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상반기 일본을 찾은 외국인 관광객 중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 곳이 한국이다. 엔저로 비용 부담이 줄어든 데다 코로나로 억눌렸던 해외여행에 대한 갈증을 가까운 나라 일본에서 푼 사람들이 많다는 설명도 된다.
일본에 관광온 사람들이 많이 즐기는 식도락 중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맥주다. 식사와 곁들여 맥주를 마시기도 하고, 한국에서 구하기 어려운 캔맥주를 쇼핑리스트에 넣고 오는 사람도 많다. 돈키호테 등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쇼핑장소에서는 어김없이 맥주 코너를 발견할 수 있다. 맥주에 대해서는 일본인들도 진심이다. 단골 식당이라면 들어서자마자 주인에게 ‘토리아에즈 나마(일단 생맥주부터)’를 외치는 손님의 모습도 쉽게 볼 수 있다. 맥주에 각별한 애정을 갖고 있는 국민들을 위한 일본 맥주회사 간 경쟁도 치열하다. 일본 맥주 시장은 아사히와 기린, 삿포로, 산토리 등 4곳이 시장의 95%를 장악하고 있다.
일본 1위 맥주는 아사히 슈퍼드라이다. 국민맥주라 불릴 정도로 일본인들에게 폭넓은 사랑을 받고 있다. 1987년에 처음 출시됐는데 특유의 톡 쏘고 쌉쌀한 맛이 일품이라는 평가다.
슈퍼드라이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그동안 스핀오프 브랜드 출시를 자제했던 아사히가 오랜만에 슈퍼드라이 신제품을 10월 11일 선보였다. 이름은 ‘아사히 슈퍼드라이 드라이 크리스털’이다. 은색에 검은색으로 로고가 박히는 슈퍼드라이와 차별을 주기 위해 신제품은 붉은색 디자인을 채택했다.
‘드라이’라는 단어가 두 번이나 들어가 맛이 더욱 쌉쌀할 것으로 생각하면 오산이다. 이 제품의 특징은 기존 슈퍼드라이의 알코올 도수인 5%보다 낮은 3.5%라는 점이다. 여성들이 즐겨 찾는 ‘추하이(소주에 탄산수나 과즙을 섞어 만든 술)’ 계열인 호로요이의 알코올 도수가 3%다. 슈퍼드라이 저도주 출시에는 2가지 배경이 있다. 우선 술을 마시는 젊은층 숫자가 줄어들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에 알코올 도수 5%에 대한 거부감이다. 이것도 지나치게 높아 술에 쉽게 취하거나 건강을 해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무알코올맥주 시장이 일본에서는 1조원에 육박할 정도로 큰 것도 이런 배경이 있다.
그렇다고 아사히는 술을 꺼리는 젊은층을 무작정 외면할 수는 없었다. 이들이 쉽게 맥주를 시작하고 장기적으로 즐길 수 있게 하는 무기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 슈퍼드라이의 기존 맛을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알코올 도수를 낮추는 것이었다.
두 번째는 10월부터 개정되는 주세를 염두에 둔 것이다. 일본 맥주 시장은 맥아 함량에 따른 주세 차이로 인해 크게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적인 맥주, 그리고 맥아 함량이 낮은 발포주(핫포슈), 맥아를 아예 쓰지 않거나 발포주에 증류주를 섞은 제3맥주(신장르)로 구분된다. 3종류의 맥주 가운데 맥아 함량이 최소 50% 이상인 맥주가 가장 비싸고, 발포주와 제3맥주 순으로 가격이 매겨진다. 일본 편의점 가격으로 보면 대략 맥주가 캔당 200엔 전후, 발포주는 150~180엔, 제3맥주는 130엔 전후 가격대가 많다. 특히 제3맥주는 기존 맥주의 텁텁한 맛을 싫어하는 젊은층에게 목넘김이 좋다는 평가를 받는 데다 가격마저 저렴해 큰 인기다. 현재 일본 내 맥주 시장은 발포주와 제3맥주 판매량이 전통적인 맥주를 앞질렀을 정도다.
이런 상황에서 10월 주세 개편이 맥주와 제3맥주에 반대로 작용한다. 350㎖ 캔을 기준으로 맥주 세액은 70엔에서 63.35엔으로 떨어진 반면, 제3맥주는 37.8엔에서 46.99엔으로 오른 것이다. 아사히는 세제 변경에 따른 가격 경쟁력에 낮은 알코올 도수를 전면에 내세워 젊은층을 정통 맥주 시장으로 다시 끌어오겠다는 전략이다.
10월 주세 개정에 아사히만큼이나 적극적인 곳이 산토리다. 산토리는 지난해 전체 주류 시장에서 16%의 점유율로 아사히(34%)와 기린(29%)에 이어 3위를 차지했다. 삿포로에 밀려 만년 4위였던 산토리는 프리미엄맥주인 ‘더 프리미엄 몰츠’의 꾸준한 성장으로 수년 전부터 삿포로를 앞서고 있다.
일본 맥주 시장은 가격대로 보면 ‘프리미엄-스탠더드-발포주·제3맥주’ 등 3가지 종류로 구분된다. 프리미엄 계열 맥주로는 삿포로 계열의 ‘에비스’와 산토리 ‘더 프리미엄 몰츠’가 꼽힌다. 스탠더드 맥주에는 아사히 ‘슈퍼드라이’, 기린의 ‘이치방 시보리’가 대표주자다. 발포주는 기린 ‘탄레이’, 제3맥주 톱브랜드는 단연 산토리 ‘킨무기’가 거론된다. 일본 현지에서는 10월 주세 개정의 가장 큰 희생양으로 산토리를 꼽고 있다. 젊은층 사이에서 파란색 캔에 담긴 제3맥주 킨무기의 인기가 어마어마한데, 이번에 세금이 올라 가격 상승으로 이어지면 판매가 줄어들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특히 젊은층일수록 10엔, 20엔의 가격 차이를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이를 감안해 산토리는 주세 개정에 반년이나 앞선 지난 4월부터 전략적인 가격 책정에 나섰다. 스탠더드 계열로 분류되는 ‘산토리 생맥주’를 선보이면서 경쟁제품보다 가격을 10엔 정도 낮춰서 출시했다.
최근 인플레이션으로 물가에 예민한 소비자에게 산토리의 전략은 먹혀들었다. 신상품인데 가격마저 경쟁제품인 슈퍼드라이 등보다 최소 10엔가량 싸다 보니 판매가 꾸준히 늘어난 것이다. 산토리 내부에서 올해 연간 판매 목표를 300만 케이스로 잡았지만, 판매 1개월 반 만에 150만 케이스를 달성했다는 설명이다.
산토리의 가격 정책에 대해 아사히나 기린 등이 가진 불만은 크다. 일각에서는 “위스키에서 벌어들인 수익으로 맥주 산업의 채산성을 맞추려고 한다”는 얘기까지 나올 정도다.
하지만 산토리의 방향성은 명확하다. 산토리는 지난해 10월 맥주 업계가 주력 제품의 가격을 350㎖ 캔 기준으로 10엔 정도 올렸을 때에도 기능성 맥주인 ‘퍼펙트 산토리 맥주(PSB)’의 가격은 동결했다. 더 프리미엄 몰츠는 경쟁사와 동일하게 가격을 올렸지만, 탄수화물 ‘제로(0)’라는 콘셉트로 인기를 끌고 있는 PSB는 가격을 동결해 시장점유율을 오히려 높인 것이다.
산토리는 현재 프리미엄 계열과 제3맥주에서는 확실히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스탠더드 계열에서는 아사히와 기린의 벽을 넘지 못한다. 결국 산토리의 전략은 주세 개정으로 제3맥주의 판매가 부진하게 되더라도, 이번에 선보인 산토리 생맥주를 스탠더드 계열에서 확고하게 자리잡아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가져가겠다는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