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줄이 이어지는 손실, 손실
#이스트스프링자산운용은 지난 5월 말 기준으로 채권 펀드인 ‘이스트스프링 물가 따라잡기 펀드’가 종류별로 올해 들어 1.16~1.35%의 손실을 입었다고 공시했다. 회사 측은 이 펀드는 5단계로 구분된 이스트스프링의 투자위험 등급 중에서 4등급으로 위험이 낮은 펀드로 분류한 바 있다. 물가연동국채의 편입비중을 신탁재산의 20~100% 범위 내에서 탄력적으로 조정하며 자산의 실질가치를 지키는 데 주력한다는 이 펀드는 그런데도 원본을 까먹었다. 이 펀드의 최근 3개월간 손실 폭은 연초 이후 손실 폭보다 크게 나타났는데 최근 시장에서 채권 금리가 급변동하면서 손실이 커졌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가 지난 5월 9일 기준금리를 인하했는데도 불구하고 이후 장기채 금리가 오히려 반등하면서 거의 대부분의 국내 채권형 펀드는 5월 한 달 동안 손실을 기록했다. 그중에서도 국고채와 연계한 파생형 펀드의 손실이 컸는데 우리자산운용의 KOSEF10년국고채레버리지ETF펀드는 한 달 동안 3.5%의 손실을 입었다. 또 같은 기간 동안 삼성자산운용의 KODEX10년국채선물ETF펀드가 1.65% 손실을 기록했다.
#지난해 10월 대박상품인줄 알고 새로 나온 30년 만기 국고채를 샀던 김 모씨는 지금 국고채란 말만 들어도 속이 부글부글 끓는다고 한다. 세금 걱정 덜면서 안전하게 이자를 챙길 수 있는 상품인줄 알고 샀던 채권 가격이 계속 떨어지자 더 이상 참지 못한 김씨는 이 선에서 손실을 막는 게 낫다고 판단해 들고 있던 물량을 모두 던져버렸다.
김씨 같은 이들의 매도 주문이 몰리면서 최근 30년 만기 국고채는 하루 평균 2000억원대의 물량이 거래된다고 금융투자협회는 밝혔다. 이 국고채의 금리는 지난 6월 17일 3.48%로 마감되는 등 최근 3%대 중반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지난해 9월 3%대 초반에 첫 발행된 30년물 국고채는 10월 들어선 10월 10일 2.94%까지 떨어지는 등 3% 선에서 맴돌았다. 이에 비하면 가격은 50bp(0.5%포인트)만큼 떨어진 것이다. 채권은 금리가 오르는 것과 반비례해 가격이 하락한다.
채권전문가들은 당시 3% 선에서 30년 만기 국고채를 100억원어치 산 투자자라면 8억5000만원 정도의 손실을 본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30년 만기 국채는 금리가 0.01% 올라갈 때마다 100억원당 1700만원씩 손실이 발생한다. 값이 가장 비쌌던(금리가 낮았던) 10월 10일 투자했다면 손실 규모는 9억원을 훨씬 넘어선다.
채권 투자 많은 증권업계 비상
지난 6월 중순 한국투자증권은 한 직원이 무리하게 채권을 사들이다 100억원가량의 손실을 냈다고 금융감독원에 자진신고를 하고 정확한 실상을 파악하기 위해 자체검사를 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 직원은 지난 5월 9일 한국은행이 기준금리를 인하한 뒤 내릴 줄 알았던 장기금리가 오히려 올라가자 결국은 내려올 것이라며 10년물 국고채를 계속 사들이다가 손실을 키운 것으로 알려졌다.
채권전문가들은 예상과 달리 일어난 금리 상승으로 대부분의 대형 증권사가 채권 운용에서 손해를 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지난 3월 말 결산 기준으로 국내 증권사들이 보유한 채권 규모는 총 134조원대에 달한다. 특히 자본시장법 개정에 맞춰 헤지펀드 영업을 하려고 자기자본을 대폭 늘렸던 대형 증권사들은 묶이게 된 자금으로 채권을 샀다가 최근 큰 손실을 본 것으로 알려졌다.
성인모 금융투자협회 채권부장은 “증권사들이 이들 가운데 절반 정도를 환매조건부채권(RP)으로 운용했지만 장기채도 많이 들고 있던 게 사실이다”면서 “다만 아직 금리가 본격적으로 상승한 게 아니기 때문에 손실이 아주 크지는 않은 것 같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채권 전문가들은 유동성이 높다는 점에서 증권사들이 많이 들고 있던 10년물 국고채의 금리가 최근 급등했기 때문에 증권업계의 손실이 클 것으로 보고 있다.
채권왕도 투자의 대가도 채권서 손실
지난 3월 말 기준으로 2조달러가 넘는 자산을 운용하고 있는 핌코의 설립자이자 최고투자자인 ‘채권왕’ 빌 그로스조차 최근 큰 손실을 냈다. 빌 그로스가 운용하는 대표적 펀드인 자산 규모 2930억달러의 ‘토털리턴펀드’는 지난 5월 1.9%의 손실을 냈다. 이는 미국에서 금융위기가 발생했던 지난 2008년 9월 이후 가장 저조한 성적이다. 시장 상황이 좋지 않다고 본 이 펀드는 포트폴리오에서 미국 국채 비중을 종전 39%에서 37%로 낮췄다. 이에 앞서 세계적인 투자의 대가 조지 소로스가 자문하는 퀀텀펀드는 이탈리아 국채 등에 대규모로 투자했다가 지난 2011년에만 자산의 15%를 날려 버렸다. 소로스는 지난 2011년에 퀀텀펀드가 운용하던 외부 자금을 모두 상환하고 자체자금만 운용하기로 결정한 바 있는데 그 이면에 이런 아픔이 있었던 것이다. 소로스가 당시 유럽 주변국의 유동성 위기를 해소하기 위한 양적확대를 반대한 독일을 강력하게 비판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소로스뿐 아니라 상당수 헤지펀드들이 투자하고 있던 유럽 국채에서 큰 손실을 입었다. 또 자금운용의 필요 때문에 개별국가의 채권을 보유할 수밖에 없던 거대 금융기관들 역시 채권에서 엄청난 손실을 냈다.
실제로 글로벌 금융위기의 파문에 휩쓸려 구제금융을 받아 사실상 영국의 정부은행이 된 로열뱅크오브스코틀랜드(RBS)는 2011년에 32억달러의 손실을 냈다고 지난해 2월 밝혔다. 이 은행이 대규모 손해를 본 것은 투자했던 그리스 국채에 물렸기 때문이다. RBS는 한 해 전인 2011년에도 17억달러 상당의 손실을 냈다고 밝힌 바 있어 국채 투자의 위험이 얼마나 큰지를 보여줬다. 그리스 사태로 금융기관들만 손해를 본 게 아니다. ECB는 지난 2012년 그리스 정부에 대한 2차 구제금융에 나서면서 그리스 국채를 소유하고 있던 민간 투자자들에게도 손실을 분담토록 했다. 당시 발표된 손실 분담률은 평균 53.5%였으나 자금 유입 후 채권 보유자들이 입은 실제 손실률은 70%대로 확대됐다.
누가 채권을 안전자산이라 했나
이처럼 국내의 개인이나 금융기관은 물론이고 세계적인 채권투자의 대가와 글로벌 금융기관들조차 최근 들어서 채권에서 대규모 손실을 내고 있다. 전문가들이 입만 열면 ‘안전자산’이라고 부르짖던 채권이 배신을 한 것일까, 아니면 채권이 원래부터 안전자산이 아니었는데 투자자들이 잘못 알고 있던 것일까.
최수현 금융감독원장은 지난 6월 18일 세계보험회의 연차총회에서 “과도한 위험자산 투자를 한 보험사는 투자 부실화로 시장에서 퇴출됐다”며 “상품구조를 개선하고 자구노력과 함께 안전자산 투자를 유지한 보험사는 위기의 파고를 넘었다”고 강조했다. 그가 말한 위험자산과 안전자산은 무엇인가.
최 원장이 같은 의미로 사용했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사실 금감원은 오래전부터 채권은 안전자산, 주식은 위험자산으로 구분해 왔다. 예를 들어 퇴직연금 운용과 관련해 지난 2005년 발표한 ‘감독규정 및 시행세칙’에선 구체적으로 위험자산의 종류와 투자한도를 정하면서 ‘주식, 주식형수익증권, 전환사채, 후순위채권’ 등을 위험자산으로 명시했다. 대조적으로 국채나 공채, 우량기업의 회사채는 안전자산으로 취급한 것이다.
한국은행 역시 채권은 안전자산, 주식은 위험자산으로 보는 이분법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실제로 지난해 12월 ‘인구구조 변화와 금융안정 간 관계’를 다룬 연구자료를 보면 채권은 안전자산으로, 주식은 위험자산으로 분류했다.
더 나아가 한은은 미국 국채나 미국 달러화를 언급할 때도 ‘안전자산’이란 단어를 거의 습관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심지어 원/달러 환율 동향을 보고하면서까지 달러가 강세일 경우 안전자산 선호현상 때문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한국의 중앙은행인 한은이 원화를 안전자산이 아니라고 본다는 얘기나 다름없다.
이러한 금융당국의 무분별한 이분법은 국내 전 금융기관에 영향을 미쳐 무의식 중에 채권은 안전자산, 주식은 위험자산으로 간주하게 했고 주식투자는 위험한 투기를 하는 양 취급하게 만들었다. 국내 금융기관의 자산포트폴리오의 대부분을 채권이 차지하고 있는 것도 이런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 특히 금융당국은 보험업 등 일부 금융업에 대해선 자산의 대부분을 채권에 투자할 수밖에 없도록 관련 규정을 못박아두기도 했다.
물론 금융당국으로선 이런 입장을 취한 데 대해 국제결제은행(BIS) 등 국제기구의 규정이 그러니 어쩔 수 없다고 항변할 수도 있을 것이다. 바젤위원회는 최근 은행의 유동성커버리지비율(LCR) 규정과 관련해 LCR에 포함될 수 있는 안전자산으로 현금과 국채, 우량 회사채, 우량 담보대출채권(RMBS) 등을 제시한 바 있다.
그렇지만 바젤위원회조차 실제로는 채권을 무조건적으로 안전자산으로 인정하지는 않는다. 바젤위원회가 인정하는 안전자산은 현금과 부도위험이 전혀 없다고 신용평가사가 인정했고 언제든 현금화가 가능한 국채, 국가나 중앙은행이 지급을 보장한 은행 예금, 국채는 아니더라도 부도위험이 전혀 없다고 공인받고 거래가 잘 돼 언제든 현금화가 가능한 채권 등이다. 채권이라고 무조건 안전자산으로 취급하지는 않는다는 얘기다.
채권을 무위험자산으로 간주한 데는 국내 금융기관의 구태의연한 투자관행도 한몫을 하고 있다. 정부가 지급을 보장하는 국채는 만기가 되면 정해진 원금과 이자를 받게 된다. 그래서 관행처럼 만기까지 채권을 들고 가던 국내 금융기관은 당연히 채권 특히 국채를 무위험 자산이라고 했다. 한국은행이 상투에서 금을 사놓고도 팔지 않을 것이니 손실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상황이 변했다. 장기채권이라고 해봤자 만기가 고작 3년에 불과했던 90년대 이전과 달리 지금은 국내에서도 10년물 국채가 대중적인 채권이 됐고 지난해부턴 30년 만기 국채도 발행되고 있다. 기간이 길어지면서 누구도 만기까지 투자할 것이라고 장담하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 됐다. 게다가 국제기구들도 채권을 기간별로 평가해 장부에 반영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결국 가격이 수시로 변하게 돼 채권도 주식처럼 위험자산이 된 것이다.
실제로 버냉키 미 연준 의장이 양적완화 축소를 의미하는 발언을 한 뒤 외국인들이 국채 선물을 팔아대면서 국내 채권시장에선 금리가 폭등하면서 장기채권의 가격이 폭락했다. 한은이 기준금리를 0.25%포인트 내렸으나 외국인 투매로 장기채 금리는 0.5%포인트 정도 상승했으니 중앙은행의 위상은 초라할 정도로 구겨졌다. 그만큼 시장에서 채권의 위험이 커졌다고 할 수 있다. 특히 그동안 정부의 징세 능력 때문에 부도 가능성이 낮다는 점에서 일반적으로 무위험 자산으로 간주됐던 국채는 최근 부도위험까지 있는 상품으로 전락했다. 그리스 사태가 시장 질서를 송두리째 바꿔놓은 것이다. 그러니 지자체나 공기업 도산은 언제든지 일어날
안전자산 위험자산
투자와 관련해 위험이라 하면 일반인들은 어떤 선택을 하거나 하지 않음으로 생길 수 있는 잠재적 손실 가능성을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전문적으로는 실제 수익률이 기대했던 수익률과 다르게 나타나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원리금이 정해진 채권은 만기가 되면 얼마를 받는다는 게 확실하니 안전자산이지만 주식의 경우 일정 기간이 지난 뒤 이익이 많이 날 수도 있고 반대로 손실이 날 수도 있어 예상을 하기 어려우니 위험자산이란 것이다.
인베스토피아 역시 위험자산에 대해 수익률이 보장되지 않는 투자자산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러나 어떤 상품이 위험자산이라고 일률적으로 정의하지는 않는다. 회사채는 주식보다는 덜 위험하지만 국채에 비해선 위험한 자산이라고 한다. 물론 이런 정의 역시 이제는 바뀌고 있다.
한편 인베스토피아는 ‘안전자산(Safe Asset)’에 대해선 내재적으로 소송에 처할 가능성을 갖지 않은 자산이라며 또 다른 의미의 개념도 제기한다. 단지 어떤 자산을 소유했더라도 심각한 소송에 걸릴 위험이 없는 자산을 말하는데 주식이나 펀드, 채권, 은행 계좌, 개인 보유의 주택 등이 여기에 속한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