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건축자재 유통회사인 패스트널(Fastenal). 포천 500대 기업에 들어가고 뉴욕 증시에 상장된 대기업이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이 회사의 비주거용 건축자재 수요가 2개 분기 연속 감소했다. 5개월 연속 주문이 감소하고 있는데, 특히 3월에 실적이 눈에 띄게 둔화됐다. 제조업체들이 지출을 줄이고, 생산을 감축한 영향을 받은 것이다. 주문이 증가한 곳은 석유, 천연가스 관련 투자가 이뤄지고 있는 텍사스주, 루이지애나주였고, 대부분 지역에서는 3월 들어 둔화세가 뚜렷해졌다.
조명 분야 대기업인 애큐이티 브랜드(Acuity Brands)도 상황은 비슷하다. 이 회사의 닐 애시 CEO는 “주문이 둔화되고 있고, 매출은 예상보다 저조한 가운데 은행들이 돈줄을 조이고 있다”라고 말했다. 그는 “확실히 경제적 혼란 상태다. 은행 기업대출 창구는 잠시 시간을 달라(대출을 잠정 중단하겠다)고 한다”라고 말했다.
코팅용, 밀폐용 원료 등을 공급하는 RPM인터내셔널도 긴축 여파를 피부로 체감하고 있다. 이 회사의 프랭크 설리번 CEO는 “주거용, 상업용 건축 시장은 연말까지 계속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메가밀리언달러 기업인 애플과 아마존이 새 사옥을 짓던 시대는 끝났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아마존은 워싱턴DC 인근 버지니아주에 추진하고 있는 제2본사 사옥 건설 계획을 대폭 축소한 상태다. 미국의 경기 침체의 터널로 점차 들어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신호들이다. 이를 촉발시킨 것은 지난 3월 터진 은행권 위기다. 3월 말부터 다소 안정을 찾았지만 이는 꺼진 불이 아니다.
미국 최대 증권사 찰스슈워브는 주요 대주주가 보유 지분을 전량 매각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위기감이 커졌다. 15대 주주 중에 하나인 GQG파트너스는 은행권 위기가 발생한 후에 보유하고 있던 찰스슈워브 지분 전량을 매각했다. 이 회사는 지난해 말 기준 찰스슈워브 지분 1740만주(지분율 1%)를 보유하고 있었다. 지분 가치는 약 14억달러에 달했다. 마크 바커 GQG 글로벌 총괄은 “아직 리스크가 현실화한 것은 아니지만 찰스슈워브는 은행을 둘러싼 분위기에 영향을 받고 있다”라고 말했다.
찰스슈워브는 SVB(실리콘밸리은행)와 같은 이유로 재무적 위험에 빠졌다.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급격한 금리 인상 탓이다. 찰스슈워브는 지난해 말 기준 주택저당증권(MBS), 국채, 회사채 등 3300억달러를 보유하고 있었다. 금리 인상에 따라 채권 평가액이 약 230억달러 감소한 것으로 추산됐다. 지난 3월 고객들이 증권 계좌 자금을 머니마켓펀드(MMF), 대형 은행 계좌로 옮기면서 주가가 폭락했다.
사실 찰스슈워브의 예치금 이탈은 이번에 시작된 것이 아니다. 연준이 금리를 급격하게 올림에 따라 지난해 2분기부터 이런 흐름이 나타났다. 대표적인 예금 상품인 CD 금리가 4% 안팎까지 오르면서 굳이 현금을 증권 계좌에 넣어둘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기자가 살고 있는 뉴욕 일대에서 은행 예금 상품을 검색하면 4~5%대 금리를 주는 곳이 흔하다. 특히 예금이 크게 빠져나가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은행일수록 더 그렇다. 웨스턴얼라이언스은행은 1달러만 맡겨도 4.85% 금리를 지급한다고 광고를 하고 있다.
미국 경제는 이제 경기 침체 혹은 연착륙이라는 중대한 분기점을 맞이하고 있다. 3월 은행권 위기가 발생하기 전까지만 해도 연착륙 가능성을 확신하는 월가 분석가들이 많았다. 하지만 이제는 경기 침체는 피할 수 없다는 데 공감대가 넓어지고 있다. 다만 침체의 수위에 대해서는 전망이 엇갈린다.
연준의 3월 FOMC(연방공개시장위원회) 의사록에 따르면 연준은 올 하반기에 완만한 침체가 시작되고 이후 2년간 회복이 이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주요 금융권 CEO들도 이런 견해를 펴고 있다. 미국 최대 은행인 JP모건체이스를 이끌고 있는 제이미 다이먼 회장은 “불가피하게 경기 침체가 올 것 같다. 다만 시기는 약간 미뤄진 듯하다”라고 말했다. 제인 프레이저 씨티그룹 CEO는 “미국은 얕은 경기 침체에 들어갈 것으로 예상된다”라고 말했다. 래리 핑크 블랙록 CEO는 좀 더 낙관론을 펴고 있다. 그는 “올해 침체를 볼 수 있을지는 확신할 수 없고 아마도 2024년 초에 나타날 수 있다”라고 전망했다. 하지만 경제는 멈춰있는 화석이 아니다. 월가에서 가장 우려하는 것은 위기의 ‘심리적 전염’이다. 재무부, 연준, FDIC(연방예금보험공사) 등이 나서서 3월 은행권 위기를 수습했지만 잔불은 남아 있기 때문이다.
연준 핵심 관계자는 5월 FOMC에서도 추가 금리 인상에 나설 것임을 강력히 시사하고 있다. 그간 제롬 파월 연준 의장의 ‘선행지표’ 역할을 해왔던 크리스토퍼 월러 연준 이사가 대표적이다. 연준 핵심 인사인 그는 파월 의장의 생각을 시장에 선제적으로 전달하는 역할을 해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월러 이사는 “금융 여건이 심각하게 위축된 것이 아니고, 노동 시장은 계속 강력하기 때문에 통화정책은 더 긴축적으로 갈 필요가 있다”라고 말했다.
그는 “은행권 위기는 완화되고 있지만 이번 혼란으로 얼마나 많은 신용 경색이 발생할지는 알 수 없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3월 CPI를 보면 아직 인플레이션 목표 달성은 멀었다고 생각한다”라며 “CPI가 5%로 하락했지만 근원CPI에서는 별 진전이 없었다”라고 평가했다.
연준 내에서 ‘스톱앤드고(Stop & Go)’를 외치는 목소리도 있다. 급격한 금리 인상에 따른 후폭풍이 은행권에 시차를 두고 다가온 것처럼 이제는 숨을 가다듬고 금리 인상의 여파를 살핀 뒤 필요시 전진하자는 주장이다.
오스탄 굴스비 시카고연은 총재는 “최근 은행권 스트레스를 감안할 때 너무 공격적으로 금리를 올리지 말아야 한다”라고 반박하고 있지만 연준 내 다수설로 보기 어렵다. 금융권 위기가 연준의 최종금리 인상 수위를 한 계단 낮췄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은행들이 대출 조건을 높이면서 자연스럽게 총수요를 둔화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긴축의 주체가 연준에서 은행으로 바뀌었다는 말까지 나온다. 각종 경제활동에 실핏줄 역할을 하는 금융이 위축될 경우 심장 박동수가 떨어지는 것과 같은 효과를 낸다. 인플레이션 목표를 2%로 설정하고 있는 연준 입장에서 은행이 총수요 둔화에 역할을 해주는 것은 환영할 일이다. 하지만 연준이 후행 지표를 보고 뒷북 금리 인상을 지속할 경우 침체의 골이 더 커질 수 있다는 우려도 상존한다.
제이미 다이먼 JP모건체이스 회장은 “올해 은행들이 자금 공급 시 비용이 많이 들겠지만, 고금리에 따른 신용 경색 가능성은 부풀려져 있다”라고 말했다. 잘 관리하기에 따라서는 골디락스 상황으로 갈 수 있다는 낙관론도 여전하다. 늘 그랬지만 이번 분기점에서 파월 의장의 선택이 더 중요해졌다. 미국 경제는 물론 세계 경제의 방향이 달라질 수 있는 결정의 순간들이 다가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