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에서 4인 가족으로 살고 있는 주부 A씨는 최근 전기료 고지서를 받고 한숨을 지었다. 작년 같은 달 전기료를 찾아보니 1만600엔 수준이었는데, 올해는 1만3300엔가량으로 부쩍 올랐기 때문이다. A씨는 “애들이 학교에서 사먹는 도시락도 10%가량 오른 것을 비롯해 식품, 전기료 등 안 오르는 게 없는 것 같고 생활비 부담이 늘었다”고 말했다.
프리랜서로 일을 하며 도쿄에 혼자 거주하고 있는 C씨는 보통 식사를 편의점에서 구입해 해결하는 경우가 많다. C씨는 “물가 상승으로 하루 식비가 200엔 정도 올라, 한 달 6000엔 정도 더 부담하게 됐는데 직업상 간단한 금액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국제 원자잿값의 상승에 올 초부터 지속된 엔저가 맞물리며 ‘저성장·디플레이션’의 대명사 일본에서도 물가가 올라 서민의 짐을 더한다. 지난 9월 일본의 소비자 물가 상승률은 3%로 미국 등에 비해 정도가 덜하지만 충분한 임금 상승이 뒷받침되지 못하며 물가를 감안한 실질임금이 6개월 연속 하락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올 들어 여섯 차례 기준금리를 올렸고 추가 인상도 예상되지만 일본은행은 경기활성화를 위해 대규모 금융 완화를 고수하며 미일 금리 차가 벌어진 것이 엔화 약세의 가장 큰 이유이다. 올 초 달러당 115엔 수준이던 엔화 가치는 지난 10월 32년 만에 최저치인 151엔대까지 내려가기도 했다. 11월 중순에는 달러당 140엔 안팎까지 오르기는 했지만, 연초에 비하면 엔저는 여전하다.
데이코쿠데이터에 따르면 상장 105개 식품회사의 10월 가격 인상 품목은 올 들어 최대인 6500개 이상에 달한다. 올해 가격이 올랐거나 오르는 품목은 2만 개를 넘을 것으로 분석된다. 규동(소고기 덮밥)으로 유명한 요시노야는 지난 10월 1년여 만에 가격 인상에 나서 매장 내에서 제공하는 덮밥값을 20엔 안팎 올렸다. 대표적인 회전초밥 업체 스시로는 1984년 창업 이래 유지하던 ‘접시당 최저가 100엔’ 전략을 지난 10월 포기했다. 아사히맥주는 맥주, 위스키 등의 가격을 6~17%가량 올렸고 이토햄은 햄·소시지의 값을 3~30% 높였다.
가격 인상은 식품뿐 아니라 20~30% 오른 전기료·가스비를 비롯해 전방위적이다. 반다이는 울트라맨인형 등 일부 완구의 가격을 5~35%, 오다큐전철은 로망스카의 특급 요금을 높였다. 물가가 오르니 생활비 부담도 늘어난다. 미즈호 리서치&테크놀로지는 엔화 가치가 달러당 145엔 수준일 경우 금년도 2인 이상 가구의 생활비·지출액은 작년에 비해 8만1674엔 늘어날 것으로 예측했다. 식료품 지출이 3만9030엔, 에너지 비용은 3만3893엔 증가할 것으로 보여 큰 비중을 차지한다.
산케이신문이 10월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물가 상승의 영향에 대한 질문에 ‘매우 힘들어졌다’가 10%, ‘다소 힘들어졌다’가 56.2%였다. 이달 초 요미우리 신문의 여론조사에 정부의 물가 대응을 묻는 질문에 ‘평가하지 않는다(잘못하고 있다)’는 응답이 73%에 달했다. 일본의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지난 1월 0.6%였으나 4월부터 2%대로 올라섰고 지난 9월에는 3%를 기록했다. 9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소비세 인상 효과가 있었던 2014년을 제외하면 31년여 만에 최고치이다.
디플레이션의 국가 일본에 불어닥친 인플레이션은 경제 성장의 발목도 잡고 있다. 일본 내각부가 발표한 올해 3분기(7∼9월) 일본의 실질 국내총생산(GDP)은 전기 대비 0.3% 감소했다. 이런 추세가 1년간 계속된다고 가정해 환산한 연 성장률은 -1.2%다. 3분기 일본의 경제성적표는 시장 전망치를 밑돈다. 닛케이 퀵이 일본의 주요 연구소들의 전망치를 종합한 결과(중앙값) 3분기 실질 GDP는 전분기 대비 0.2%(연률 1%)가량 성장할 것으로 예상된 바 있다.
3분기에 일본 경제가 예상보다 저조했던 것은 개인소비와 설비투자 등 내수의 회복이 더딘 데다 수입이 늘어난 영향이 크다. 지난 2분기 1.2%였던 실질 개인소비 증가율은 3분기에 0.3%에 그쳤다. 방역규제가 상당 부분 완화됐지만, 코로나19 유행이 여전해 소비의 발목을 잡은 것으로 보인다. 이와 함께 물가가 오르면서 일본 국민의 소비심리도 위축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일본 물가 상승의 주된 이유는 국제 원자재·에너지 가격 상승과 엔저이다. 미국 등 주요 국가들이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금리 인상을 비롯한 금융 긴축에 나서고 있는 데 비해 일본은행은 단기금리를 -0.1%로 유지하고, 장기금리 지표인 10년물 국채 금리를 0% 정도로 유도하는 대규모 금융 완화를 고수하고 있다. 이로 인해 미일 금리 차가 확대돼 왔고 이것이 엔저의 원인으로 작용했다.
일본은행이 금융 완화를 유지하는 주된 이유는 경기활성화이다. 하지만 이 외에 과도한 국가부채나 일본은행이 보유한 국채 등의 영향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일본 재무성 추산으로 금리가 1% 오르면 2025년도 원리금 부담이 3조7000억엔가량 늘어난다. 일본의 국채 잔액은 작년 말 기준 1000조엔을 넘었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부채 비율은 2021년 기준으로 미국 132.6%인 데 비해 일본은 263.1%에 달한다. 금리를 올리면 일본은행이 보유한 막대한 국채의 평가액 하락이 발생할 수도 있다.
엔저가 가져오는 수익 증대 효과가 예전만 못하고 비즈니스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기업의 시각도 커졌다. 도쿄상공리서치가 지난 10월 5019개사를 설문조사한 결과 달러당 143엔의 엔저가 경영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질문에 54.1%가 ‘마이너스’라고 답했고 ‘영향 없다’ 23.4%, ‘플러스’ 2.5%였다. 이에 따라 금융 완화 정책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나온다. 노구치 유키오 히토쓰바시대 명예교수는 “물가가 오르는 데 비해 임금은 오르지 않아 가계가 힘들어지고 있고 기업도 원가 상승을 판매가에 충분히 전가하지 못해 (기업에) 바람직하다고 얘기할 수 없다”며 “(엔저와 물가상승을 막기 위해서는) 금융 완화를 그만둬야 한다”고 설명했다.
[김규식 특파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47호 (2022년 12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