 생각하는 인식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중국식 미덕은 화남보다는 북방 지역으로 올라갈수록 보다 뚜렷하게 나타난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지난 7월 22~24일 지린성을 시찰하면서 “식량안전 보장을 정책의 우선순위에 놓아야 하며 식량생산의 고삐를 놓쳐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사진 = 신화통신>
이랬던 중국이 요즘 음식을 남기는 것을 두고 ‘혀끝에서의 낭비’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중국과학원이 지난 2018년 발표한 보고에 따르면 중국인 한 명당 매 끼니마다 평균 93g의 음식을 남기는 것으로 집계됐으며 끼니 대비 잔반 비율은 11.7%인 것으로 나타났다. 또 2015년 기준 중국에서 낭비된 음식물은 1800만 톤으로 조사됐는데 이는 최대 5000만 명이 1년 동안 먹을 수 있는 양이다. 우리나라 전체 인구의 1년 치 음식이 매년 중국에서 잔반 처리되고 있는 셈이다.
중국에서 잔반 문제가 어제 오늘 일이 아닌데도 근래 들어 시 주석까지 나서서 ‘잔반과의 전쟁’을 벌이고 있는 것은 최근 중국을 둘러싼 대내외 정세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영국 BBC는 “코로나19 사태와 지난 6월부터 두 달 넘게 중국 남부를 강타한 홍수 피해, 나아가 신냉전으로 치닫고 있는 미중 갈등 관계가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중국 지도부가 식량안보에 대한 경각심을 크게 느끼고 있다”고 지적했다.
대내적으로 코로나19 사태와 대규모 홍수 재난은 중국의 식량 수급에 악영향을 끼치고 있는 변수다. 지난해 말 기준 중국의 식량자급률은 97% 수준이다. 하지만 식량 수입비율은 20%에 이른다. 밀, 대두 등 일부 곡물에 대한 국내 수요가 늘어나자 해외 수입 의존도 역시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코로나19로 인해 각국에서 농산물 수출을 제한하자 중국의 식량 수입이 차질을 빚고 있다는 점이다. 나아가 올 여름 중국 남부 지역의 홍수 피해로 경작지의 약 19%가 침수된 것으로 추산돼 올해 가을 농작물 수확 감소로 이어질 염려가 커지고 있다.
중국 국가홍수가뭄방지 대책본부는 “올해 홍수 피해를 입은 603만2600헥타르 규모의 농지 가운데 114만800헥타르의 농지에서 농작물 수확을 기대하기 어려울 전망”이라고 내다봤다. 전염병과 자연재해로 밥상 물가도 치솟고 있다. 중국 국가통계국에 따르면 7월 중국의 식품 가격은 지난해 같은 기간 대비 13.2% 상승했고, 같은 기간 돼지고기 가격은 무려 85.7% 급증한 것으로 나타났다.
궈수톈 전 중국 농업부 정책법규사 사장은 “중장기적으로 중국의 식량 공급 및 수요가 ‘긴박한 균형’을 유지할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시진핑 주석이 강조한 대로 ‘식량안보’에 각별히 신경 써야 한다”며 “특히 예상치 못한 팬데믹 충격과 극단으로 치닫고 있는 미중 갈등 관계 등 불리한 대외 정세에 맞서 중국은 식량 자급 능력을 높이고 식량 수입원을 다각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