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약값 문제를 명분 삼아 유럽연합(EU)을 향한 무역 압박에 본격적으로 시동을 걸었다.
중국과의 무역 전쟁이 1차 협상에 다다르자 이제 주요 동맹국을 겨냥한 셈이다. 명분은 명확하다. “미국이 더 이상 다른 나라의 사회주의 의료 체계를 보조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12일(현지시간) 백악관 브리핑에서 “미국은 세계 인구의 4%에 불과하지만, 제약사 이익의 3분의 2 이상이 미국에서 나온다”며 “다른 나라들은 미국 제약사의 신약을 값싸게 가져가면서 미국 환자들만 과도한 부담을 지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번 조치는 ‘약값 인하’라는 민감한 국민적 이슈를 정치적으로 활용하는 동시에, 글로벌 제약 산업에 미국의 우위를 강화하려는 전략으로 해석된다.
미국은 오랜 기간 세계에서 가장 높은 약값을 지불해 왔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를 “불공정한 글로벌 시장 구조”로 규정했다.
신약 개발에는 막대한 자금과 시간이 들어가지만, 미국 제약사들은 미국에서는 고가에 팔고, 유럽과 같은 나라들에는 강제적인 가격 협상으로 낮은 가격에 공급해 왔다.
“이 구조는 결국 미국 환자들이 전 세계 의료 비용을 보조해주는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 트럼프의 주장이다.
그는 이날 “우리는 제약사들이 EU 등 외국 정부와 가격 협상에서 더 유리한 조건을 받을 수 있도록 도울 것”이라며 “EU가 협조하지 않으면 추가 관세도 검토하겠다”고 경고했다.
트럼프는 특히 유럽연합(EU)을 겨냥해 “가장 심각한 문제 국가들”이라고 지목했다.
독일 등 사회주의 성격의 의료 시스템을 가진 나라들이 제약사에 약값을 낮추도록 강제하면서, 그 부담이 미국으로 전가된다는 설명이다.
이는 트럼프식 ‘미국 우선주의’가 다시 한 번 국제무역 규범의 경계를 시험할 가능성을 시사한다. 그는 이미 대통령 임기 중 중국과의 무역 전쟁, 캐나다·멕시코와의 무역협정 재협상을 통해 이런 방식을 여러 차례 실험한 바 있다.
이번엔 글로벌 제약 시장이 그 무대가 된다. 특히 트럼프는 제약사와 외국 정부 간 가격 협상에 미국 정부가 직접 개입하겠다는 뜻을 밝혀, 이례적으로 ‘민간 기업의 국제 거래’를 정부가 간접 통제하겠다는 입장까지 드러냈다.
트럼프가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미국무역대표부(USTR)의 최근 국가별 무역장벽보고서를 보면 한국 역시 예의주시 대상이다.
보고서에서는 한국의 약값 책정 방식, 보험 등재 시스템, 혁신제약사(IPC) 인증 제도에 대해 ‘투명성이 부족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미국 제약업계는 수년째 한국 정부가 자국 제약사에 비해 미국산 신약에 불리한 가격을 책정하고 있다며 불만을 제기해왔다.
특히, 정부가 인증한 혁신제약사에만 세제 혜택과 높은 약가를 보장하면서도 인증 기준이나 탈락 사유를 공개하지 않는 것은 차별이라고 보고 있다.
이는 향후 한미 무역협상에서 또 다른 불씨가 될 수 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집권하게 되면, 한미 FTA 재개정이 다시 논의될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
트럼프의 이번 행정명령은 단순한 약값 인하 정책으로만 보기 어렵다. 글로벌 공급망과 무역구조, 그리고 국제보건 질서를 동시에 흔들 수 있는 파급력을 가진 ‘정치적 메시지’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같은 접근법이 글로벌 제약 산업의 구조적 혁신으로 이어질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업계 한 전문가는 “트럼프의 구상이 성공하려면 미국 제약사들이 해외 시장에서의 가격을 실제로 올릴 수 있어야 한다”라며 “유럽과 한국을 포함한 여러 나라들은 국가 주도의 보험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어, 단순히 제약사들이 원하는 가격을 받아들이지 않을 공산이 크다”라고 진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