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패권전쟁 한국은 ‘넛크래커’ 신세] 美 ‘칩스 포 아메리카’ vs 中 ‘반도체 굴기’ 사이 줄타기, 흔들리는 메모리 超격차 유지하고 국가전략 세워야
김병수 기자
입력 : 2021.04.28 09:44:50
수정 : 2021.04.28 09:46:09
“반도체 산업은 우리 경제의 현재와 미래가 걸린 핵심 국가전략산업이다.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을 우리가 계속 주도해 나가야 한다.”
지난 4월 15일, 문재인 대통령이 확대경제장회의에서 내놓은 일성이다. 이날 경제장관회의에는 이례적으로 기업인들이 직접 참석했다. 청와대는 “반도체 등 주요 전략산업 현황을 점검하고 대응 전략을 논의하기 위한 자리”라고 설명했다. 이에 앞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직접 나서 반도체 패권 탈환을 선언하는 등 반도체를 둘러싼 주요국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단초는 자동차용 반도체 부족이었다. 최근 자동차 업체들은 반도체 부족으로 생산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노무라 증권은 최근 2분기 글로벌 자동차 생산이 160만 대 줄어들 것으로 전망했다. 뿐만 아니라 스마트폰과 통신 장비, TV 컴퓨터도 반도체 공급부족 현상이 발생하면서 일부 생산 차질을 빚고 있다. 애플 협력사인 대만 폭스콘은 1분기 실적 발표에서 “반도체 부족으로 아이폰 생산량이 10% 줄었다”고 밝혔다. 폭스콘은 반도체 부족이 내년 말까지 지속될 수도 있다고 내다봤다.
▶반도체 대란 왜 벌어졌나?
현재 차량 회사들은 반도체를 공급받기까지 약 1년가량의 시간이 걸리는 상황이다. 과거에는 주문을 넣으면 3개월 정도 후에 제품을 받을 수 있었는데, 지금은 주문하면 내년 상반기가 되어야 제품이 나오는 형편이라는 것이다. 이는 반도체 회사들이 제품을 생산하는 팹(Fab)의 수용량이 이미 가득 찬 상태이기 때문이다. 반도체 업계에서 내년 상반기까지는 현재와 같은 반도체 공급부족 사태가 이어질 것이라는 관측들이 나오는 이유다.
반도체 대란의 원인은 여러 가지가 제시되고 있다. 코로나19 이후 일반 소비자들의 모바일 IT 기기 수요가 급격히 늘었고, 디지털 전환 때문에 기업들의 수요가 더더욱 늘었다는 점이 가장 기본적인 원인으로 꼽힌다. 특히 반도체 생산 기업들이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생산시설을 확충하기 위한 투자가 지연됐다는 점도 이유 중 하나다. 자연재해 영향도 있었다. 2월에 미국 텍사스를 덮친 한파의 영향으로 이 지역에 있던 NXP 인피니온 삼성전자 등의 반도체 공장들이 가동을 중단했고, 3월에는 일본의 반도체 회사인 르네사스에 화재가 발생했다.
전문가들은 첨단 장비와 고급 인력으로 인한 병목 현상도 지목한다. 일반적인 IT 제품은 공장 착공에서 빠르면 6개월 안에 가동이 가능하지만, 반도체는 장비설치와 수율안정까지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특히 첨단 반도체 장비의 경우 몇몇 업체들이 독점하는 구조다. 네덜란드 반도체 장비업체 ASML이 대표적이다. SK하이닉스 관계자는 “첨단 제조장비나 소재의 경우, 기존 주문도 밀려 있는 상황이다. 새로운 생산설비를 위한 설비나 부품을 공급할 여력은 없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여기에 미중 갈등 때문에 향후 반도체 물량을 확보하기 어려울 수 있다고 생각한 기업들이 사재기를 하고 있다는 관측도 있다. TSMC의 마크 리우 회장은 지난 3월 30일 대만반도체산업협회 행사에서 “반도체 부족의 가장 큰 원인은 미중 갈등에 따른 불확실성으로 공급부족을 우려한 기업들의 사재기”라고 말했다. 한마디로 미국이 전 세계 반도체 시장의 주도권을 잡기 위한 움직임이 본격화되고 있어, 이 때문에 기업들이 반도체 물량을 미리 확보하려 한다는 것이다. 중국 스마트폰 제조회사 중 상위에 랭크돼 있는 화웨이, 오포 등과 같은 기업들이 반도체 물량 확보를 하고 있는 주된 기업들로 꼽힌다. 실제로 지난해 5월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글로벌 반도체 제조회사들에게 중국 기업 화웨이에게 반도체 판매를 금지하는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새로 들어선 바이든 행정부에서도 반도체에 대한 자국 이해관계 중심주의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이를 아는 중국 스마트폰 제조회사들은 반도체 물량 확보에 더욱 열을 올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업계에선 반도체 부족 현상이 고착화할 수도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자동차용 반도체만 해도 전기차 보급 증가와 함께 수요가 급증하고 있다. 시장조사기관인 IHS에 따르면 2030년 전체 차량에서 전자 장치의 비율이 45%에 이를 것으로 분석했다.
삼성전자의 한 관계자는 “자율주행차와 빅데이터, AI 등으로 인해 반도체 수요가 지속적으로 늘어나고 있어 반도체 공급난이 계속될 공산이 크다”면서 “반면 빠른 생산량 증대나 국가 간 공조 등은 기대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라 설명했다.
▶미국·유럽 등 앞다퉈 ‘반도체 독립’
사정이 이렇다 보니 미국 유럽 등 세계 각국은 앞다퉈 ‘반도체 독립’을 외치고 있다. 최근 미국·중국·유럽연합(EU)이 파격적 인센티브를 제공하며 글로벌 기업을 잇달아 유치하고 있다. 미국 정부는 지난해 반도체 설비 투자비용의 40%까지 환불 가능한 투자세액공제 프로그램을 도입했다. 반도체 생산라인 건설 시 최대 30억달러의 연방 보조금도 지급한다. 예컨대 미국 정부는 대만 TSMC 공장 유치를 위해 상하수도 등 인프라 구축과 2억500만달러(약 2290억원)의 보조금을 인센티브로 제공했다.
미국은 중앙 정부뿐 아니라 주정부도 적극적으로 기업 유치 경쟁을 벌인다. 삼성전자가 미국에 20조원 규모 반도체 생산라인 설립 계획을 발표하자, 텍사스와 애리조나, 뉴욕주가 세금 감면, 수도 이용료 감면 등 1조원 규모의 인센티브를 제시하며 유치 경쟁을 벌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반도체 자립’을 선언한 유럽에선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27개 유럽 기업과 손잡고 시스템반도체 분야에 36억유로(약 4조8000억원)를 투자하겠다”고 밝혔다.
중국은 반도체 자급률 70%를 목표로 1조위안(약 170조원) 투자 계획을 집행하고 있다. 또한 성(省)별로 임대료 감면과 세금 환급 등 기업 유치 인센티브를 경쟁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반도체 생산과 공급, 글로벌 안보 이슈로
특히 미국은 반도체 문제를 국가 안보와 직결된 이슈로 연결하고 있다. 실제 조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 4월 12일 삼성전자 등 글로벌 반도체 업체 대표들과 화상회의에서 반도체에 대한 공격적인 투자를 강조하며 중국 견제 방침을 분명히 했다.
미국은 당장의 반도체 품귀 사태를 극복하고 향후 재발을 막기 위해 자체적인 생산 능력을 끌어올리겠다는 계획이다. 상대적으로 높은 반도체 수입 의존도를 낮추고 궁극적으로는 반도체 자립화를 목표로 하고 있다. 이를 위해서는 미국 주도의 글로벌 공급망 구축이 시급한데, 여기에 한국 등 동맹과 우방국이 힘을 보태야 한다며 설득과 압박에 나섰다. 반면 중국은 미국의 제재 때문에 글로벌 반도체 수급난이 발생했다고 반발한다.
이처럼 반도체를 고리로 한 미중 대결구도가 강해질수록 삼성전자 등 한국 기업들의 입장은 곤란해지는 모양새다. 삼성전자만 해도 미국과 중국을 모두 주요 생산기지이자 주요 수요처로 삼고 있다.
반면 세계 1위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업체인 대만 TSMC가 중국 고객사와의 거래를 끊었 다. 바이든 대통령이 전 세계 19개 반도체 관련 기업 최고경영자와 화상회의를 하고 ‘반도체 헤게모니 탈환’을 선언한 지 이틀 만이다. 미국 기업인 인텔은 차량용 반도체 시장 진출을 선언했다.
▶정부, 뒤늦게 지원 나선다지만…
반도체 업계는 말 그대로 국가 간 패권 경쟁이 전쟁 양상인 셈이다.
설상가상으로 최근 한국의 메모리반도체 초격차도 흔들리고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D램과 낸드플래시 등 메모리반도체 분야에서 압도적인 점유율을 유지하고 있지만, 그동안 한 수 아래로 여겨졌던 경쟁사들이 세계 최초 타이틀을 잇달아 차지하는 등 최근 기류가 심상치 않다. 미국과 중국의 기술전쟁으로 국제정치적 리스크에 직면한 상황에서 국내 기업들은 메모리반도체의 경쟁력을 유지하며 비메모리반도체 분야도 강화해야 하는 처지다.
지난해 한국 수출의 20%를 차지한 반도체 산업의 무게 중심이 미국이나 중국으로 급격히 쏠린다면 한국 경제의 앞날도 어두워진다. 이종환 상명대 교수는 “미국, 유럽 등 주요국들이 이미 대대적으로 반도체 산업 육성에 나선 상황에서 우리 정부 대응은 한발 늦은 감이 있다”며 “지금부터라도 지원책 실행 속도를 높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4월 15일 청와대에서 열린 확대경제장관회의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이 자리엔 이례적으로 기업인들이 직접 참석했다.
하지만 삼성·현대차·SK·LG와 같은 대기업들이 투자 계획을 주도하고 있을 뿐 정부 차원에서 내놓은 관련 산업 육성 방안은 미미한 수준이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개별 기업의 투자에 의존하는 실정이다. 우리 정부는 올해 초 2030년까지 차세대 지능형 반도체 연구·개발에 예산 1조원을 투입한다고 했다. 하지만 이는 지난해 삼성전자 연구·개발 투자비(21조2000억원)의 20분의 1 수준이다. 재계에선 “정부가 국내 투자를 유도하기 위해 규제 완화 등 획기적인 대책을 내놓지 않으면, 한국 기업들이 글로벌 공급망 재편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양질의 제조업 일자리가 해외로 빠져나갈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마저 나온다.
이에 정부는 올 상반기 중으로 구체적인 지원 방안을 담은 ‘K반도체 전략’을 내놓을 예정이다. 하지만 이미 국가 차원의 다양한 반도체 지원책을 쏟아내고 있는 선진국들에 비하면 우리 정부 대응이 상당히 뒤처져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앞서 반도체 업계는 정부와의 간담회에서 개발 및 제조설비 투자비용에 대해 50%까지 세액공제를 요청한 바 있다. 현재 국내 조세특례법상 대기업의 신성장원천기술 관련 세액공제는 20% 수준이다. 설비투자 관련 세액공제는 3%에 불과하다. 재계 관계자는 “정부가 늦게나마 필수 산업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대책 마련에 착수해 다행이지만 속도가 관건인 만큼 정부가 빨리 진행해 줬으면 좋겠다”면서 “법 제정보다 빠른 시행령 등 정부가 속도를 낼 수 있는 분야부터 서둘러야 한다”고 토로했다.
무엇보다 반도체 업계의 절실한 요구 중 하나는 반도체 전문인력 양성이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대기업은 중소 팹리스, 파운드리 업체들은 인력 부족에 시달리고 있다. 김정호 카이스트 교수는 “세제 혜택과 투자 등 직접적인 지원책 외에도 인력 양성에 정부가 직접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미국과 중국이 주도권을 먼저 잡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예고하고 있는 만큼 정부가 앞장서서 물밑 협의에도 선제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미중 간 전략 경쟁으로 인해 결국 한국 기업이 피해를 볼 경우를 가정한 대비책 마련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박재근 한양대 교수는 “기업 단독으로는 협상에 한계가 있고 이를 풀어나갈 한국 정부의 외교통상 역량이 관건”이라고 말했다.
반도체 업계의 한 관계자는 “정부가 미중 사이에서 모호한 입장을 취하는 탓에 삼성 등 민간기업들의 어려움이 커질 수 있다”면서 “반도체가 글로벌 패권전쟁의 최전선에 서있는 업종인 만큼, 파격적인 지원책은 물론 국가 차원의 전략 마련을 반드시 마련해야 한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