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도적인 AI 알고리즘과 소프트웨어 플랫폼을 무기로 로봇의 두뇌를 장악한 미국, 정부의 파격적인 보조금과 초저가 공급망을 앞세워 거침없이 하드웨어를 찍어내는 중국. 글로벌 피지컬 AI 산업의 최전선을 장악한 미·중 양강 구도 속에 K-휴머노이드는 넛크래커 국면이다. 그럼에도 글로벌 시장이 한국을 간과하지 못하는 이유는 제조업 생태계에 기인한다. 세계 최고 수준의 완성차 조립 라인, 첨단 반도체 파운드리와 가전 공장 등 제조 현장(Test Bed)과 이를 뒷받침하는 대기업의 수직계열화 역량이 K-휴머노이드의 가장 강력한 무기다. 실제로 2026년 상반기 K-휴머노이드는 로봇 전시회의 화제성을 넘어 산업 현장에 투입돼 검증 단계에 진입했다. 올 1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CES 2026에서 현대차그룹은 완전 전동식 ‘아틀라스’를 처음으로 실물 시연하며 2028년부터 미국 공장에 단계적으로 투입하겠다는 양산 로드맵을 내놓았다. 같은 달 삼성전자는 레인보우로보틱스에 대한 콜옵션을 행사해 지분율을 35.0%까지 끌어올리며 최대 주주 지위를 확보했다. 지난 6월 레인보우로보틱스의 이동형 양팔 로봇 ‘RB-Y1’은 쿠팡 물류센터에 시범 도입됐고, CJ대한통운도 이 제품의 도입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중희 딜로이트 컨설팅 파트너는 최근 보고서에서 “오늘날 피지컬 AI는 미래 기술의 가능성을 넘어 산업 현장의 생산성·안전성·운영 효율을 혁신할 핵심 기술로 자리 잡았다”며 “피지컬 AI의 실제 경쟁력은 어떤 기술을 보유했느냐보다 자사의 현장과 업무 특성에 적합한 기술을 선별하고, 이를 운영에 적용해 전 사적으로 확산하는 실행 역량에 달려 있다”라고 강조했다.
2026년 북중미 월드컵 16강전 현장. 경기 시작을 앞두고 선수 대신 휴머노이드 로봇이 경기장 중앙으로 걸어 들어온다. 제법 당당한 걸음걸이로 심판에게 다가선 로봇은 두 손을 모아 축구공을 건넨 뒤 다시 경기장 밖으로 걸어 나갔다. AI로 만든 영상이 아닐까 의심했던 이 장면의 주인공은 현대차그룹 계열사인 보스턴다이나믹스의 휴머노이드 로봇 ‘아틀라스(Atlas)’다. 현대차그룹의 로보틱스 전략은 2020년 미국 로봇 전문기업 ‘보스턴다이나믹스’를 인수하며 본격화됐다. 그로부터 6년이 지난 올 7월, 현대차그룹은 소프트뱅크가 보유한 보스턴다이나믹스 잔여 지분을 전량 인수하며 외부 주주 없는 100% 지배구조로 전환했다. 피지컬 AI 연구개발과 양산, 계열사 협업 의사결정을 신속하게 처리하기 위한 포석이다. 업계에선 이번 지분 정리로 “보스턴다이나믹스의 기업가치가 향후 150조원까지 성장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기도 했다. 현대차그룹은 지난 8월 미국 조지아주 현대차그룹 메타플랜트 아메리카(HMGMA) 인근에 ‘로봇 메타플랜트 응용센터(RMAC)’를 가동했다. 그간 보스턴다이나믹스는 인텔, 마이크론, 텍사스인스트루먼트 등 500여 개 외부 고객사의 생산 현장에서 사족보행 로봇 ‘스팟’을 운용하며 데이터를 수집해왔다. RMAC가 가동되며 현대차그룹은 자체 공장에서 직접 데이터를 생산, 축적하는 체계를 갖추게 됐다. 아틀라스는 키 188㎝, 몸무게 90㎏의 당당한 체격을 갖췄다. 지속해서 짐을 들어 올리는 무게는 30㎏ 수준. 순간적으로 50㎏의 무거운 짐도 들 수 있다. 탑재한 카메라 시스템을 활용해 주변 환경을 360도 방향으로 파악하고, 자율 배터리 교체 기능을 탑재해 3분 안에 전력을 보충하는 조업 체계도 완성했다.
보스턴다이나믹스는 CES 2026 현장에서 구글 딥마인드와 기술 협력을 발표했다. 이를 통해 구글의 제미나이로보틱스 기반 모델이 아틀라스에 적용된다. 이 기술은 물리 능력과 함께 인지 제어 성능을 높인다. 한 대의 로봇이 특정 동작을 학습하면 중앙 통제 시스템이 해당 데이터를 즉시 다른 기계에 배포하는 형식이다. 작업자가 직접 프로그래밍하지 않아도 전체 로봇이 새로운 작업을 동시에 습득할 수 있다. 현대차그룹은 2028년부터 미국 조지아주 메타플랜트 아메리카 공장에 아틀라스를 투입할 예정이다. 첫 임무는 부품을 순서대로 정렬하는 파트 시퀀싱. 이 작업 과정에서 쌓인 데이터를 바탕으로 2030년에는 더 복잡한 부품 조립까지 활용 범위를 넓힐 계획이다. 최근엔 국산 부품 탑재 전망도 전해졌다. 최근 두 달간 국내 자동차 부품사들을 찾아 기술력을 검증한 보스턴다이나믹스 기술진이 이르면 4분기 중 공급사를 선정할 거란 소식이다. 보스턴다이나믹스 기술진은 지난 6월 부터 현대차그룹 계열사인 현대모비스를 비롯해 에스오에스랩, 화신정공 등지에서 휴머노이드 로봇용 부품 공급 가능성을 점검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가 하면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은 지난 7월 24일(현지 시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샌프란시스코 AI 서밋’에 참석해 자동차·로봇의 지능화를 넘어 공장과 도시 인프라 전체를 연결하는 ‘피지컬 AI 비전’을 공개했다. 보스턴다이나믹스의 로봇 하드웨어 기술에 구글 딥마인드의 로봇 AI 파운데이션 모델을 결합해 아틀라스의 자율성과 판단 능력을 끌어올리는 공동연구도 함께 발표됐다. 보스턴다이나믹스가 이동과 균형, 정밀 제어를 담당하고, 구글 딥마인드가 주변 환경을 이해해 작업 순서를 판단하는 방식이다. 이와 별개로 현대차그룹은 엔비디아와 ‘로봇 레퍼런스 플랫폼’을 구축해 국내 대학, 연구소, 스타트업에 연구용 로봇 모델을 제공하기로 했다. 전라북도 새만금에는 2027년 착공해 2029년 완공을 목표로 AI 데이터센터와 태양광 시설, 로봇 제조 클러스터를 조성해 ‘도시 단위 피지컬 AI’를 실증할 계획이다. 이 같은 로드맵을 바탕으로 현대차그룹은 2028년까지 미국 내에 연간 3만 대 규모의 로봇 생산 시스템을 구축할 계획이다.
삼성전자의 휴머노이드 접근법은 현대차그룹과 결이 다르다. 하드웨어 기업을 통째로 인수하기보다 국내 로봇 전문기업에 대한 지분을 단계적으로 늘리며 최대주주 지위를 확보하는 방식을 택했다. 2023년 유상증자 참여로 ‘레인보우로보틱스’의 지분 확보를 시작한 삼성전자는 이후 콜옵션 행사를 거듭하며 지분율을 높였다. 올 초에도 콜옵션 행사를 통해 기존 14.7%였던 지분율을 35.0%까지 확대하며 레인보우로보틱스를 연결 자회사로 편입했다. 레인보우로보틱스는 KAIST의 휴보(HUBO) 연구진이 2011년에 창업한 로봇 전문기업이다. 창업 멤버인 오준호 KAIST 명예교수가 현재 삼성전자 미래로봇추진단장을 겸임하고 있다는 점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실증 성과도 이어지고 있다. 올 6월에 이동형 양팔 로봇 ‘RB-Y1’이 쿠팡 물류센터에 도입되며 구동 안정성과 작업 효율성을 검증하고 있다. 다만 레인보우로보틱스는 지난 7월 초 사업부를 매니퓰레이터, 모바일, 사족로봇, 로봇자동화(SI) 등 4개 사업부로 재편했다. 휴머노이드는 중장기 연구개발 과제로 두고 우선 협동 로봇, 모바일 로봇, 사족보행 로봇 등 제품군별 사업을 키워 매출 확대에 나서기 위한 조치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휴머노이드는 다중 작업이 가능해야 부가가치가 생기는데 이를 검증하는 데 시간이 걸리는 만큼 우선 양팔 로봇 등에 AI를 접목해 경쟁력을 다지겠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7월 중순에는 노태문 삼성전자 대표이사 겸 DX부문장 직속으로 ‘RX(Robotics eXperience) 사업추진실’ 신설 소식이 전해지기도 했다. 기존 삼성전자, 삼성리서치, 미래로봇추진단 등에 분산돼 있던 로봇 관련 기술 역량을 결집하고, 중장기 전략 수립부터 핵심 기술 개발과 사업화까지 통합 추진하기 위한 조직이다. 삼성전자는 지난 2021년 로봇사업화 태스크포스(TF)를 출범시키고, 로봇사업팀으로 격상했으나 웨어러블 로봇 ‘봇핏’과 가정용 로봇 ‘볼리’의 상용화가 지연되며 2024년 조직을 개편했다. 이후 레인보우로보틱스를 중심으로 휴머노이드 핵심 기술을 내재화해왔다. RX 사업추진실의 핵심 업무는 휴머노이드 로봇 시장 공략이다. 특히 사람의 힘줄과 유사한 방식으로 손가락을 움직이는 구동 메커니즘을 개발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 서초구 우면동에 자리한 서울R&D캠퍼스에서 로봇 하드웨어와 AI 기술을 설계하고, 경북 구미 사업장에 데이터 팩토리를 구축해 로봇 현장 투입 기반을 마련할 예정이다. 구미 사업장에는 휴머노이드 로봇 생산 라인도 갖출 예정이다. 삼성전자는 로봇의 개발과 검증 무대로 자체 제조 현장을 활용할 계획이다. 삼성전자는 그동안 글로벌 최고 수준의 로봇 전문가를 잇따라 영입하며 기술 경쟁력을 높여왔다. 현대차그룹에서 보스턴다이나믹스 운영 전략을 총괄하고 올 5월 삼성전자로 이동한 이동건 부사장은 로보틱스전략팀장으로 선임됐다. 지능형 자율 로봇 시스템 권위자인 김현진 서울대 자율로봇연구실 교수와 휴머노이드 로봇 손 기술 분야 전문가인 김의겸 아주대 기계공학과 교수도 RX 사업추진실로 영입했다. 삼성전자 미래로봇추진단은 올 2월 휴머노이드 로봇 개발을 위한 경력직 인재 채용을 진행하기도 했다. 미국 삼성리서치아메리카와 삼성리서치 중국 베이징연구소에서 로봇 엔지니어를 채용하는 등 해외 연구개발 거점에서도 인재 영입에 나섰다.
업계에선 내년 초 열리는 CES 2027에서 삼성전자가 차세대 휴머노이드를 공개할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다. 지난 1월 CES 2026 현장에서 노태문 대표는 “삼성전자의 생산 거점에서 자동화용 로봇을 우선 도입하고, 여기서 축적한 기술과 역량을 바탕으로 B2B와 B2C 사업으로 확장하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LG전자는 그동안 가사 작업을 수행하는 로봇 개발에 집중해왔다. CES 2026에서 공개된 양팔 홈로봇 ‘LG 클로이드’는 냉장고에서 물건을 꺼내거나 세탁물을 정리하는 등 사람이 하던 가사 작업을 수행하도록 개발됐다. 가정에서의 움직임을 고려해 이족보행 대신 바퀴 기반의 이동 구조를 적용했다. LG전자는 지난 7월 CEO 직속 로보틱스사업센터를 출범시켰다. 연구개발뿐 아니라 사업개발과 영업, 운영을 담당하는 조직을 별도로 꾸린 것이다. 최근 엔비디아와 맺은 업무협약(MOU)은 어쩌면 새로운 휴머노이드 강자의 등장을 알린 신호탄이다.
지난 8월 13일(현지 시간) 구광모 LG그룹 회장은 미국 캘리포니아주 산타클라라 엔비디아 본사에서 젠슨 황 엔비디아 CEO와 만나 로봇·AI 팩토리·모빌리티 3개 분야를 아우르는 전략적 사업협력 업무협약(MOU)을 체결했다. 양 사는 올 들어 최고경영진 회동과 실무 기술 워크숍 등 총 8차례에 걸쳐 협력을 논의해왔다. 지난 6월 서울 여의도 LG트윈타워에서 열린 구 회장과 황 CEO의 회동을 계기로 그룹 차원의 협력이 완성됐다. LG전자는 엔비디아의 개방형 휴머노이드 파운데이션 모델인 ‘아이작 그루트(Isaac GR00T)’와 로보틱스용 안전 시스템인 ‘헤일로스 포 로보틱스’를 기반으로 차세대 이족보행 휴머노이드 로봇을 개발하고 있다. 내년 1분기 공개가 목표다. 이 로봇에는 엔비디아의 ‘젯슨 토르’ 그래픽처리장치(GPU)가 탑재된다. LG전자의 강점도 젯슨 토르를 제외한 휴머노이드 로봇의 핵심 부품을 계열사들이 직접 만든다는 점이다. LG전자가 관절 구동용 액추에이터를, LG이노텍이 센서를, LG에너지솔루션이 고성능 배터리를 맡아 그룹의 역량을 총동원하는 구조다. 수직계열화를 통해 휴머노이드 로봇 제조의 경쟁력을 높일 수 있다. LG CNS의 로봇 플랫폼 ‘피지컬웍스’를 기반으로 로봇 데이터 팩토리 구축을 위한 기술 협력도 추진한다. 올해 안에 바퀴 달린 양팔 로봇 ‘LG 클로이드’를 LG전자의 미국 테네시 공장 세탁기 생산 라인에 투입해 실제 제조 환경에서 실증도 진행한다. 이 결과를 바탕으로 로봇의 성능과 활용성을 고도화하고 향후 공장, 가정, 상업 공간 등 다양한 환경으로 적용 범위를 확대할 계획이다.
지난 8월 18일에는 젠슨 황 엔비디아 CEO의 장녀 매디슨 황 엔비디아 옴니버스·로보틱스 제품 마케팅 수석이사와 핵심 관계자들이 서울 서초구에 구축 중인 LG 양재 데이터팩토리를 방문하기도 했다. 양사 관계자들은 이날 연내 풀 가동을 목표로 구축 중인 데이터팩토리 현장을 확인했다. 이곳은 LG전자가 전 세계에 보유한 제조, 물류 현장, 가전제품을 기반으로 수집한 데이터를 확장하고 학습하는 로봇 훈련 기지다. 현재 ‘LG 클로이드’가 현장에 배치돼 데이터 생성과 수집, 학습을 반복하고 있다. 미국 테네시 세탁기 공장의 생산 라인을 모사한 제조 환경에서 부품을 옮기거나 조립하는 작업도 수행 중이다. 양재 데이터팩토리는 지하 1층부터 지상 3층까지 4개 층, 연면적 1만㎡ 규모로 조성되고 있다. LG전자는 연내 로봇 투입 대수를 수백 대 규모로 늘릴 계획이다.
[안재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