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국민이 경제에 대한 자신감을 잃어가고 있다. 여론조사에서는 일본 경제가 ‘강하지 않다’는 실망감 섞인 답변이 늘어가고 있고 일본의 1인당 국민총생산(GDP)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 밑으로 떨어진 데 이어 한국에 역전될 수도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이런 저성장이 계속되면 장기적으로는 일본이 선진국 대열에서 탈락할 수도 있다는 경고까지 등장하고 있다.
니혼게이자이(닛케이)는 작년 11~12월 18세 이상 전국 남녀를 상대로 일본의 국력에 대해 우편 여론조사를 실시해 최근 그 결과를 공개했다. 이 설문조사에서 가장 눈길을 끈 것은 일본의 경제·기술의 국력에 대한 질문. ‘일본의 경제 국력을 어떻게 평가하느냐’는 질문에 대해 ‘강하다’는 답변이 20%로 전년 조사에 비해 8%포인트 내려갔다. 2018년 ‘강하다’라고 응답한 비율이 37%였던 것을 감안하면 3년 새 17%포인트나 내려간 것이다. 반면 이번 조사에서 일본 경제 국력이 약하다는 응답은 43%로 전년 조사에 비해 11%나 높아졌다. 경기 침체와 장기적인 저성장 등이 경제에 대한 일본 국민의 자신감을 낮추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일본의 작년 실질경제성장률은 1.7%에 그쳐 유럽이나 미국 등의 회복세를 따라가지 못했다. 이와 함께 전자를 비롯한 일부 산업에서 일본 기업들이 한국·중국 등에 밀리며 경쟁력을 잃어가는 것 등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일본 경제 국력이 강하다’라고 답변한 비율이 가장 많이 줄어든 세대로는 50대가 꼽힌다고 닛케이는 지적했다. 버블경제 전후로 취업했다가 정년을 앞두고 재취업에 나섰을 때 코로나19 상황이 닥친 세대가 50대 라는 지적이다. ‘고용환경이 악화됐다’고 답한 50대 비율은 40%로 전 세대의 비율보다 5%포인트 높았다. 일본 경제의 동력 중 하나로 꼽히는 기술력도 예전만 못하다고 보는 국민들이 늘고 있다. 이번 조사에서 일본의 기술 국력을 어떻게 평가하느냐는 물음에 강하다고 답변한 비율은 3년 새 17%포인트 하락한 58%였다.
일본 국민의 경제 자신감이 약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일본 경제석학은 장기 침체를 겪고 있는 일본이 선진국 지위를 잃을 수도 있다는 전망을 내놓았다. 선진국에 대한 통일된 기준은 없지만 국제통화기금(IMF)은 1인당 GDP와 수출 품목의 다양성, 글로벌 금융 시스템과의 통합 정도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미국, 일본, 독일, 한국 등 39개국을 선진국으로 분류하고 있다.
일본은 고성장을 바탕으로 1975년 창설된 주요 7개국(G7)의 창립 멤버가 된 이래 국제적으로 선진국의 지위를 인정받아왔다는 평가가 있다. 그러나 1990년대 버블 붕괴와 함께 찾아온 장기 경기 침체가 일본의 발목을 잡으면서 경제·산업 등에서도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일본의 선진국 탈락 가능성을 경고한 인물은 경제학자인 노구치 유키오 히토쓰바시대학교 명예교수다. 노구치 교수는 일본의 1인당 GDP가 OECD 회원국 평균 밑으로 떨어진 점을 지적하며 “일본이 선진국 탈락을 앞두고 있다”고 분석했다.
일본은 1964년 OECD 회원국이 됐고 이후 일본의 1인당 GDP는 OECD 평균을 웃돌아왔다. 하지만 1990년대부터 버블 붕괴로 저성장이 계속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2020년 OECD 회원국 평균 1인당 GDP를 1로 잡았을 때 일본의 1인당 GDP는 0.939 수준이었다. 일본의 1인당 GDP가 OECD 평균에 못 미친 사례는 2015년에도 있었다. 회원국의 평균 1인당 GDP를 1로 가정할 때 일본의 1인당 GDP는 0.981이었다. 하지만 이때만 해도 엔화 약세의 영향이 컸기 때문에 일시적인 현상으로 받아들이기도 했다. 일본의 1인당 GDP가 2016~2019년에 다시 OECD 평균을 웃돌았던 것도 이런 시각의 이유가 됐다.
노구치 교수는 “2030년께가 되면 일본의 1인당 GDP는 OECD 평균의 절반 정도 수준이 될 것”이라며 “이렇게 되면 일본은 어떤 정의에 의해서도 선진국이라고 말할 수 없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노구치 교수가 일본의 하락과 대비해 주목한 것이 한국의 상승세이다. 1973년 일본의 1인당 GDP가 OECD 평균의 101.3%였던 데 비해 한국은 10.4%에 그쳤다. 하지만 지금은 한국의 1인당 GDP가 OECD 평균에 거의 근접했다는 게 그의 분석이다. 노구치 교수는 “지금과 같은 상황이 계속되면 일본과 한국·대만의 위치가 역전될 가능성이 있다”며 “성장률을 높이지 않으면 일본은 2030년경이면 선진국에서 탈락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노구치 교수는 일본의 취업자 1인당 GDP가 2019년 한국에 역전당했다는 점에도 주목했다. OECD에 따르면 2019년 일본의 취업자 1인당 GDP는 7만8293달러였지만 한국은 7만9500달러였고 G7 회원국 평균은 10만3338달러였다. 2013년 일본의 취업자 1인당 GDP는 7만8541달러였는데, 2019년에는 6년 전 수치에도 못 미친 것이다. 일본에서 디플레이션이 계속되면서 임금이 크게 오르지 않는 현상이 계속됐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작년 10월 취임한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주요 경제 대책의 하나로 ‘임금 인상’을 내걸고 기업들에 임금을 올리도록 유도하고 있다.
일본의 싱크탱크에서도 일본 경제 위상의 쇠퇴에 대한 예측이 나온다. 한국의 1인당 명목 GDP가 저성장에 시달리는 일본을 2027년 추월할 것이라는 전망이 그것이다. 일본경제연구센터(JCER)는 최근 2021~2027년 아시아 주요 국가·지역 15개와 미국·캐나다·호주 등을 묶어 ‘아시아 경제 중기예측’을 내놓았다. JCER는 이를 통해 1인당 명목GDP가 2025년까지 한국은 연 6%, 대만은 연 8.4% 증가하는 데 비해 일본은 연 2% 성장에 그칠 것으로 예상했다.
일본의 1인당 명목 GDP는 2027년 한국에, 2028년에는 대만에 역전당할 것으로 예측됐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2020년 기준 일본의 1인당 명목 GDP는 3만9890달러로 한국(3만1954달러)보다 25%, 대만(2만8054달러)보다 42%가량 많다. 1986년에는 일본 1인당 명목 GDP가 한국의 6.2배, 대만의 4.4배였다. 일본의 1인당 명목 GDP는 2007년 싱가포르에, 2014년 홍콩에 역전당했다. OECD 통계에 따르면 환율·물가 등을 감안한 구매력 평가 기준 1인당 GDP에서는 2017년 한국이 일본을 넘어섰다.
일본이 한국과 대만에 역전을 당하는 이유로는 디지털화가 부진해 노동생산성 증가가 지체되는 점이 꼽혔다. 2020~2030년대 한국과 대만의 노동생산성 증가는 1인당 명목 GDP 증가율을 4%포인트 이상 높이지만 일본의 경우 2%포인트 이하로 향상시키는 데 그친다고 닛케이는 전했다. 닛케이는 디지털트랜스포메이션(DX)의 성패가 노동생산성 향상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JCER 측 견해를 인용하며 한국·일본·대만 상황을 비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