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버스터(Filibuster)란 의회에서 이뤄지는 고의적인 의사진행 방해 행위를 말한다. 소수파가 다수파의 독주를 막기 위해 쓰는 극약처방이다. 중세시대의 해적 사략선(私掠船)이 그 어원인데, 정정당당한 방법이 아니라는 뉘앙스가 숨어있다.
필리버스터의 가장 고전적인 형태는 더 이상 말할 수 없을 때까지 계속 말하는 방식이다. 요리책이나 전화번호부를 읽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식의 필리버스터는 원조인 미국에서조차 자주 있는 일은 아니다. 그런데 얼마 전 미 상원에서 그런 일이 벌어졌다.
랜드 폴(공화·켄터키) 상원의원은 지난 3월 6일 오전 11시 47분 “더 이상 말할 수 없을 때까지 계속 말하겠다”고 말문을 열었다.
2년여 만에 ‘진짜’ 필리버스터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짙은 회색 양복 차림에 빨간색 넥타이를 맨 폴 의원은 무인기의 부적절한 사용이 왜 문제가 되는지를 장황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마침 상원 기자실을 들렀던 기자는 그 현장을 생생하게 구경할 수 있었다.
원래 이날은 존 브레넌 중앙정보국장(CIA)에 대한 상원 인준 표결이 예정된 날이었다. 여당인 민주당에서는 “만장일치로 통과되길 기대한다”며 들떠 있던 참이었다. 여기에 폴 의원이 ‘찬물’을 끼얹은 것이다. 그가 CIA국장 인준을 걸고넘어진 이유는 브레넌 지명자가 무인기 도입과 작전을 기획한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미 상원 전체 회의장은 규모가 굉장히 아담하다. 상원의원 100명을 위한 좁은 책상과 의장석, 진행요원 몇명을 위한 공간이 전부다. 폴 의원의 ‘외로운 투쟁’을 지켜보는 사람은 속기용 타자기를 목에 건 속기사 한 명과 임시의장, 몇몇 진행요원 그리고 10여명의 방청객이 전부였다. 다른 상원의원들은 죄다 자리를 떴고, 간간히 기자와 보좌관들이 상황을 점검할 뿐이었다.
랜드 폴 상원의원(가운데)
한 템포 쉬어갈 줄 아는 미국 정치문화
폴 의원을 지켜보며 새삼 느낀 사실은 사람이 한 자리에서 몇 시간째 말을 한다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이라는 점이었다. 먹고 마시고 배설해야 하는 인간의 생리적 한계에 거스르는 일이기도 하다. 결국 세 시간을 넘기면서 같은 당 동료들이 구원의 손길을 내밀기 시작했다.
마이크 리, 테드 크루즈, 제리 모란, 마르코 루비오 등 다른 공화당 상원의원들이 짬짬이 ‘시간벌기’에 나섰다. 그 틈을 이용해 폴 의원은 뭉친 다리를 풀고, 화장실에 다녀올 수 있었다. 식사는 발언 중에 땅콩 같은 스낵을 집어먹는 것으로 대신했다.
필리버스터가 시작된 6일은 겨울 눈폭풍이 워싱턴 D.C. 인근을 강타한 날이었다. 상원의원 100명 가운데 94명이 이런 악천후를 뚫고 의사당에 모여들었다. 전날 여야가 합의한 인준을 처리하기 위해서였다. 이번 인준을 위해 애간장을 태웠던 민주당은 말할 것도 없고, 나머지 93명의 상원의원 입장에서는 화가 날만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비난이나 고함은커녕 짜증 섞인 말 한마디도 들리지 않았다.
필리버스터는 약 13시간 후인 이튿날 0시 40분까지 지속됐다. 물론 결과는 허무했다. 미 상원은 이튿날인 7일 오후 브레넌 국장 지명자의 인준안을 찬성 63표, 반대 34표로 통과시켰다.
문득 ‘윈-윈(Win-Win) 게임’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폴 의원은 자신의 정치적 소신을 원 없이 국민들에게 밝혔고, 여야 정치권은 당초 계획대로 인준을 처리했으니 모두가 해피한 상황이다. 백악관은 사적인 채널을 통해 폴 의원에게 무인기 정책을 따로 설명한 것으로 전해진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도 성의 표시를 한 셈이다.
USA투데이는 이날 인터넷 홈페이지에 ‘랜드 폴의 13시간을 13초로(Rand Paul’s 13 hours in 13 seconds)’라는 제목의 동영상을 띄웠다. 폴 의원 등이 13시간 동안 주장한 내용을 사회자가 빠른 목소리로 13초 동안 요약하는 풍자 동영상이었다.
한 템포 쉬어갈 줄 아는 정치, 동료 정치인의 ‘몽니’마저 존중할 줄 아는 정치문화가 인상 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