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츠로셀의 진짜 복구는 공장이 다시 돌아간 날 끝난 것이 아니다. 고객이 다시 주문서를 보내온 날 비로소 끝난다.
화재를 진압한 지 이틀째인 4월 24일 오전 10시. 비츠로셀에 외국 손님이 찾아온다. 미국 앨라배마주에 본사를 둔 넵튠(Neptune)이라는 기업의 임원진들이었다. 회사 대표는 돈 디머 사장. 장 대표와는 퍼스트 네임(First Name)으로 부르는 사이. 넘버 2인 웨인 피치포드 부사장, 넘버 3인 톰 클로포드 구매 담당 이사도 동행했다.
디머 대표 일행은 아시아 지역 거래처를 둘러보는 비즈니스 출장 중이었고 마침 화재가 난 당일에는 홍콩에 있었다. 비츠로셀의 오병민 차장(현 미주본부 담당 상무)은 22일 새벽 4시 20분 클로포드 이사에게 메일을 보낸다.
“지난밤 우리 공장에 불이 났다. 월요일 우리 회사를 방문하기로 했는데 불가능할 것 같다.”
정확히 8분 후 클로포드 이사로부터 답신이 왔다. 질문이 속사포처럼 쏟아졌다. “화재로 인한 피해가 어느 정도냐?”, “비츠로셀 생산에는 어떤 영향을 주는가?”, “공장은 괜찮냐?” 그러면서 “우리는 예정대로 월요일 한국에 간다”라며 “오전 10시 호텔 로비에서 보자”라는 답이 왔다. 그 와중에 비츠로셀에서 몇 명이 우리와 미팅을 할 것인지도 묻고 호텔 비즈니스 룸은 우리가 예약하겠다는 메시지도 보내왔다.
클로포드 이사는 너무 사무적이었는지 다시 메일 한 통을 보낸다. 혹시 힘들다면 미팅을 하루 연기해 화요일로 잡을 수도 있다는 내용. 그러면서 정말 걱정이 됐는지 비츠로셀의 안부를 묻는다. 두 번째 메일은 한 시간 정도 지나서였다.
비츠로셀은 내부 회의를 한 뒤 이 미팅에 응하기로 결정한다. 무엇보다도 넵튠 회사의 톱 3가 다 오는 데다가 이제 막 비즈니스를 키워나가는 중요한 고객이었기 때문이다.
장승국 대표의 회고.
“넵튠은 수도계량기를 만드는 회사인데 우리가 파는 리튬일차전지 시장 중 당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구매처였습니다. 이 분야에서 1등 기업이 프랑스의 타디란이었는데 넵튠은 타디란에서 약 80%를 사다 쓰고 우리로부터 20%를 썼습니다. 우리 비중이 커지기 시작할 때였습니다. 넵튠은 비록 20%라도 우리로부터 공급받는 게 중요했습니다. 물론 우리가 보여줄 게 없다고 했습니다. 다 탔다. 진짜 미안하다. 그러나 우리는 다시 일어날 것이라고 했죠. 그래도 오겠다고 하니 어쩔 수 없이 월요일 오전에 만난 거지요. 그 바람에 직원들에게 향후 계획을 밝히는 행사를 오후로 미루게 된 겁니다.”
장 대표는 “디머 사장이 전화를 해 최소한 내 얼굴은 보고 가야 마음이 편할 것 같다고 해서 오 상무를 통해 그들을 서울에 있는 비츠로셀로 모신 것”이라며 “화이트보드에 향후 복구 계획을 써 내려가면서 설명해 줬다”라고 말한다.
장 대표가 들려준 후일담 한 토막.
“이 친구를 제가 2017년 9월 본사가 있는 앨라배마에 가서 다시 만났죠. 복구 경과를 업데이트해 주고 향후 사업을 논의하기 위해서였죠. 그랬더니 몇 달 전 화재 당시 얘기를 하는 겁니다. ‘폴, 당신은 항상 웃으면서 얘기하고 농담도 잘하는데 그때는 정말 표정이 진지하더라. 그리고 그 후 한 번도 웃는 걸 못 봤는데 여기 와서 다시 미소를 찾은 걸 보니 내가 정말 기쁘다’라고요. 그리고 화재 1년 후 스마트캠퍼스 준공 직후 공장을 방문했습니다. 놀라운 변화를 보고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그런데 말이야. 이참에 회사 이름을 피닉스(Phoenix; 불사조)로 바꾸는 게 어때.’ 그러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피닉스라는 이름을 가진 석유 시추를 하는 기업을 고객으로 두고 있었습니다. 그 회사와 손잡고 저희가 배터리를 개발했는데 우리에겐 엄청난 고객입니다. 그랬더니 ‘할 수 없네’ 하면서 박장대소를 한 기억이 있습니다.”
미국의 또 다른 수도계측기 업체인 뮬러 시스템스(Mueller Systems)는 미리 대금을 주고 물건은 되는대로 납품해도 좋다는 호의를 베풀었다. 이 회사의 하산 알리 사장은 장 대표에게 보낸 메일에서 “18개월 동안 쌓아온 우리의 신뢰는 변함이 없을 것”이라며 “우리는 항상 비츠로셀과 함께할 것”이라고 썼다.
인도의 대표적인 관광지로 불리는 골든 트라이앵글의 한 축인 자이푸르(Jaipur). 1876년 영국 웨일즈 왕세자가 방문할 때 도시를 분홍빛으로 칠했다 해서 핑크시티로 알려진 이곳에 비츠로셀과 끈끈한 인연을 맺고 있는 기업이 있다. 전기 및 가스계량기를 제조하는 지너스(Genus).
지난 2009년 이 회사에 예기치 않은 사고가 발생했다. 공장 옆에 있는 주유소에서 폭발 사고가 발생해 공장으로 번졌다. 이로 인해 직원 몇 명이 사망하고 제품은 거의 다 불에 타는 불행을 겪었다. 그때 장 대표가 이 회사를 적극적으로 밀어준다. 비츠로셀의 생산 순위를 바꿔 지너스로 갈 물량을 우선 배정해 줬다. 급한 사정을 알기에 물건을 비행기로 실어 보냈다. 그러면서 운송료를 비츠로셀이 부담했다. 어려울 때 도와주는 친구가 진짜 친구라는 건 비즈니스에서도 통한다는 걸 장 대표는 뼈저리게 인식하고 있었다.
비츠로셀 화재 소식을 메일을 통해 전해 듣고 이 회사의 라지 아가르왈 최고경영자는 장 회장에게 메일을 보낸다. 이런 내용이다.
“불행한 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내가 당신이 지금 느끼는 그 심정을 안다. 우리도 그런 사고를 당했기 때문이다. 재산상의 손실뿐만 아니라 심적인 고통이 당신을 힘들게 할 것이다. 회복에는 시간이 걸릴 것이다. 내가 경험으로 알게 된 사실은 이 모든 걸 치료하는 유일한 건 시간이다. 나는 당신의 비즈니스 감각과 성숙한 품성이 이 고난을 딛고 일어나게 하고 머지않은 장래에 더 강한 회사로 만들 것이라고 믿는다. 이 위기의 순간 지너스는 당신 곁에 있을 것이다. 좋은 친구로서 가능한 모든 지원을 하겠다. 비록 지금은 어려울지라도 우리는 곧 다시 좋은 비즈니스 파트너가 될 것이라 확신한다. 빨리 돌아와라.”
그는 별도로 장 대표에게 직접 전화를 걸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당신이 어려웠을 때 우리를 도와준 걸 기억한다. 이제 내가 당신을 도와줄 차례다. 무엇이든 말하라.
장 대표는 그 전화에 눈물이 났다. 신뢰라는 게 얼마나 큰 자산인지 뼈저리게 느꼈다. 그는 전화를 붙잡고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하다가 “고맙다. 그렇다면 염치 불구하고 부탁 하나 하겠다”라면서 “대금 결제를 두 주만 당겨줄 수 없겠냐”라고 말했다. 즉답이 돌아왔다. “물론(Of course).”
장 대표는 고객을 지키는 게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봤다. 그는 직원들에게 말했다.
“당분간 이익이 안 나도 좋다. 비용이 더 들어가더라도 약속을 지키자. 우리가 별도로 준비한 임시공장을 최대한 돌리자. 그래서 조금씩이라도 공급을 하자. 모자라는 건 1년 후에 다 맞춰줄 수 있다. 고객을 실망시키지 말자.”
그는 “전 직원이 그야말로 죽기 살기로 매달렸다”라고 한다. 장 대표는 훗날 그 1년을 버틴 건 대우전자 시절 벤처정신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그는 “복구 1년 동안의 기적을 만들어 낼 때 저의 스피릿(Spirit)은 27년 전 대우전자 베네룩스 판매법인 설립 초기, 물불을 가리지 않고 밤낮 없이 일했던 때로 돌아갔습니다”라고 회고했다.
“진짜 밤잠 안 자고 365일 밤에 불 켜놓고 일했습니다. 설비업체들도 우리를 도와줬습니다. 배터리를 만드는데 수많은 설비가 필요한데 그중 압출기라는 게 있습니다. 이걸 독일에서 수입해 썼거든요. 유일하게 이 설비만 다시 들여오는 데 2년 반 걸렸습니다. 나머지는 제 때 해결했습니다. 만약에 설비업체들이 50%만 해외 업체였다면 우리는 죽었을 겁니다.”
장 대표는 이렇게 말한다.
“공장은 돈을 들이면 다시 지을 수 있습니다. 생산설비도 새로 사면 됩니다. 하지만 10년, 20년 거래하며 쌓아온 신뢰는 돈으로 살 수는 없습니다. 더구나 배터리는 한번 납품하면 수년, 길게는 10년 이상 사용되는 제품입니다. 고객 입장에서 안전사고를 낸 회사의 제품을 다시 선택한다는 것은 쉬운 결정이 아닙니다.”
어떤 면에서 비츠로셀은 화재 뒤 고객의 신뢰를 회복한게 아니었다. 화재를 통해 자신들이 얼마나 많은 신뢰를 쌓아두었는지를 확인한 것이다.
[손현덕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