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재편 가속화] Part Ⅲ 해외진출 | 규제 피해 ‘코렉시트’ 글로벌기지 구축, 해외 스타트업 통한 신사업 진출 경쟁도
박지훈 기자
입력 : 2021.03.05 17:13:33
수정 : 2021.03.09 10:14:41
국내 시장 포화로 글로벌 시장을 노크하는 국내 대기업들의 행보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러나 팬데믹 사태 이후 산업의 재편과 국내 규제 강화로 해외 시장으로 눈을 돌리는 경향이 더욱 커졌다.
최근 전국경제인연합회(이하 전경련)가 벤처기업협회, 한국중견기업연합회와 공동으로 실시한 ‘최근 기업규제 강화에 따른 기업인 인식조사’에 참여한 230개사의 응답 중 27.2%는 국내 투자 축소를, 21.8%는 국내 사업장 해외 이전을 선택지로 택했다. 특히 중견기업과 벤처기업들은 사업장을 해외로 이전하는 코렉시트(Korea+Exit)까지 염두에 두는 것으로 나타났다.
기업장악3법(상법·공정거래법·금융그룹감독법)을 필두로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산업안전보건법, 개인정보보호법 등 유례없는 기업규제법이 줄줄이 시행되면서 고용 및 투자 축소를 고려하는 기업이 늘어난 것으로 보인다. 대기업의 경우 사업장 해외 이전 응답률이 9.3%에 그쳤지만 중견기업과 벤처기업은 각각 24.5%와 24%로 보다 몸집이 가벼운 기업들이 해외 이전과 시장 진출에 적극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조사 응답기업의 69.5%는 정부와 국회의 기업규제 강화에 ‘매우 불만’(44.3%), ‘불만’(25.2%)이라고 답했다. 기업 규모별로 봤을 때, 대기업의 불만족 비율이 96.5%(매우 불만 67.9%, 불만 28.6%)로 가장 높았던 반면, 중견기업은 82.2%, 벤처기업은 63.2%로 다소 낮았다. 하지만 ‘매우 만족’(3.0%) 또는 ‘약간 만족’(6.5%)이라고 답한 기업은 전체의 9.5%인 22개사(중견 1곳, 벤처 21곳)에 불과했다.
국내 대기업들은 해외투자 확대를 무기로 규제완화나 세금감면 혜택 등을 얻어내고 있다. 미국 텍사스지역 언론과 로이터통신 등 외신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최근 텍사스주 정부 재무국에 투자의향서를 제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전자는 1998년부터 텍사스주 오스틴시에서 파운드리 공장을 가동 중이다. 지난해 10월 삼성전자가 오스틴공장 인근의 대지를 매입하면서 추가 공장을 건설할 것이란 관측이 나왔다.
삼성전자가 투자의향서에 첨부한 컨설팅회사인 ‘임팩트 데이터소스’가 분석한 경제적 파급효과 보고서에 따르면 전체 투자금 170억달러 중 50억6900만달러(약 6조원)를 공장과 부지 매입에, 99억3100만달러(약 11조1200억원)를 관련 설비·장비 구매에 사용한다. 이 가운데 공장을 조성하는 과정에서 40억5500만달러(약 4조5000억원)가 건설사·설계사 등 지역사회 매출로 유입될 것으로 봤다. 여기에 유통·물류·소비 등 간접적인 효과까지 고려하면 공장 건설로만 지역사회에 총 89억달러(약 10조원)의 경제 활동이 발생할 것으로 추산했다. 건설 과정에서 탄생하는 일자리는 약 2만여 개가량이며 약 5조2000억원의 임금이 지급될 것으로 계산했다. 삼성전자는 이러한 보고서를 바탕으로 주정부에 세금감면 혜택 등을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인도네시아를 생산거점으로 삼아 ‘일본 차 천하’인 동남아시아 시장 공략을 이어가고 있는 현대차는 전기차 생산거점을 늘리기 전 현지 정부에 전기차와 하이브리드의 개별소비세(사치세) 차이를 벌리는 법 개정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요구해왔다. 인도네시아는 니켈과 코발트, 망간 등 전기차 배터리 물질 생산국으로서 2030년에 ‘전기차 산업 허브’가 된다는 목표를 세우고 전기차와 배터리 사업 육성을 전방위로 추진 중이다. 현대차의 전기차 생산기지 유치를 위해 인도네시아는 최근 실제 개별소비세(사치세) 차이를 벌리도록 정부 규정을 개정했다. 인도네시아 정부의 이번 조치로 현대차가 현지에서 전기차를 생산할 가능성이 커졌다. 현대차는 올 연말 자카르타 외곽 브카시에 완성차 공장을 완성하면 내연기관차부터 생산하기로 돼 있다.
차등의결권 등을 보장하며 경영권 방어에 유리한 해외거래소를 통한 ‘상장 현지화’를 노린 케이스도 등장했다. 최근 국내 대표 이커머스 기업인 쿠팡은 국내가 아닌 미국 뉴욕증권거래소에 상장한다고 발표했다. 해외 상장을 결정한 이유로 꼽히는 점은 바로 차등의결권으로 이는 창업주 및 경영자에게 일반 주식보다 20배의 의결권을 부여하는 제도다. 경영권 방어에 보다 유리하다. 쿠팡 외에 5년 전 삼성바이오로직스도 미국 나스닥 상장을 고려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유정주 전경련 기업제도팀장은 “주52시간제가 올해부터 전 사업장을 대상으로 본격 시작되는 등 어려운 경제상황 속에서 기업규제가 가중되고 있다”며 “사업장의 해외 이전을 진지하게 고려하는 기업들이 늘고 있어 인력·기술·자본 해외유출이 우려된다”고 지적했다.
▶콧대 높았던 대기업들 스타트업에 손길
새로운 먹거리 찾기 위해 해외진출 활발
최근 몇 년 사이, 기존 기업들의 스타트업에 대한 관심과 투자는 크게 늘어났다. 특히 코로나19 이후 일어나는 시장 변화와 온라인화 요구에 따라, (기존 기업들이) 스타트업과 협업하는 일은 필수로 자리 잡았다. 아이러니하게도 국내 스타트업에 투자하는 해외 기업들처럼 우리 대기업들도 국경을 넘어 투자처를 찾고 있는 것이다. 신기술을 가진 스타트업을 통해 혁신을 이루고 새로운 먹거리를 찾으려는 움직임이다.
삼성전자의 투자 전문 자회사인 삼성벤처투자·삼성넥스트 등은 지난해부터 적극적인 해외 스타트업 투자에 나서고 있다. 인공지능(AI)·디스플레이·로봇기술·데이터 등 4차 산업 분야가 타깃이다. 옐로브릭데이터·필로헬스·실반이노베이션랩스·눔·나노포토니카·센스포토닉스 등이 대표적이다.
현대차는 지난해 말 ‘로봇 개’로 유명한 미국 보스턴다이내믹스를 인수한 이후 최근 자사 유튜브를 통해 걸어다니는 차인 ‘타이거(TIGER)’를 최초로 공개해 눈길을 끌었다. 이보다 앞선 지난 4월에는 이스라엘 스타트업 ‘가우지’에 2500만달러 규모의 투자를 진행하기도 했다. 가우지는 차량용 유리와 선루프 등에 적용 가능한 스마트글래스 광학 기술을 보유한 기업으로 정의선 회장의 첫 해외 스타트업 투자로 기록됐다. 한편 현대차는 동남아와 인도의 차량공유 스타트업인 ‘그랩’과 ‘올라’에 각각 3000억원과 3500억원을 투자하며 차량공유뿐만 아니라 자율주행 분야에도 관심을 드러내고 있다.
SK는 최근 글로벌 수소 기업에 투자하며 최근 강조하고 있는 ESG 투자 핵심 영역인 수소 사업 본격화에 나섰다. SK㈜와 SK E&S는 지난 1월 미국 플러그파워(Plug Power)의 지분 9.9%를 확보, 최대 주주로 올라섰다. 1997년 설립된 플러그파워는 수소 사업 밸류체인 내 ▲차량용 연료전지(PEMFC) ▲수전해(물에 전력을 공급해 수소를 생산하는 기술) 핵심 설비인 전해조 ▲액화 수소플랜트 및 수소 충전소 건설 기술 등 다수의 핵심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SK는 이외에도 지난해 3분기까지 스타트업 지분 투자 등에 약 2480억원을 투입했다. 글로벌 제약회사 허밍버드 바이오사이언스(10.95%)에 74억원을 투자하는 등 국내외를 막론하고 스타트업 투자에 열을 올리고 있다.
현대모터스튜디오 고양에서 현대자동차그룹이 인수한 로봇 전문업체 보스턴다이내믹스의 ‘인공지능 로봇개(dog)’를 시연하고 있다.
G그룹 역시 지난 2018년 미국 실리콘밸리에 벤처투자 기업인 ‘LG테크놀로지벤처스’를 설립하고 4개 계열사가 4억달러를 투자해 투자펀드를 조성한 바 있다.
LG테크놀로지벤처스는 LG전자, LG디스플레이, LG화학, LG유플러스, LG CNS 등 LG의 주요 회사 5곳이 출자해 4억2500만달러(약 5000억원) 규모의 펀드를 운용 중이다. 이 펀드는 기술력이 있고 성장 잠재력이 높은 첨단소재·장비 분야의 벤처기업 발굴·육성을 목적으로 한다. LG테크놀로지벤처스가 최근 미국 벤처기업 펀드에 투자하며 첨단소재 분야에서 신성장 동력 발굴에 나섰다. 미국 제약사 화이자(Pfizer)와 소재회사 코닝(Corning), 섬유회사 고어(Gore&Associates) 등과 함께 미국 벤처캐피털인 피닉스 벤처 파트너스(Phoenix Venture Partners)가 조성한 펀드에 공동투자한 것으로 알려졌다. LG테크놀로지벤처스는 현재까지 인공지능(AI), 로봇, 자율주행 기업 등을 포함해 현재까지 스타트업 27곳, 벤처캐피털 4곳에 투자했으며 누적투자 규모는 약 1000억원 수준이다.
국내 대표 IT기업인 네이버 역시 해외 스타트업 투자에 열을 올리고 있다. 특히 네이버는 동남아시아 지역에 대한 투자를 집중하고 있다. 네이버는 2017년 스타트업 펀드를 조성한 이후 지난해 말까지 출자한 금액은 총 8743억원으로, 이 가운데 아시아 지역에만 3257억원 이상의 자금을 쏟아 부었다. 주요 투자 대상으로 동남아에서 서비스 중인 인터넷 기술 기반의 업체다. 여기에 최근 네이버가 회사채 발행으로 최대 7000억원을 확보한 뒤, 1000억원 이상을 글로벌 유망 스타트업 지분 매입에 쓰겠다고 예고한 상태라 투자 금액은 더욱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네이버는 대표적으로 2018년 8월 동남아시아의 그랩에 1억5000만달러를 투자했다. 그랩은 2012년 말레이시아의 차량 호출 서비스로 시작해 동남아 각국에서 음식 및 식료품 배달, 금융서비스 등을 영위하고 있는 IT 회사다.
SK그룹이 지분을 투자해 최대주주로 올라선 미국 수소기업 플러그파워의 액화 수소 탱크.
019년에는 인도네시아의 전자상거래 회사 부칼라팍에 5000만달러, 베트남판 넷플릭스인 팝스월드와이드에 3000만달러, 온라인여행서비스(OTA) 스타트업 레드도어즈에 1000만달러를 투입했다. 이 외에도 싱가포르에서 시작한 동남아 1위 중고거래 플랫폼 캐러셀, 말레이시아 전자상거래 아이프라이스 등에도 투자한 바 있다.
네이버의 이러한 동남아 투자가 아시아 인터넷 시장의 맹주 자리를 노리는 중국의 IT 공룡 알리바바와 텐센트 등에 대항하기 위한 행보라는 해석도 나온다. 알리바바와 텐센트는 모바일 결제 서비스 알리페이, 위챗페이를 앞세워 동남아 공략에 사활을 걸고 있는 상황이다.
기업들의 경쟁적인 해외 스타트업 투자는 신사업 분야의 진출을 통한 새로운 먹거리를 창출함으로써 글로벌 기업들과의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한 포석이라는 것이 중론이다.
재계 한 관계자는 “글로벌 기업들이 코로나19로 풀린 막대한 유동성을 바탕으로 적극적인 인수합병과 지분교류를 통해 몸집불리기에 나서고 있다”며 “선점경쟁에서 뒤처지면 신사업분야에서 도태될 수 있다는 위기감도 서려 있다”고 말했다.
▶왜 해외 스타트업인가?
몇 해 전부터 국내 기업들의 스타트업과의 협업과 투자는 점차 늘어나고 있다. 다만 최근에는 해외 기술기업에 보다 무게중심이 높아지고 있는 분위기다. 스타트업 업계에서는 이러한 원인이 ‘국내의 높은 규제수준’이라고 분석했다. 특히 모빌리티나 헬스케어 산업의 경우 해외 스타트업의 성장속도가 훨씬 빠른 것이 사실이다. 국내 스타트업들은 기술력이 뛰어나도 법망을 피하기 위해 서비스를 쉽게 개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한 사업을 론칭했더라도 규제 샌드박스 신청 등 사전 단계가 오래 걸리는 것이 사실이다.
국내 한 대기업 투자유관부서 관계자는 “국내 신사업 스타트업보다 해외 기업에 더 많이 투자하는 이유는 규제 이슈가 크다”며 “세계적으로 유망한 분야라도 규제 때문에 서비스 상용화까지 시간이 오래 걸려 자금환수나 추가투자집행도 여의치 않은 경우가 많아 해외 쪽으로 눈을 돌리는 경우가 많다”고 전했다.
네이버가 1억5000만달러를 투자한 동남아 승차공유 및 음식료 배달 서비스 업체 ‘그랩’
국내 한 모빌리티 스타트업 관계자는 “기술력으로 중국이나 유럽에 비해 훨씬 앞서도 투자에 있어서는 정작 국내 기업들보다 해외자금에 의존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라며 “서비스 상용화까지 넘어야 할 규제도 많은 분야가 다수라 아예 해외 VC의 도움을 빌어 해외에서 서비스를 론칭하려는 기업들도 늘어나고 있다”고 밝혔다.
대기업들이 지분투자에 이어 해외 스타트업 인수합병(M&A) 빗장을 열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다. 그간 대기업들은 투자에 비해 소극적인 M&A를 진행했다. 인수할 만한 국내 스타트업을 찾기가 힘들고, ‘대기업이 시장을 독점한다’는 식의 비판을 의식했다는 이유다. 대기업 입장에서는 상대적으로 국내 스타트업보다 해외 스타트업 M&A 부담이 적은 것이 사실이다.
국내 한 투자사 관계자는 “대기업이 스타트업에 주목하는 것은 국내나 해외나 마찬가지라서 벤처투자액이 늘어나고 있고 좋은 기술을 보유한 해외 스타트업은 몸값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며 “국내 대기업들 역시 더욱 해외 스타트업 지분투자 외에도 적극적으로 인수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