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헌철 특파원의 워싱턴 워치] 탄핵 소용돌이에 빠진 트럼프… 민주당 ‘살라미 전술’ 反트럼프 정서 극대화, 내년 대선 못 이겨도 상·하원 장악 노림수
신헌철 기자
입력 : 2019.12.05 11:13:03
수정 : 2019.12.05 11:13:25
내각제 국가에선 수시로 의회 해산을 통해 새로운 정부가 구성되곤 한다. 반면 대통령제 국가에선 국정 안정을 위해 대통령의 임기를 보장하는 것이 원칙이다. 현직 대통령을 권좌에서 끌어내리는 것이 흔한 일이 아니라는 얘기다.
대통령제 국가의 ‘원형’이라 불리는 미국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탄핵 절차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백악관 인턴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던 빌 클린턴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 시도가 있었던 1998년 이후 21년 만의 일이다. 미국 헌법은 현직 대통령을 반역죄, 뇌물죄, 중대범죄 등을 이유로 탄핵할 수 있는 절차를 마련해두고 있다. 하지만 역사상 실제로 탄핵에 의해 대통령직을 박탈당한 경우는 한 번도 없다. 국회가 소추하고 헌법재판소가 인용하면 탄핵이 완성되는 한국과 달리 미국은 선출 권력인 상·하원이 탄핵 권한을 나눠 갖고 있다. 탄핵을 위해선 우선 하원 차원의 조사가 선행돼야 한다. 주로 법사위가 주도해 자료를 수집하고 증인들을 불러 청문회를 여는 게 관례였지만 트럼프 대통령 탄핵 조사는 하원 정보위원회가 주도하고 있다. 익명의 중앙정보국(CIA) 요원의 제보로 우크라이나 스캔들이 촉발된 데다 애덤 시프 정보위원장이 민주당의 대표적인 ‘공격수’라는 점과도 맞물려 있다.
조사에 걸리는 시간은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고무줄’처럼 늘어질 수 있다. 민주당은 애초 11월 내에 조사를 완료하겠다고 했다가 크리스마스 전으로 시간표를 연장한 상태다.
리처드 닉슨 전 대통령의 경우 1973년 12월 탄핵조사위원회가 발족했고 공식 청문회는 이듬해 5월부터 열렸다. 탄핵안은 7월에 작성됐고 하원 표결 직전에 닉슨이 물러난 것은 8월 초였다.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은 이른바 ‘르윈스키 스캔들’이 터진 지 약 11개월 만인 1998년 12월 하원에서 탄핵이 의결됐다.
윌리엄 테일러(오른쪽) 우크라이나 미국대사 대행과 조지 켄트 국무부 유럽·유라시아 담당 부차관보가 하원 정보위원회 주관으로 열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탄핵조사 공개 청문회에서 증인 선서를 하고 있다.
이번에도 하원 표결은 일러야 내년 1월이 될 것으로 보인다. 그 후에도 상원이 다시 탄핵 심리를 열어야 한다. 상원 다수당인 공화당은 민주당의 대선 경선 일정을 감안해 심리를 의도적으로 지연하는 전략을 검토하고 있다. 엘리자베스 워런, 버니 샌더스, 캐멀라 해리스 등 주요 대권주자들은 모두 현역 상원의원이다. 심리에는 100명인 상원의원 전원이 참여하는 게 원칙이다. 따라서 심리가 마냥 늘어지는 것은 대선 레이스에 참여 중인 의원들로서는 불리한 요인이 된다. 상원 심리에 이목이 집중되면 상대적으로 민주당 경선의 열기가 약화될 우려도 있다.
일단 민주당은 하원 탄핵 조사를 비공개에서 공개로 전면 전환하고, TV 생중계를 통해 여론몰이에 나선 상태다. CNN,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등 반(反)트럼프 성향의 언론들은 탄핵 이슈에 올인하고 있다. 하지만 냉정하게 말해 실제로 트럼프 대통령이 백악관에서 쫓겨날 가능성은 희박하다. 재적 435명인 하원에선 과반수(218명)가 찬성하면 탄핵안이 가결된다. 하지만 대통령이 물러나려면 상원(재적 100명)에서 출석의원 3분의 2(67명) 이상이 찬성해야 한다. 민주당은 하원에서 235석을 차지하고 있어 가결 정족수를 넉넉히 넘어선다.
반면 상원에선 47석(민주당 성향 무소속 2석 포함)에 그치기 때문에 공화당에서 최소한 20명의 반란표가 있어야 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공화당을 완벽히 장악하고 있다. 유타주 상원의원이자 2012년 대선 당시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밋 롬니 의원 등 4~5명 정도가 돌아설 가능성은 있다. 하지만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당시 김무성·유승민 의원 등의 주도로 여당의 상당수가 돌아서 국회의 탄핵소추가 가능했던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트럼프 대통령과 공화당은 내년 11월 대선과 상하원 선거를 앞두고 일종의 ‘운명 공동체’가 형성돼 있다.
민주당이 이를 모를 리 없다. 민주당의 정치적 목표는 트럼프 대통령의 재선 가능성을 최대한 낮추고, 이에 실패하더라도 하원 다수 의석을 유지하고 나아가 상원까지 탈환하는 것이다. 만약 트럼프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하더라도 상·하원을 모두 내주면 사실상 ‘식물 대통령’으로 전락하게 된다. 민주당과 공화당으로 갈라진 민심을 고착화하는 것도 정치공학적으로 불리할 게 없다. 민주당 지지층을 투표장으로 끌어내려면 반(反)트럼프 정서를 극대화해야하기 때문이다. 민주당이 비공개 청문회에 이어 공개 청문회에 똑같은 증인들을 불러 재탕 삼탕 청문회를 하는 것은 일종의 ‘살라미 전술’이다. 유권자들에게 반복 주입을 통해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각인시키겠다는 것이다. 민주당은 트럼프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정부에 조 바이든 전 부통령 아들이 관련된 국영 에너지 업체 ‘부리스마’의 조사를 요구한 것을 놓고 명백한 탄핵 사유라고 주장하고 있다. 실제로 청문회장에 출석한 외교관들은 트럼프 대통령이 자신의 정치적 이해관계 때문에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원조 등을 지렛대로 이용했다고 증언했다. 정치 용어로 대가성 거래를 의미하는 ‘퀴드 프로 쿼(quid pro quo)’가 존재했다는 얘기다. 트럼프 대통령이 자신에게 부여된 외교 권한을 남용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트럼프 대통령은 백악관 관계자들의 의회 증언을 가로막기도 했다. 정치적·윤리적으로 지탄받을 사안이지만 이것만으로 대통령을 쫓아내야 하는지는 결국 정파적 판단에 좌우될 수밖에 없다. 헌법재판소가 법리적 판단을 하는 우리나라와 달리 미국의 탄핵 제도는 처음부터 끝까지 정치적 판단으로 이뤄진다는 결정적 차이가 있다. 1973년 워터게이트 사건에 직면한 리처드 닉슨 전 대통령은 하원과 상원에서 탄핵 찬성이 유력해보이자 스스로 물러나는 방식을 택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경우 이 같은 가능성도 제로라고 볼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반대로 이번 탄핵 사태를 지지층 규합의 기회로 삼겠다는 전략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탄핵 대응을 스스로 총지휘하면서 “역사상 최악의 마녀사냥”이라는 가이드라인을 내놓았다. 그는 탄핵 조사를 ‘서커스’에 비유하면서 조롱하고 있다.
결국 트럼프 대통령을 둘러싼 탄핵 논란은 상·하원 표결이 아니라 내년 11월 3일 열리는 미국 대선에서 최종 판가름이 날 수밖에 없다. 분열적 정치 행보를 당연시하며 지지층만 바라봤던 트럼프 대통령은 국정운용 동력을 잃고 당분간 탄핵 대응에만 골몰하게 됐다. ‘자승자박’인 셈이지만 미국이 표류하면 전 세계에 엄청난 나비효과가 불어 닥친다는 것은 우리로서도 문제가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