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재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44일간의 드라마가 끝났다. 결론은 한국기업의 승리. 삼성물산과 미국 헤지펀드계의 거물 엘리엇의 싸움은 시종일관 긴장감 넘치는 한판승부였다. 한국의 대표기업 삼성의 지주회사격인 삼성물산의 새 골격을 완성하느냐, 아니면 글로벌 헤지펀드의 공격에 급제동이 걸리느냐의 관전 포인트로 국내외 언론과 기업계가 촉각을 곤두세웠다. 지난 7월 17일 실시된 표 대결에서 삼성이 70%에 달하는 찬성률을 거뒀지만 합병에 필요한 찬성표(주주총회 참석주주 3분의 2인 66.67%)보다 2.86%포인트 많았다.
미국 월가의 헤지펀드업계 관계자는 “이걸로 엘리엇과의 싸움이 끝난 게 아니다. 엘리엇은 소송 제기와 이사진 파견 등의 카드를 활용해 계속 삼성을 압박하면서 단기간 내에 고수익을 뽑아먹으려 할 것이다. 다음 타깃은 삼성전자일 것”이라고 예상했다. 삼성전자의 4.1% 지분을 들고 있는 삼성물산을 통해 삼성전자 경영권을 우회적으로 공격할 것이라는 얘기다. 노무라증권도 외국계 헤지펀드들의 다음 공격 대상이 삼성전자가 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삼성전자 지분의 절반 이상을 외국인이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헤지펀드들이 외국인 주주들과 연대하자는 신호를 보낼 개연성은 충분히 있다.
펀드 간 전쟁도 다반사…물고 물리는 정글
이번 사태를 계기로 글로벌 기업들을 무차별 공격하는 행동주의 헤지펀드 주의보가 다시 켜졌다. 이들은 대부분 미국 맨해튼 미드타운에 본사를 두고 있으며 맨해튼 7번 애비뉴 888번지 건물과 맨해튼의 관광명소로 꼽히는 플라자호텔 맞은편 GM빌딩에 주로 밀집해 있다. 헤지펀드계의 ‘떠오르는 별’로 꼽히는 빌 애크만 퍼싱스퀘어캐피털매니지먼트 설립자 겸 최고경영자(CEO)가 이곳에 둥지를 틀었고 아이칸엔터프라이즈, 자나파트너스 등 매섭기로 유명한 행동주의 헤지펀드도 몰려 있다.
이들의 공격 목표는 그야말로 전방위적이다. MS, 듀폰, 델, 애플 등 글로벌 공룡 기업들도 행동주의 헤지펀드의 공격을 받고 번번이 곤란한 처지에 놓였다. 엘리엇은 작년 7월 미국 정보기술(IT)기업인 EMC의 지분 2%를 매입한 뒤 경영진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지난 2013년 1월에는 미국 석유회사인 헤스를 공격해 창업자의 아들을 몰아내고 사업부 분사·매각이란 항복을 받아냈다. 엘리엇은 또 노키아가 인수하려는 프랑스·미국계 업체인 알카텔 루슨트 지분 1.3%를 지난 6월 확보해 ‘알박기’에 나섰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엘리엇은 남의 인수합병 과정에 끼어들어 이익을 챙겨왔다”고 분석했다.
세계 최대의 소프트웨어업체인 마이크로소프트(MS)는 2년 전 행동주의 헤지펀드인 밸류액트의 압박에 밀려 이들에게 이사 자리를 내눴다. 밸류액트가 매집한 MS 지분은 0.8%였다. 억만장자 행동주의 투자자인 칼 아이칸은 애플의 팀 쿡 최고경영자(CEO)를 접촉해 자사주 매입 확대를 노골적으로 주문하기도 했다.
트라이언매니지먼트의 넬슨 펠츠는 듀폰 CEO를 만나 경영 개선을 주문했다. 펠츠는 대형 스낵음료업체 펩시코의 CEO에게 몬델레즈 인터내셔널을 인수하고 수익성이 떨어지는 음료부문을 분사하라고 압박했다. 야후도 행동주의 투자자의 표적이 되면서 CEO를 교체했다.
헤지펀드리서치와 프레킨 등에 따르면 행동주의 헤지펀드의 운용자산 규모는 2009년 362억달러에서 올해 6월 말 기준 1400억달러로 급증했다. 행동주의 투자자들의 몸집이 불어나면서 이들이 글로벌 대기업을 공략하는 사례는 갈수록 늘어날 전망이다.
행동주의 헤지펀드의 공격 성향은 기업에만 표출되는 게 아니다. 헤지펀드끼리 치열한 자존심 대결을 펼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미국 건강보조식품 업체인 허벌라이프를 놓고 벌어진 혈투가 대표적이다. 헤지펀드계 큰손 빌 애크만은 허벌라이프가 피라미드형 사기를 저질러 고객들의 피해가 발생했다고 폭로해 허벌라이프 주가를 뒤흔들었다. 애크만이 허벌라이프 주식 공매도에 나섰다는 소식에 주가는 급락했다. 애크만의 공매도에 편승하는 중소 헤지펀드도 나타났다.
이에 또 다른 행동주의 헤지펀드인 서드포인트의 대니얼 로브는 허벌라이프 주식을 사들이면서 애크만의 반대편에 섰고 칼 아이칸이 이 회사 지분 인수에 합류해 역시 애크만과 대립각을 세웠다. 헤지펀드 업계에서 애크만과 아이칸은 숙명의 라이벌로 알려져 있다. 글로벌 금융계의 큰손 조지 소로스도 애크만과 한판 승부를 벌이는 등 물고 물리는 ‘헤지펀드 춘추전국시대’가 이어지고 있다.
황금주·차등 의결권 등 경영권 보호장치 시급
금융 전문가들은 한층 몸집을 불린 행동주의 투자자들이 ‘월가금융제국’의 큰손으로 부상하고 있으며 한국 대기업들을 상대로 2차 공습을 벌일 개연성이 충분한 만큼 2차 공습에 대비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오너 지분율이 낮고 기업가치가 저평가돼 있는 데다, 유동성 확보가 용이한 한국 대기업들이 미국 기업들 외의 고수익을 거둘 수 있는 사냥감으로 거론되기 때문이다.
재계는 2003년 SK-소버린 사태 이후 해외 투기자본에 대항할 수 있는 경영권 보호장치 도입을 지속적으로 요구해왔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국내 기업이 적대적 인수합병(M&A) 공격을 받을 때 대주주가 일반 주주들보다 의결권을 많이 확보할 수 있도록 하는 차등의결권주, 주요 경영 안건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하는 특별주식인 황금주, 기존 주주가 시가보다 저렴한 가격에 지분을 매입할 수 있는 포이즌필 등의 도입은 한국경제를 지탱해온 기업들의 마지막 보루라는 점에서 이번 삼성 사태를 계기로 제도적 보완이 시급하다는 게 재계의 한결같은 주문이다. 물론 경영실적 개선, 지배구조 보완, 주주친화정책 제고 등 기업 자체적으로 노력해야 할 과제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게 이번 삼성 사태의 또 다른 교훈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