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이 이대로 가선 안 된다. 과도한 관치금융은 이제 그만둬라.”
매일경제 이 새해 초 실시한 한국경제와 금융산업 현황에 관한 설문에서 전국 주요대학의 경제·경영학과 교수들은 입을 모아 금융개혁을 요구했다. 해바라기처럼 위만 바라보느라 전 국민의 개인정보를 빼내 팔아먹어도 무감각하고 무능력한 금융 당국과 금융기관에 대한 분노를 쏟아냈다.
이들은 또 청와대 경제수석실이나 기획재정부, 금융위원회 등 대부분의 경제 관련 부처에 대해 ‘평균 미만’의 점수를 주었다. 경제부처 가운데 산업통상자원부만이 보통보다 잘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교수들은 왜 한국의 금융정책에 대해 이처럼 비판적으로 날을 세웠을까. 이들이 대부분의 경제부처를 부정적으로 평가한 이유는 또 무엇일까.
은행 위주 금융정책 불신 키워
“한국의 금융업은 예대 마진에 의존하는 상업금융에만 의존하고 있다.”(하인봉 한국경제학회 부회장·경북대 교수) “금융산업에서 은행부문이 차지하는 비중이 과도하다.”(박영준 아주대 교수) “은행에 비해 금융투자업이 지나치게 작아 불균형 구조를 이루고 있다.”(이준행 서울여대 교수) “금융산업의 경쟁력은 금융 전문인력에서 나오는데 (은행의) 주인이 없는 경우가 많아 금융 전문인력을 양성하지 않았다.”(김정식 연세대 교수) “과도한 관치금융을 반드시 금지해야 한다.”(이성량 동국대 교수)…….
설문을 보내자마자 교수들의 의견이 쏟아져 들어왔다. 방학인데다 새해 벽두라 대부분이 학교를 비웠거나 신입생 모집 일정 때문에 바쁜 와중에도 교수들은 그 어느 때보다 열렬히 답신을 보내왔다. 외국 출장지에서 의견을 보내온 교수들도 여럿 있었다.
그만큼 금융개혁이 절실하다는 게 국내 경제·경영학자들의 시각이다. 실제로 답신을 보내면서 이번 기획이 시의적절하다고 격려성 멘트를 첨부한 교수들도 있었다.
대학교수들이 이처럼 금융개혁을 지지하고 나선 것은 지금 우리가 당면한 국가적 난제가 잘못된 금융정책에서 비롯됐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한국경제가 직면한 가장 큰 위험을 중요도순으로 두 가지를 뽑아달라는 질문에서 50%의 응답자가 가장 심각한 문제로 가계부채를 꼽았다. 또 두 번째로 중요한 위험으로 기업들의 투자 부진을 들었다. 이어 국가와 공기업의 과도한 부채, 일자리 부족의 위험도 꼽았다. 정치인들이 입만 열면 외쳤던 양극화나 언론에서 많이 제기하는 세계경제 급변에 따른 환율 요동 가능성에 대해선 한참 뒤로 제쳐놨다. 한 마디로 금융이 제대로 서야 한국경제의 핵심 문제들이 풀린다는 것이다.
뒤처진 금융 경쟁력은 관료 탓
그렇다면 한국 금융산업 전반에 걸쳐 어떤 문제가 있다는 것인가.
교수들은 가장 큰 문제점으로 낙후된 신용평가 시스템을 꼽았다. 응답자의 31.6%가 신용평가 능력 결여를 지적했다. 이어 금융기관의 낮은 생산성(21.1%), 가계대출 비중 과다(15.8%), 과도한 대출 편중(13.2%), (금융의) 은행 편중(10.5%) 등을 꼽았다. 무분별한 대출로 외환위기를 맞은 지 16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여전히 주먹구구식 신용평가를 하고 있어 금융이 국가불안의 온상이 되고 있다는 얘기다.
전문가들은 문제의 핵심을 잘못된 금융정책에서 나오는 것으로 보고 있다. 예대마진 따먹기 밖에 모르는 은행에 지나치게 무게를 실어 준 당국자들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실제 한국의 은행들이 얼마나 이자 장사에 치중하는지는 숫자로 입증된다.
최정욱 대신증권 연구원은 지난 2010년부터 3년 동안 각국 금융업의 수익구조를 분석한 결과 국내 은행들은 85.3%를 순이자 이익으로 올리고 있으며 비이자 이익은 고작 14.7%에 불과하다고 밝혔다. 이는 전체 이익의 44%와 38%를 각각 비이자 부문에서 올리는 영국이나 독일 은행들에 비해 월등히 낮은 것이다.
국내 은행들이 예금 받아 대출해서 이자 따먹기로 일관하고 있는데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저금리 기조가 전 세계로 확산되면서 은행의 수익성은 급격히 악화되고 있다.
Fn가이드에 따르면 지난 2013년 말 기준 국내 주요 금융그룹의 자기자본이익률(ROE)은 평균 5.7%선으로 선진국 수준에 한참 뒤처지는 것으로 잠정 집계됐다. 수익성이 가장 높은 신한지주가 7.29%인 반면 자산규모 최대 은행인 우리금융은 3.61%에 머물 것으로 보인다. 이는 유럽 재정위기가 한창 진행 중이던 지난 2012년조차 평균 8%대의 ROE를 기록한 글로벌 투자은행들에 비해 월등히 낮은 수준이다. 이런 까닭에 교수들은 각 금융권을 비교하는 평가에서도 은행에 최고점을 주지 않았다.
교수들은 보험-은행-금융투자회사-서민금융기관순으로 점수를 주었다. 보험회사에 대해선 보통보다 잘했다는 견해가 25%, 보통보다 못했다는 의견은 22%인 반면 은행에 대해선 보통보다 잘했다는 22%, 보통보다 못했다는 27%나 됐다. 대체로 점수가 후해서 ‘보통’ 정도는 두 눈 딱 감고 주는 교수들이 이처럼 은행을 부정적으로 보는 것은 국내 금융 산업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면서도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외국인도 장부가 반만 쳐주는 은행
교수들이 은행들을 낮게 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증권시장도 국내 은행들을 푸대접하고 있다. 국내 은행들의 주가는 지금 평균적으로 장부가의 60% 남짓한 수준에서 형성되고 있다. 지난 1월 17일 종가 기준으로 국내 5대 금융그룹의 주가순자산비율(PBR)은 평균 0.61배에 그쳤다. 가장 높은 신한지주가 0.77배, 우리금융은 0.52배에 불과했다. 지분의 60% 이상을 외국인들이 쥐고 있어 사실상 외국인 소유 은행이라고 해도 과장된 게 아닌 KB금융이나 하나금융조차 장부가의 50%를 약간 넘는 수준에서 주가가 형성되고 있다. 외국인들조차 국내 은행들의 가치를 높게 평가할 이유가 없다는 셈이다.
그렇다보니 국내 5대 금융그룹 가운데 시가총액에서 삼성생명을 웃도는 회사는 신한지주 하나뿐이다. 그것도 20조4854억원 대 19조9200억원으로 아주 근소한 차이만 날 뿐이다. 하나금융이나 우리금융 기업은행 등은 모두 삼성생명에 비해 많은 이익을 내면서도 주가에선 훨씬 밀리고 있다. 무슨 까닭일까.
사실 금융기관의 자산가치는 리얼타임으로 계산돼 나온다. 들고 있는 자산과 대출자산의 수익률, 투자자산의 시장가치 등이 컴퓨터로 자동 계산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은행주 주가는 자산가치를 약간 웃도는 선에서 형성돼야 한다는 게 글로벌 시장의 통념이다.
그런데 한국의 은행주들은 겨우 장부가의 절반이 약간 넘는 수준에서 주가가 형성되고 있다. 한 마디로 투자자들이 싹수가 노랗다고 본 셈이다.
최정욱 대신증권 연구원은 “국내 은행은 예대마진에 의존하는 수익구조를 보유하고 있으며 자금조달 측면에서 저원가성 예금 비중이 다른 주요국 은행보다 적은 편이다”라며 수수료 구제나 비이자 이익 활성화의 어려움 때문에 수익구조 다변화가 쉽지 않고, 당국이 해외진출을 장려하지만 대규모 투자를 했다가 실패한 선례가 있어 이 부문에서도 단기간에 이익구조를 변화시키기가 어렵다고 진단했다.
안방에서 이자놀이에 머물러
그렇다면 국내 금융기관들은 왜 안방에서 이자놀이만 하는 수준에 머물고 있을까.
설문에 참여한 교수들은 국내 금융산업의 경쟁력 중에서 가장 취약한 부문으로 리스크 관리 능력 부족을 꼽았다. 41.7%가 리스크 관리 능력이 국내 금융산업에서 가장 취약한 부문이라고 했고 27.8%는 자산운용 능력 부족을 꼽았다. 신용평가 능력 부족(16.7%)을 꼽은 응답자나 미래 예측력 부족(13.9%)을 지적한 응답자들 역시 표현만 다를 뿐 결국은 국내 은행들이 새로운 고객을 찾아 나서기엔 시기상조임을 지적하고 있다.
은행들은 지금 정부의 도움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관리들이 보험과 증권업계의 손목을 비틀어 빼앗아 넘겨준 상품들 덕에 겨우 이익을 유지하고 있다는 얘기다. 증권업계는 은행으로 넘어간 펀드 수수료나 증권계좌 유지 수수료 등은 연간 3조원 정도로 추산된다. 보험업계 역시 신규 보험의 절반 이상을 은행 창구를 통해 유치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도 지난해 5대 금융그룹의 순이익 합계는 6조원을 약간 넘는 수준이 될 것으로 추정된다.
이처럼 정책 당국의 힘을 빌려 돈을 끌어 모았지만 은행들은 지금 그 돈조차 제대로 굴리지 못하고 있다. 담보대출에 매달려 가계부채가 1000조원을 넘게 하고 계열 카드사나 저축은행을 통해 고금리 대출을 하는데 혈안이 돼 있는 게 지금 한국 금융그룹의 현실이다.
INTERVIEW | 하인봉 경북대 교수·한국경제학회 부회장“한국 투자금융 육성 손 놓은 상태”
한국의 금융을 정상화하려면 예대 마진 의존에서 벗어나 투 자금융 중심으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 각계에서 대두되고 있다. 이와 관련해 하인봉 교수는 한국은 투자금융을 도입하려다 손을 놓고 있는 상태라고 지적했다.
“금융위기 전 구미 투자금융(IB)을 도입하려던 금융기관들이 2008년 미국 금융위기 때 CDO나 CDS에 투자했다 많은 손실을 본 뒤 투자금융에 관해 손을 놓고 있다”는 그는 “한국 금융산업을 국가의 경제력에 걸맞게 키우려면 투자금융 산업의 발전이 매우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경제를 제조업 위주로 성장하는 데는 이제 한계에 달했다는 게 그의 시각이다.
하 교수는 “차후 한국의 경제 성장을 더 받쳐줄 버팀목 가운데 하나로 금융산업이 유망한 대안이다”며 “금융산업 발전을 위해 인재를 육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 교수는 이와는 별도로 국제거래에서 아주 저조한 정도만 통용되는 원화의 국제화도 적극 추진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미국 달러화는 발행한 신권의 80%가 해외로 나간다. 일본도 기축통화를 꿈꾸었던 적이 있을 정도로 국제화에 나서 신권의 20~30%를 해외로 유출하고 있다. 미국의 양적완화나 일본 아베의 경제 활성화 정책의 기조는 통화량을 늘리는 것이다. 그런데도 국내 물가에 미치는 영향을 매우 제한적인 수준에서 유지하며 경기부양(환율조절 포함)에 나설 수 있던 것은 통화를 해외로 내보냈기 때문이다.”
그는 특히 한국 원화의 국제화가 경제 규모에 비해 매우 저조하다고 지적했다.
“한국의 국가 GDP는 세계 GDP의 1.1%이고, 무역거래는 2013년 기준 1조달러를 넘어 세계 8위를 차지하고 있다. 그렇지만 원화는 국제결제기준(Trade Currency)으로 0.75%에 불과할 정도다.”
국제무역에서 한국이 차지하는 위상을 감안할 때 원화를 무역결제 통화로 유도한다면 앞으로 한국의 통화정책에 훨씬 여유가 있을 것이란 설명이다. 원화의 국제화는 궁극적으로 한국 금융산업 발전에도 큰 부분을 담당할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