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용승 특파원의 월스트리트 인사이트] 미국 CEO 수난시대… 나이키, 언더아머, 위워크 등 1300여 명 퇴출, 맥도널드 CEO도 직원과 불륜 관계로 해임돼
장용승 기자
입력 : 2019.12.05 11:17:44
수정 : 2019.12.05 16:19:48
한 기업의 최고경영자(CEO)는 직장인들의 부러움의 대상이다.
거액 연봉 등 CEO는 ‘성공의 상징’으로 통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올해 미국에서는 이 말이 통하지 않는 분위기다. 나이키, 맥도널드, 위워크 등 내로라하는 미국 대표 기업 CEO들이 물러나는 사례가 잇따르는 등 CEO들이 어느 때보다 잔인한 한 해를 보내고 있어서다. 단순히 경영 부진에 대한 책임뿐만 아니라 사적인 문제 등 불미스러운 일로 자리에서 내려오는 CEO들도 있어 ‘미국 CEO 수난시대’라는 말이 나오고 있다.
최고경영진 고용 정보업체 챌린저 그레이 앤 크리스마스(CG&C)의 최신 보고서에 따르면 올해 들어 지난 10월까지 자리에서 물러난 미국 CEO들은 총 1332명으로 조사됐다고 CNBC, CNN 등 미국 주요 언론들이 보도했다. 이는 CG&C가 2002년부터 조사를 시작한 이래 최고치다. 특히 지난 10월은 가장 혹독한 달로 기록됐다. 한 달간 사퇴한 CEO가 172명으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기 때문이다. CNN은 “CEO로 지내기 매우 안 좋은 시점”이라며 최근 ‘미국 CEO 수난시대’를 묘사했다.
지난 10월 퇴임한 CEO들 중에는 미국 스포츠용품 업체 라이벌 관계인 나이키와 언더아머 CEO가 포함돼 있다. 흥미로운 것은 양사가 같은 날 CEO 사임을 발표했다는 점이다. 지난 10월 22일 나이키는 마크 파커 CEO가 내년 1월에 자리에서 물러난다고 밝혔다. 파커는 2006년부터 나이키 CEO를 맡아온 인물이다. 약 13년 만에 CEO 자리에서 물러난 것으로, 미국 주요 언론들은 그의 사임을 비중 있게 보도했다.
회사 측은 이번 조치가 전자상거래 등에 전문성을 지닌 인물을 발탁한 것이라고 설명했지만 미국 주요 언론들에 따르면 소속 코치가 금지약물을 조직적으로 선수들에게 투입했다는 스캔들에 휘말리는 등 최근 일련의 논란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새 CEO는 이베이 CEO 등을 역임한 존 도나호가 선임됐다. 내년 1월 13일 나이키 CEO에 취임하는 도나호는 현재 나이키 임원이면서 클라우드컴퓨팅 회사 서비스나우(ServiceNow)의 사장 겸 CEO다.
나이키는 파커 CEO가 사임한 뒤에도 “의장(executive chairman)이 돼 이사회를 계속 이끌며 도나호를 비롯한 고위 간부직들과 긴밀히 협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또 같은 날 언더아머 창업자겸 CEO 케빈 플랭크가 자리에서 내려온다고 회사 측은 밝혔다.
이 역시 적지 않은 파장을 낳았다. 플랭크는 무려 23년 만에 수장 자리에서 내려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메릴랜드대 풋볼팀 주장이던 플랭크는 경기 중 땀에 젖은 언더웨어에 혁신적인 통풍 기법을 도입한 스포츠 의류를 개발한다는 개념으로 1996년 워싱턴DC의 할머니 집 지하실에서 언더아머를 창업했다.
스티브 이스터브룩 맥도널드 전 CEO, 케빈 플랭크 언더아머 CEO, 마크 파커 나이키 CEO
플랭크는 최근 여성 언론인과 스캔들이 터진 바 있다. 아울러 그의 사임 발표 이후 언더아머는 미국 당국으로부터 회계 관행에 관한 조사를 받고 있다고 밝혀 이 역시 사임에 영향을 준 것이 아니냐는 관측이 나온다. 언더아머는 지난 11월 3일 성명을 내고 미 증권거래위원회(SEC)와 법무부의 조사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회사는 “2017년 7월부터 회계 관행과 관련 공시에 관한 정보와 자료 요구에 응하고 있다”고 밝혔다.
내년 1월 1일부터 언더아머 최고운영책임자(COO) 패트릭 프리스크가 CEO를 맡을 예정이다. 이에 앞서 지난 9월에는 사무실 공유업체 위워크의 창업자겸 CEO 아담 노이만이 기업공개(IPO) 실패 등의 이유로 물러났다. 위워크는 올해 미국 증시의 기대주로 꼽혔지만 상장 추진 과정에서 막대한 적자와 불안정한 회사 지배구조 등이 드러나면서 결국 상장 계획을 무기한 연기했다. 특히 노이만은 이 과정에서 기행과 마리화나 복용 등의 문제가 폭로됐다. 또 미국 전자담배 쥴 제조사인 쥴 랩스의 케빈 번스 CEO도 지난 9월 자리에서 물러났다.
쥴은 지난 2015년 출시 이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지만 미국 내 부정적 이미지가 확산되고 있는 데다 정부의 잇따른 규제강화에 직면하면서 번스가 사퇴한 것이라고 미국 주요 언론들은 전했다. 아울러 전자담배와 관련 있는 것으로 추측되는 의문의 폐질환과 사망자가 나온 것도 사임 이유로 거론된다. 앤드류 챌린저 CG&C 부사장은 “지난 10월에는 유명한 CEO들의 줄사퇴가 이어졌다”며 “사생활, 경영 책임 등이 주요 이유였다”고 설명했다.
CG&C 보고서에는 포함돼 있지 않지만 CEO 대량 사퇴 추세는 11월에도 이어졌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맥도널드다.
‘햄버거 대명사’ 맥도널드의 스티브 이스터브룩 CEO는 11월에 해고됐다. 특히 사내 규정을 어기고 직원과 사적 관계를 맺은 사실이 드러나 큰 충격을 줬다. 맥도날드는 11월 3일 “이스터브룩은 직원과의 ‘합의된 관계(consensual relationship)’로 회사 규정을 위반했다”며 해고 사실을 발표했다. 이스터브룩은 “실수를 인정하고 이사회 결정에 따르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스터브룩은 2015년 맥도날드 CEO로 취임했으며 재임 기간 맥도날드 주가가 2배 가까이 상승하는 등 성과를 내 2017년에는 총 2180만달러의 보수를 받기도 했다. ‘성공의 아이콘’이었던 이스터브룩이 직원과 사적 관계 문제로 불명예 퇴진하게 된 셈이다. 그의 해임에 따라 크리스 켐프친스키 맥도날드 미국법인 사장이 CEO직을 새로 맡았다.
한편 앤드류 챌린저 CG&C 부사장은 올해 자리에서 물러난 CEO들이 유독 많은 이유에 대해 “지난 10년간 확장세였던 기업들이 새로운 리더십을 필요로 하는 단계에 접어들었다”며 “변화하는 기술이나 현재 경제상황, 내년 전망에 따라 인사 교체가 이뤄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빠른 기술 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것도 그렇지만 정책, 권력지형 변동으로 인한 CEO 교체도 두드러졌다.
CG&C 보고서에 따르면 올해 CEO들이 가장 많이 물러난 분야는 281명의 정부·비영리부문으로 조사됐다. 이어 통신·전자부문(188명), 금융업계(104명) 등의 순으로 나타났다.
한국 주요 기업들은 연말 인사를 앞두고 있다. 미국에서는 ‘CEO 수난시대’라는 말이 나오고 있는 가운데 한국에서는 어떤 흐름이 나타날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