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야경을 감상하며 세계 각지의 맛있는 음식들을 즐길 수 있는 곳. 럭셔리 명품 쇼핑의 성지. 동양과 서양,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도시.
홍콩이라는 도시에 항상 따라다녔던 수식어들이다. 이런 묘한 매력을 바탕으로 홍콩은 아시아를 대표하는 국제도시로 자리잡았다. 지구촌에서 가장 손꼽히는 관광지 중 하나였을 뿐 아니라 아시아 금융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수행해왔다. 하지만 홍콩반환 26년을 맞이한 현재 홍콩은 과거와 다른 모습의 도시로 빠르게 변해가고 있다. 그 중심에는 ‘홍콩의 중국화’가 자리잡고 있다. 중국은 1997년 영국으로부터 홍콩을 돌려받으면서 2047년까지 50년간 홍콩의 체제를 유지하겠다고 약속했었다. 하지만 2019년 범죄인 송환법에 반대해 시작한 홍콩 시위가 직선제 등을 요구하는 반정부 시위로 번지자 중국 정부는 2020년 6월 홍콩국가보안법을 제정하고 2021년에는 홍콩의 선거제를 전면 개편해 ‘애국자’만이 공직에 진출할 수 있도록 하는 등 홍콩 장악에 박차를 가했다. 이에 따라 정치·사회적으로 자기 나름의 세력을 키워온 민주 진영과 시민사회가 궤멸하고 중국에 대해 비판을 해온 언론매체들이 잇달아 당국의 압박으로 문을 닫으면서 더는 예전의 홍콩이 아니라는 평가가 나온다.
월스트리트저널은 “홍콩의 북적이는 거리나 건물은 예전과 크게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정말 중요한 건 도시의 영혼이다. 이미 홍콩의 브랜드는 파괴됐고 영혼은 텅 비었다”고 진단했다. 기자가 지난 9월 중순 홍콩을 방문했을 때도 곳곳에서 중국화된 홍콩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홍콩 주룽반도 서쪽에 위치한 홍콩고궁문화박물관은 과거와 달라진 홍콩의 풍경 중 하나다. 홍콩반환 25주년인 지난해 새롭게 문을 연 고궁박물관은 홍콩의 자금성이라고 불린다. 건물 자체가 자금성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설계한 7층짜리 황금색 건물인 데다 입구의 빨간 문이 중국의 황실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실제 박물관 내에는 자금성에서 가져온 유물 900여 점이 전시돼 있다. 베이징을 가지 않아도 홍콩에서 명과 청나라 시대의 보물을 직접 볼 수 있는 것이다. 전시관 내 안내도 홍콩인들이 주로 쓰는 광둥어나 영어 대신 중국이 표준어로 쓰는 베이징 지역 말인 푸퉁어로 이뤄진다. 홍콩에서 근무하는 한 외국기업 임원은 “아이들이 학교에서 의무적으로 고공박물관을 방문해 현장학습을 진행하고 있다”며 “박물관이 홍콩인들에게 중국 본토와의 문화적 동질성을 높이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홍콩 고궁박물관처럼 상징적인 장소가 아니더라도 홍콩 내 일상 속에 이미 중국이 깊게 스며들어 있었다. 홍콩국제공항에 도착해 택시를 타러 가는 연결통로에서부터 중국 본토 대학의 교육과정 광고를 접할 수 있었다. 도로로 나가자 홍콩 번호판과 함께 중국 본토 번호판을 부착한 자동차들이 자주 눈에 띄었다. 중국 번호판을 함께 달아야 중국과 홍콩을 편리하게 왕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 한국계 금융기관의 홍콩 주재원은 “베이징오페라라고 불리는 경극과 같은 중국 전통 문화공연을 하는 공연장이 많이 늘어났고 서점에도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의 어록을 비롯해 다양한 중국 본토 책들이 진열돼 있다”고 말했다.
특히 홍콩 곳곳에서 홍콩특별행정구역 구기와 함께 펄럭이는 중국 오성홍기를 목격할 수 있었다. 인상적인 건 예외 없이 오성홍기가 홍콩 구기보다 컸다는 점이다. 홍콩에 거주하는 한 외국인은 “크기가 다른 오성홍기와 홍콩 구기를 볼 때마다 마치 홍콩은 중국의 일부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고 말했다. 이 같은 ‘홍콩의 중국화’는 많은 부작용을 가져왔다. 이른바 헥시트(Hong Kong + Exit)가 대표적인 예다. 중국화되는 모습에 불안감을 느낀 외국인과 글로벌 기업들이 홍콩을 외면한 것이다. 2019년 750만 명이었던 홍콩의 인구는 3년 내내 하락세를 보이며 지난해 말 기준 733만 3200명으로 주저앉았다. 아시아 거점을 홍콩에서 싱가포르 등으로 옮기는 글로벌 기업들이 늘어나면서 홍콩의 도시 경쟁력도 타격을 받았다. 일본 모리기념재단이 2022년 발표한 글로벌파워시티지수(GPCI)에서 홍콩은 23위를 기록해 전년(13위)보다 10계단이나 추락했다.
올해 3월 발표된 글로벌금융센터지수(GFCI) 평가에서도 홍콩은 싱가포르(3위)에 밀리며 4위를 기록해 아시아 금융허브 위상에 금이 갔다. 하지만 홍콩도 이대로 주저앉지는 않겠다는 각오다. 특히 홍콩의 중국화에 대한 역발상이 눈에 띈다. 국제금융·물류·무역 중심지인 홍콩의 경쟁력을 중국 본토와 결합해 시너지를 만들겠다는 계획이다.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행사가 지난 9월 13일 홍콩컨벤션센터에서 개최된 ‘2023 홍콩 일대일로 서밋’이다. 이번 행사는 올해 일대일로 이니셔티브 10주년을 맞아 홍콩이 일대일로의 핵심 플랫폼 역할을 하겠다고 선언하는 자리였다. 홍콩 정부 수반인 존 리 행정장관은 개막식에서 “홍콩은 중국 본토와 세계를 연결하는 중요한 통로”라며 “일대일로의 무한한 잠재력을 활용하기 위해 홍콩이 일대일로의 플랫폼 역할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홍콩무역발전국의 피터 램 회장도 “중국과 홍콩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신흥 시장과 더 많은 교류를 해야 하는데 이런 역할은 홍콩이 가장 자신 있는 역할”이라고 강조했다.
우선 금융중심지 기능을 활용해 일대일로 인프라 투자의 자금 조달 기능을 대폭 확대한다는 방침이다. 크리스토퍼 후이 홍콩 재무국고부 장관은 “아시아에서 유명한 채권 시장인 홍콩이 일대일로 이니셔티브의 인프라 프로젝트에 자금을 조달하려는 정부와 기업에 다양한 옵션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홍콩은 달러 패권에 맞서는 위안화의 허브 역할에 큰 기대를 거는 모습이다. 6월 말 기준 홍콩의 위안화 예치금은 약 1조위안으로 홍콩은 전 세계에서 가장 큰 위안화 역외 시장으로 자리잡았다. 달러 패권에 맞서 중국이 중점사업으로 추진 중인 디지털위안화를 위한 홍콩의 행보도 주목된다. 홍콩에서 디지털 위안화의 국제적 통용 가능성을 시험해본 뒤 일대일로 참여 국가들을 중심으로 본격적인 ‘위안화 블록’ 구축에 나설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컨설팅 회사 올리버와이먼의 마이클 호는 “디지털 위안화가 홍콩 무역 결제 용도로 쓰이기 시작한다면 값싸고 신속한 청산 시스템 덕분에 중국 화폐를 더욱 사용할 동기 부여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