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한국에도 번역 출판된 <미래연표>(가와이 마사시 저)란 책에 등장한 인구감소 시대 일본을 구할 10가지 처방전 중의 하나다.
저출산 고령화로 인구가 급감하고 그만큼 세수도 줄어드는 상황에서 국토 전역에 현재와 같은 도로·교량 등을 유지하는 데 예산을 쓰는 것은 무모한 짓이란 얘기다. 거주할 수 있는 지역을 설정하고 해당 지역에 대해서는 확실한 인프라를 구축하고 나머지 지역은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책에서 예측하는 시나리오대로라면 2040년엔 일본 지방자치단체의 절반가량이 소멸 위기에 직면한다.
사람이 살 수 있는 지역과 살 수 없는 지역을 구분하라는 다소 황당한 내용이지만 이미 일본에서 시나브로 현실이 되고 있다.
아직은 거주·비거주를 명시적으로 구분하는 단계는 아니지만 도로·교량·전기 등 사회간접시설(인프라스트럭처·이하 인프라)의 개보수를 중단하는 곳들이 생겨나고 있다. 인프라가 위험해지니 자연스럽게 살 수 없는 지역이 되고 있다. 인구가 늘고 경제가 성장하는 시대엔 열도 전역을 개발하자는 붐이 일었지만 이제는 정반대의 시대에 접어들고 있는 셈이다.
교각 상판의 균열이 많이 보이는 일본 자동차 전용도로인 수도고속도로
동해에 접하고 있는 도야마현의 도야마시가 대표적인 예다. 도야마시에선 ‘교량 트리아지’란 제도를 운영 중이다. 트리아지(triage)는 프랑스어로 분리, 선별이란 뜻이다. 응급 환자를 다루는 현장에서 사용되는 용어다. 환자 중에서도 부상의 경중을 따져서 치료와 이송의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을 말한다.
도야마시에선 트리아지 개념을 교량 개보수에 적용했다. 사용빈도와 중요도 등에 따라 도야마 시내에 있는 2200여 개의 교량을 3등급으로 구분했다.
활용빈도가 높은 1등급은 필요에 따라 개보수를 즉각 실시하는 곳이다. 2등급은 현재는 문제가 없으나 개보수 수요가 생기면 필요성을 검토하는 곳이다. 3등급은 문제가 생기면 개보수를 하기보다는 사용을 중단하는 곳이다. 실제로 이 정책에 따라 현재 도야마시의 교량 2곳이 사용 중단된 상태다. 자연스럽게 해당 교량 주변엔 야생동물들이 늘었고 사람들의 발길은 더 뜸해졌다. 모리 마사시 도야마시 시장은 최근 도쿄에서 진행한 강연에서 교량 트리아지를 통해 기존에 비해 효율적인 인프라 관리가 가능해졌다며 시민들도 환영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한국도 마찬가지지만 고도 성장기에 인프라의 확대는 경제발전을 보여주는 징표였다. 곳곳에 도로가 깔리고 교량을 세우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일본의 경우엔 1964년 도쿄올림픽을 전후로 인프라의 대대적인 정비가 이뤄졌다. 인프라 확충은 선(善)이란 인식은 버블경제가 무너진 뒤에도 바뀌지 않았다. 거품이 꺼지자 이번엔 경기 부양을 위한 수단으로 인프라 건설이 등장했다. 2000년대 들어 경쟁적으로 인프라 건설에 나섰고 이는 ‘다람쥐 도로’가 늘어나는 계기가 됐다. 다람쥐 도로는 사람은 이용하지 않다보니 다람쥐만 다니는 도로란 뜻이다. 늘어난 인프라가 노후화되면서 일본 사회의 고민이 시작됐다. 지난 2012년 12월 발생한 야마나시현 사사고터널 사고가 한몫했다. 터널 천장이 약 120m 구간에 걸쳐 무너지며 9명이 사망했다. 일본 정부에서 이 사고를 계기로 국가와 지자체가 관리하는 시설에 대해 5년마다 점검을 의무화했다. 이렇게 시작된 첫 조사(2014~2018년)의 결과가 지난 8월 공개됐다. 일본 열도에 퍼져 있는 교량 72만여 개와 터널 1만여 곳의 99%가량에 대한 점검이 이뤄졌다. 교량의 경우 긴급대응이 필요하다는 진단을 받은 곳은 0.1%, 조기 조치가 필요하다는 결과가 나온 곳은 10%에 달했다. 또 사후 발생할 수 있는 사고를 막기 위해 개보수가 필요하다는 결론이 나온 곳도 49%였다. 개보수가 필요 없다는 곳의 비율은 41%에 그쳤다. 터널이나 도로도 진단 비율은 얼추 비슷했다.
대대적인 조사로 진단은 예상보다 잘 이뤄졌지만 관리는 또 다른 문제였다. 점검을 통해 긴급 혹은 조기 대응이 필요하다고 판단된 곳 중 중앙 정부가 관리를 맡고 있는 곳의 교량 53%, 터널 64%에 대해서 보수가 진행됐다. 이에 비해 지자체가 관리하는 곳에서는 보수공사가 시작된 비율이 교량과 터널 각각 20%와 24%에 그쳤다. 향후 위험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는 진단을 받은 곳에 대해서도 사정은 비슷하다. 중앙 정부가 관리하는 곳에서는 보수에 나선 사례가 교량 26%, 터널 29%였다. 이 비율이 지자체가 관리하는 곳에서는 교량 2%, 터널 6%에 머물렀다.
예산도 담당할 직원도 없어서다. 긴급성은 인식하면서도 보수는 후순위 사업으로 밀리는 경우가 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손을 쓰지 못하는 사이에 인프라들의 노후화는 더 진행되면서 이럴 바엔 사용을 제한하자는 목소리도 날로 커지고 있다. 올 들어 잇따른 자연재해에 노후 인프라로 인한 피해가 늘면서 관련 논의도 탄력을 받고 있다. 한국에서도 경기를 부양하겠다며 여전히 곳곳에서 인프라 건설이 추진되고 있다. 반면 노후 인프라에 대한 관심이나 투자는 여전히 부족하고 관련 사고는 매년 늘고 있다.
모리 마사시 도야마시 시장
한국서 인프라 건설이 집중됐던 1970~1980년대로부터 40~50년 이상이 지나면서 나타나는 당연한 결과다. 국토교통부에선 지난 2016년 말 기준으로 국내 인프라 중 10%가량이 30년 이상 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이 비율이 10년마다 배씩 늘어 2036년께엔 전체의 44%에 달할 것이다. 인구고령화가 일본에 비해서도 더 빠른 속도로 진행될 것으로 점쳐지는 상황에서 현재의 인프라 정책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해지고 있다.
2019년을 마무리하는 때다. 매년 이맘때가 되면 멀쩡한 보도블록의 수난이 이어지고 있다. 필요한 곳에 예산이 흘러갈 수 있도록 사회적인 논의를 서둘러야 할 시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