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래 첫 여성 미국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의장 자리에 오른 재닛 옐런의 미국 경제대통령 등극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연준의장 지명권자인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당초 옐런보다는 래리 서머스 전 재무장관(현 하버드대 교수)을 연준의장 자리에 앉히고 싶어 했다. 오바마 대통령이 개인적으로 옐런보다는 서머스와 가깝게 지내왔던 터라 서머스와 더 말이 잘 통했기 때문이다.
서머스 전 재무장관은 오바마 1기 국가경제위원회 위원장(2009~2010년)을 지내면서 오바마 대통령과 호흡을 맞췄다. 서머스 전 장관이 백악관을 떠난 뒤에도 오바마 대통령은 서머스의 인사이트가 필요할 때마다 수시로 백악관으로 불러들여 의견을 청취했다. 반면 옐런은 오바마 대통령과의 스킨십이 부족했다. 오바마 대통령이 서머스 연준의장 카드를 꺼내든 배경이다.
그런데 정치권과 여론이 문제였다. 서머스 전 재무장관의 까칠하고 독선적이며 오만한 성격을 들어 그를 비토하는 의원들이 한두 명이 아니었다. 지난 1999~2001년 빌 클린턴 행정부 때 재무장관을 맡았던 서머스가 당시 금융규제를 확 풀어주는 바람에 2008년 9월 글로벌 금융위기가 촉발됐다는 비판도 적지 않았다.
결국 지난해 9월 서머스 전 장관이 스스로 연준의장 후보직을 고사했고 오바마 대통령은 옐런을 연준의장으로 지명했다. 하지만 의장 지명 후에도 논란은 있었다. 이스라엘 중앙은행 총재와 국제통화기금(IMF)부총재를 역임한 스탠리 피셔를 연준 부의장으로 지명하자 시장은 또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피셔는 벤 버냉키 전 연준의장의 은사로 연륜이나 경력으로 볼 때 옐런의장보다 더 거물이었기 때문이다. 옐런도 쉽게 상대하기 힘든 인물을 연준 2인자로 지명하자 호사가들은 오바마 대통령이 여전히 옐런 의장을 100% 신임하지 않는 것 아니냐는 진단을 내놓기도 했다. 그만큼 옐런이 연준의장으로서의 능력을 더 보여줘야 하는 상황에 직면한 셈이다.
취임하자마자 위기관리 시험대
지난 2월, 4년 임기의 연준의장으로 취임한 옐런은 업무를 시작하자마자 거센 도전에 직면했다. 연준 양적완화 축소(테이퍼링)와 중국 경기둔화라는 직격탄을 맞은 터키, 아르헨티나 등 신흥경제가 뭉칫돈 이탈과 이에 따른 통화가치 폭락으로 요동을 치는 상황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2월 들어 연준은 시장에서 국채와 주택담보부증권(MBS)매입규모를 월간 200억달러 줄였다. 지난해 말까지 월 850억달러어치의 채권을 시장에서 사들였지만 이제는 650억달러어치만 매입하고 있다.
앞으로 미국 연준의 통화정책을 결정하는 미국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정례회의가 열릴 때마다 100억달러씩 추가 테이퍼링에 들어가 10~12월께 양적완화정책을 완전 중단한다는 게 연준의 생각이다. 그동안 양적완화로 넘쳐나는 유동성이 신흥시장에 대거 유입됐던 만큼 이를 줄이는 테이퍼링이 시작됐기 때문에 신흥시장에서 그만큼 뭉칫돈이 이탈할 수 있는 개연성이 커진 게 사실이다.
2월 중순 들어 신흥통화 투매사태가 다소 완화되고는 있지만 언제든지 신흥시장 위기설이 불거질 수 있다는 점에서 옐런 의장 입장에서 상당히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다. 물론 옐런 의장은 아직까지 신흥시장 상황이 테이퍼링 속도에 영향을 줄 정도로 심각한 것으로 보고 있지는 않다.
“신흥시장 위기가 미국 경제·금융시장에 경고등을 울릴 만큼 위협적이라고 보지 않는다”는 게 옐런 의장의 생각이다. 하지만 무리한 추가 테이퍼링으로 신흥경제가 통제불능 상황에 처할 경우, 미국 경제가 역풍을 맞을 수 있다는 점에서 신흥시장 상황을 예의주시할 것으로 보인다.
사실 신흥시장 이슈가 아니더라도 테이퍼링 속도를 어떻게 가져가고 양적완화 전면 중단 시점을 언제로 할지를 결정하는 것 자체가 도전적인 과제다. 미국 경기 회복을 전제로 테이퍼링을 진행하고 있는데 만약 회복세가 연준 기대에 미치지 못할 경우, 테이퍼링을 중단하거나 규모를 줄여야 하는 상황에 직면할 수도 있다.
“신흥통화 투매 사태가 심화되거나 주가가 폭락하더라도 테이퍼링 속도를 늦춰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리처드 피셔 댈러스 연방준비은행 총재 등 연준 내 매파 세력들을 불협화음 없이 이끌어가는 리더십을 발휘하는 것도 옐런 의장에게는 중요한 일이다.
변동성이 커진 증시도 옐런 의장에게는 골칫거리다.
그동안 연준은 양적완화를 통해 주식 등 위험자산 가격을 끌어올려 부의 효과(wealth effect)를 극대화하는 데 집중했다. 가계 가처분소득을 늘려 소비를 촉진하고 이를 통해 총수요를 확대, 미국 경기회복 모멘텀 강화를 유도했다. 그런데 주가가 떨어지면 역의 부의 효과(negative wealth effect)가 나타나 오히려 소비가 줄어들 수 있다. 때문에 증시 조정이 심화될 경우, 추가 테이퍼링 여부를 놓고 옐런 의장의 고민이 깊어질 수 있다.
‘양적완화’ 버냉키와 찰떡궁합
지난 2010년부터 연준 부의장으로 버냉키 의장과 함께 경기부양을 위한 양적완화 정책을 이끌어온 옐런은 연준 내 대표적인 비둘기파(물가보다는 성장에 무게중심)다.
특히 옐런 차기의장은 버냉키 의장보다도 더 강력한 초완화 통화정책을 지지하는 여왕 비둘기다. 양적완화를 통한 경기부양조치를 금과옥조로 여기며 버냉키 의장과 찰떡궁합을 과시했던 옐런은 의장 취임 첫 일성으로 버냉키 전 의장의 통화정책 기조를 그대로 유지하겠다고 강조했다. 또 옐런 의장은 실업률이 6.5% 아래로 떨어지더라도 기준금리를 곧바로 인상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지난해 12월 FOMC 정례회의 후 버냉키 전 의장도 실업률이 6.5% 아래로 하락하더라도 기준금리를 인상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 이와 함께 옐런 의장은 미국 경제가 연준이 기대한대로 개선될 경우, 테이퍼링 규모를 지속적으로 확대할 것이라고 밝혔다. 다만 추가 테이퍼링과 관련해 미리 확정된 길(pre-set course)이 없다는 점을 강조, 혹시라도 미국경제가 나쁜 쪽으로 현격한 변화(notable change)를 보일 때는 테이퍼링 속도를 조절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것도 버냉키 의장이 몇 차례에 걸쳐 밝혔던 내용이다. 당분간 옐런 의장의 통화정책이 버냉키 전 의장 통화정책을 그대로 이어받은 버냉키 2.0버전 수준에서 유지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는 배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