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라는 단어가 뭘 의미하는지에 따라 다른데(지금의 환율 수준은) 위기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그 성격은 과거와 굉장히 다른 것 같다. 성장의 양극화 등을 생각했을 때 안심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다.”
2025년 12월 17일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고착화하는 고환율에 대해 내놓은 설명이다. 그는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사태나 2008년 금융위기를 생각한다”면서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금융위기라는 것에는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는다”고도 덧붙였다.
2025년 9월 말 이후 원·달러 환율은 1400원대를 이어지고 있다. 최근엔 1470~1480원 안팎에서 머무르며 1500원대를 위협하고 있다.
정부도 환율 안정에 쓸 수 있는 수단을 총동원하고 있다. 산업부는 수출기업의 달러 보유실태를 점검하면서 금고에 쌓아둔 달러 환전을 유도하기 위해 정책자금 연계, 세제 감면 등의 대책을 찾고 있다. 금감원은 급증한 서학개미의 해외 주식투자에 대해 증권사 등 금융회사의 외환 투자·송금 관리 실태를 들여다보고 있다. 기재부와 보건복지부는 국민연금 해외투자 전략의 중장기 개편안을 논의하고 있다.
하지만 정부의 외환시장 안정 대책에도 환율 불안은 이어지고 있다. 한미 금리차와 성장률 격차, 증시 매력도 등 경제의 기초 체력(펀더멘털) 개선이 선행되지 않으면, 인위적인 레벨 낮추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강삼모 동국대 경제학과 교수는 “정부가 개입해 일시적으로 환율을 누를 수는 있겠지만, 경제 체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상태에서 1400원 이하로 내려가기는 쉽지 않다”며 “펀더멘털이 많이 흔들렸고, 재정수지 적자 폭도 큰 상황이라 근본적인 체질 개선이 선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외환시장의 한 관계자는 “국내 경제성장 둔화와 장기 저성장 우려 고조 등 구조적 요인에 서학개미의 해외투자 열풍, 대미 현금투자 불확실성 등으로 달러 수급난이 지속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달러 대비 원화약세 기조는 새해에도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대기업과 국민연금, 개인들의 해외 투자가 늘어나면서 달러화 수요 확대 추세를 거스를 수 없을 것이란 분석이다. 박종훈 SC제일은행 수석이코노미스트는 “2025년 원달러 환율은 주식 시장의 호황세와 경상수지 훅자 규모를 고려했을 때 눈에 띄는 모습”이라며 “달러화에 대한 수요가 여전히 견조하게 유지되고 있는 상황이기에 중장기적 트렌드가 될 수 있다”고 평가했다. 1400원대 원달러 환율이 ‘뉴노멀’이 될 수 있다는 것. 원화 약세를 막을 수 있는 최후의 보루로는 국민연금의 투자 포지션 조정 정도가 거론되지만, 이마저도 원 달러 환율을 1400원대 밑으로 끌어내리기는 어렵다는 분석이다.
상승 압력이 누적되며 새해 환율이 1,500원에 닿을 수 있다는 전망까지 나왔다. 한국투자증권은 새해 원·달러 환율을 1350~1500원으로 전망했다. 외환시장이 과열되면 환율이 1500원까지 오를 수 있다는 점을 공식화했다. 문다운 한국투자증권 연구원은 “한번 높아진 환율의 상·하단에 대한 눈높이가 쉽게 내려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며 “내년에도 구조적 환율 상승이 나타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물론 단기적으로 환율이 숨 고르기에 들어갈 가능성은 열려 있다. 시장은 일본은행(BOJ)이 지난 12월 19일 금융정책결정 회의에서 기준금리를 기존 0.50%에서 0.75%로 인상하고, 155엔 안팎에서 거래 중인 엔·달러 환율이 점차 하락할 것으로 점치고 있다. 금리가 낮은 일본에서 자금을 조달해 해외 위험 자산에 투자하는 ‘엔 캐리 트레이드’ 청산 가능성이 커지며, 엔화 매수 수요가 늘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최근 엔화와 동조화 경향을 보이는 원화도 강세를 보일 가능성 높다는 분석이다.
전문가들은 이를 계기로 환율이 완만한 조정 국면에 들어설 수 있다고 전망했다. 조용구 신영증권 연구원은 “새해 초엔 1450원 선을 유지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문정희 KB국민은행 이코노미스트는 “최근 엔화 강세가 제한적인 흐름을 보여 당분간은 1470원대를 유지할 수 있다”면서도 “외환당국이 강한 의지를 보이고, 미국 증시 조정에 따른 해외 증권투자가 감소해 내년 연초엔 1400원대 초반까지 내려갈 수 있다”고 말했다.
다만 2026년 연간 흐름은 갈수록 환율이 오르는 ‘상저하고’ 형태를 띨 것으로 보인다. 앞서 문 연구원은 “한국 경기와 수급 상황이 비교적 우호적일 것으로 예상되는 상반기에 환율 하단과 분기 평균을 낮출 가능성이 있다”며 “연말로 갈수록 미국 경기 회복, 달러화 반등에 따른 구조적 환율 상승 요인이 뚜렷해질 것”이라고 분석했다. KB국민은행 자본시장사업그룹도 최근 보고서에서 “중기적으로 글로벌 달러 트렌드를 추종하며 하락 조정하겠지만 외환보유액 복원력 문제, 원화 외부 충격 민감성, 외환시장 구조적 수급 변화는 불안 요소”라고 예상했다.
고환율은 물가, 수출 등 국가 경제에 직접 영향을 미친다.
앞서 이창용 총재는 “높아진 환율이 다양한 품목의 물가로 전가될 수 있다는 것을 배제하기 어렵다”며 “새해 물가상승률은 2025년과 같은 2.1%로 전망된다”면서도 “환율이 현재와 같은 높은 수준을 지속한다면 물가가 높아질 가능성이 있어 유의해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재계도 고심 중이다.
이번 고환율 국면은 수출 기업에 호재로만 작용하던 과거와 달리, 해외 현지 생산 확대와 원자재·부품 수입 증가 등 산업 구조 변화로 상당수 업종에 악재로 작용한다는 점이 특징이다. 높은 환율 자체보다 예측하기 어려운 변동성이 더 큰 부담이라는 진단도 나온다.
통상 원달러 환율이 높을 땐 석유화학·철강처럼 원자재 수입이 많은 업종이 타격을 받는다. 산업계는 “환율이 10원만 움직여도 영업이익 수십억~수백억원이 흔들린다”며 원가·투자·차입 비용 압박이 동시에 커지고 있다고 호소한다. 고환율이 단기간에 끝나지 않을 경우 산업 전반에 수요 위축·투자 조정·재무 리스크 확산 우려가 크다. 정유 업계를 비롯한 항공 업계, 철강 업계는 직격탄을 받고 있다. 국내 정유 업계는 연간 원유 10억배럴 이상을 전량 해외에서 달러로 수입해 환율 변동에 특히 민감하다. 환율이 10원 오를 때마다 약 1000억원 규모 환차손이 발생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정제마진 둔화까지 겹치면 실적 압박은 더 커진다. SK이노베이션은 최근 분기보고서에서 “3분기 말 기준 환율이 10% 상승하면 법인세 차감 전 순이익이 약 1544억원 감소한다”고 분석했다. 항공 업계 역시 환율 상승에 큰 부담을 체감하는 업종 중 하나다. 통상 항공사 영업비용 가운데 유류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30% 정도다. 유류비를 비롯해 항공기 리스요금, 정비비용, 해외 체류비 등 고정비용을 달러로 결제한다. 환율이 오르면 이 비용이 커진다. 환율이 높아지니 여행 수요가 덩달아 위축된다. 철강 업계는 철광석·석탄 등 원재료 대부분을 수입한다. 포스코는 “환율 10% 상승 시 순이익이 약 5485억원 감소한다”고 밝힌 바 있다. 건설업은 철강·자재 가격 상승에 더해 해외 현장 비중이 높은 기업일수록 외화 차입 부담이 커진다.
반대로 수출 비중이 높은 조선·자동차·반도체 업계는 고환율 수혜를 어느 정도 기대해볼 수 있을 전망이다. 특히 조선 업계는 수혜가 가장 뚜렷하다. HD현대와 한화오션 등 주요 조선사들은 전체 매출 중 대부분을 해외 수주에서 달러로 벌어들이는데 선박 건조 계약을 달러화로 체결하기 때문에 환율이 상승할 경우 원화 환산 매출이 증가해서다. 반면 인건비, 외주비 등에서는 원화 지출이 많다. 특히 한화오션처럼 헤지 비중이 낮은 기업은 환차익이 실적 개선으로 이어질 수 있다. 물론 화물창 기술 로열티나 일부 후판 수입 등 달러 지출도 있어, 순효과는 기업마다 다르다.
국내 대표 수출 업종인 자동차·반도체는 1400원대 이상 환율 환경이 유지되면 유리한 수출 환경이 전개될 수 있다. 유지웅 다올투자증권 애널리스트는 “현대차·기아는 환율이 100원 오르면 연간 영업이익이 각각 2조 2000억원, 1조 3000억원씩 증가한다”며 “제네시스와 팰리세이드의 미국 판매 호조로 환율 상승에 따른 반사이익이 기대된다”고 분석했다.
박상현 iM증권 애널리스트는 “환율 상승이 수입비용 증가로 이어질 수 있지만, 반도체 가격 급등과 함께 관련 기업들의 마진 증가로 이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SK하이닉스는 “원달러 환율이 100원 상승하면 분기 영업이익이 4000억원 증가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식품 기업도 고환율 환경에서 더 많은 이익을 낼 것으로 기대된다. 삼양식품, 농심, 오뚜기 등 라면·식품주 역시 같은 이유로 반사이익을 볼 수 있는 업종으로 꼽힌다. 삼양식품은 수출용 라면을 국내 밀양2공장에서 만들고 있다. 해외 매출 비중이 81%에 달한다.
다만 고환율 국면이 장기간 지속되면 이들 수혜 업종도 역풍을 맞을 위험이 있다. 부품 수입 단가와 물류비가 오르고, 국내 내수 시장은 위축되는 등 새로운 부담을 키울 수 있어서다.
통상 수출 기업은 달러 환율이 오르면 같은 수출 대금으로 더 많은 원화를 받는다. 하지만 최근에는 해외 현지 생산을 확대한 기업이 많다. 특히 자동차·반도체 등 주요 업종은 글로벌 생산량 상당 부분을 해외 공장에서 소화하고 있어, 원화 약세가 수출 가격 경쟁력으로 직결되지 않는다. 이제 막 해외 공장·설비투자를 늘리는 기업의 경우 역시 대규모 장비 반입과 공장 건설비용이 모두 달러로 책정돼 환율 상승 시 투자액이 예상보다 크게 늘어난다.
즉, 환율이 높을수록 수출 기업에 유리하다는 기존 공식은 기업의 글로벌 공급망 재편으로 이미 영향력이 축소됐다.
철광석·원유·곡물 등 핵심 원자재나 부품을 해외에서 조달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주요 자재 비용이 달러로 지출돼 환율이 너무 빨리 오르면 원가와 판매가 관리가 어렵다. 일례로 라면·식품 업종은 주로 수입해온 원재료를 3~6개월 비축한 뒤 사용한다. 특히 라면이나 제과류 등 가공식품에 사용되는 밀·옥수수·대두 등 주요 곡물값이 환율에 반응하기 때문에 환율이 오르면 제품 가격 인상 압력이 커진다. 롯데웰푸드는 환율이 10% 변동할 경우 35억원 규모의 세전 손익 영향이 있고, CJ제일제당도 같은 상황에서 세후 이익이 13억원가량 감소한다고 각각 공시한 바 있다. 라면 수출 비중이 80%를 넘는 기업도 있지만 원재료 부담이 더 크게 작용할 경우 수출 확대 효과가 상쇄될 수 있다.
[김병수 기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84호 (2026년 1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