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초반 ‘버블(거품)’이 꺼진 뒤의 일본 경제 모습은 초라했다. 경제가 성장을 멈추면서 모든 것이 제자리 걸음을 하게 된 것이다. 근로자의 임금은 오르지 않고 물건값이나 외식비 또한 변화가 없었다. 오히려 값싼 ‘메이드 인 차이나(중국산)’ 공산품이 들어오면서 물가 하락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지난 30년간 이러한 현상은 지속되어 왔고, 그래서 생겨난 용어가 ‘잃어버린 30년’이다. 하지만 코로나 사태 이후 일본 경제의 모습은 달라졌다. 일본 정부와 중앙은행인 일본은행이 적극적인 양적 완화에 나서면서 물가가 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만성 ‘디플레이션’ 국가였던 일본이 이제는 ‘인플레이션’ 국가로 바뀌는 모양새다. 지난 2022~2023년의 2년 연속 2% 이상 물가가 오른 일본은 올해도 2.8%가량의 물가 인상을 예상한다. 원재료와 인건비가 동시에 오르면서 이는 물건값으로 빠르게 전가되는 분위기다.
일본 물가 상승의 단적인 모습은 수도인 도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지난해 도쿄의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41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한 것이다.
일본 총무성이 발표한 도쿄 23구의 지난해 소비자물가지수(신선식품 제외)는 전년보다 3% 상승했다. 이는 2022년의 2.2%와 비교할 때 상승 폭이 더 커진 것이다. 연간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3%대로 올라간 것은 2차 오일쇼크의 영향이 있었던 1982년 이후 41년 만의 일이다.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식료품값이다. 일본인들이 아침으로 즐겨 먹는 식빵값의 경우 야마자키제빵이 7.3%, 후지빵은 8% 가격을 올렸다. 빵과 같이 먹는 잼 가격 또한 올랐다. 식품회사인 아오하타는 9년 만에 가정용 잼 등 35개 품목의 가격을 3~7% 올렸다.
외식 비용도 늘었다. 기본적으로 유명 레스토랑은 예약하기가 어려운데, 최근에는 별도의 예약비를 받는 식당도 등장했다. 도쿄 긴자의 ‘긴자하치고(銀座八五)’는 인터넷 예약을 유료로 받는다. 1인당 수수료는 500엔(약 4500원)이다. 긴자하치고는 중화풍 라면으로 미슐랭 스타를 받을 정도로 유명한 곳이다. 좌석이 단 6개뿐인 데다, 별도의 예약을 받지 않아 2~3시간 대기는 기본으로 통했다. 오전 11시에 문을 여는데 주말에는 새벽 6시부터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였다. 이곳의 중화풍 기본 라면의 가격은 1200엔(약 1만1000원)인데, 여기에 예약금이 추가되면 가격이 1700엔으로 오르게 되는 셈이다. 예약 시스템은 식당 예약전문사이트인 테이블체크가 운영한다. 테이블체크는 긴자하치고를 시작으로 올해 연간으로 300곳까지 유료 예약제를 확대한다는 계획이다.
일본을 찾는 한국인 관광객들의 ‘최애’ 선물인 위스키 가격도 크게 오른다. 생산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해 품귀현상이 계속되자 업체가 대대적인 가격 인상에 나선 것이다. 일본 식음료업체 산토리는 오는 4월부터 위스키 19종 가격을 최대 125% 인상한다. 이 업체가 생산하는 ‘야마자키(山崎) 12년’ ‘하쿠슈(白州) 12년’ 700㎖ 한 병은 1만엔(약 9만원)에서 1만5000엔(약 13만5000원)으로 50% 인상된다. 연수 표시가 없는 ‘야마자키’와 ‘하쿠슈’는 4500엔(약 4만500원)에서 7000엔(약 6만3000원)으로 56% 오른다. 프리미엄 위스키 제품 가격은 더 뛴다.
‘히비키(響) 30년’ ‘야마자키 25년’ ‘하쿠슈 25년’ 700㎖ 한 병 가격은 기존 16만엔(약 144만원)에서 36만엔(약 324만원)으로 125%나 오를 전망이다. 산토리는 수입 위스키와 와인 가격도 인상한다고 밝혔다. 이 회사는 지난해 4월에도 한 차례 일부 위스키 품목 가격을 인상한 바 있다. 일본 재무부 무역통계에 따르면 일본산 위스키 수출액은 지난해 560억엔으로 10년 새 22배나 늘었고, 수량 기준으로도 7배나 급증했다. 한국도 일본산 위스키 주요 소비처로 떠올랐다. 한국 젊은 층이 탄산수와 토닉 등을 섞은 ‘하이볼’을 즐기면서 일본산 위스키 수입이 급증했다. 한국무역통계진흥원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상반기 한국의 일본 위스키류 누적 수입액은 526만달러로 전년 동기(224만달러) 대비 135%나 늘었다.
코로나 사태 종식 이후 외국 관광객이 지나치게 몰리면서 일본 내에서 ‘오버 투어리즘(과잉 관광)’에 대한 경계심이 일고 있는 가운데 도쿄 도심 고급호텔의 하루 숙박비도 큰 폭으로 올랐다. 미국 호텔 전문 조사업체 STR에 따르면 도쿄 고급호텔의 지난해 상반기 평균객실단가(ADR)는 코로나 사태 이전인 2019년 상반기와 비교할 때 33% 오른 4만6133엔을 기록했다. 이는 같은 기간 뉴욕의 16%, 런던의 30%를 웃도는 숫자다.
호텔별로는 도쿄 도심의 고쿄(왕궁)와 인접한 팰리스호텔 도쿄의 상승률이 두드러졌다. 이곳의 지난해 1~7월 ADR은 8만7999엔으로 2019년 평균인 6만2049엔과 비교할 때 숙박비가 40%나 올랐다. 벚꽃 개화기에 맞춰 관광객이 몰렸던 3~4월의 평균 숙박비는 처음으로 10만엔(약 90만 1700원)을 넘어서기도 했다. 10만엔은 업계에서 최고급 호텔의 숙박비 기준으로 여겨지는 금액이기도 하다. 도쿄를 대표하는 데이코쿠호텔 도쿄의 경우 2019년 3월 3만6045엔이던 ADR이 지난해 2분기에는 6만엔 근처까지 상승했다. 도쿄역에 인접한 샹그릴라호텔 도쿄도 코로나 이전보다 약 두 배 가까이 오른 1박에 16만엔은 줘야 겨우 방을 잡을 수 있을 정도다. 고급호텔을 중심으로 가격이 크게 오르고 있지만 일본 내에서는 더 오를 것이라는 분위기다.
지난해 10월부터는 외국인 관광객을 대상으로 한 열차 승차권인 ‘재팬 레일 패스(JR패스)’ 가격이 대폭 올랐다. 기존에 2만9650~3만3610엔이었던 일반 차량용 7일권은 5만엔(상승률 49%~69%)으로, 3만9600~4만4810엔이었던 그린차량용(특실) 7일권은 7만엔(56%~77%)으로 각각 올랐다.
14일권은 4만7250~5만2960엔에서 8만엔으로, 21일권은 6만450~6만6200엔에서 10만엔으로 각각 인상됐다. 6~11세의 경우 종전과 같은 50% 할인이 적용된다. ‘철도왕국’인 일본 전역의 JR노선 길이는 총 1만9000㎞ 이상에 달한다. JR패스 하나로 JR그룹의 거의 모든 철도와 노선버스를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어 일본을 여행하는 데 가장 경제적인 수단으로 알려져 있다.
여기에 일본 대표 관광상품인 후지산을 찾는 관광객은 오는 7월부터 1인당 3000엔(약 2만7000원)을 내야 한다. 현재는 ‘후지산 보전 협력금’이라는 명목으로 1000엔만 내면 됐는데, 이것이 3배로 오르는 것이다.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62호 (2024년 3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