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전기차·배터리 시장이 전반적으로 침체 분위기를 벗어나지 못한 가운데 미국과 유럽 주요국에 이어 캐나다 등이 중국산 전기차 저가 공세를 견제하고 나서면서 전기차·배터리 종목별 희비가 엇갈릴 것이라는 월가 분석이 나오고 있다. 7월 미국 펜실베이니아에서 대선 유세 도중 총격을 입어 오히려 지지도가 오른 공화당 대선 주자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당선될 경우 중국산 수입품에 관세를 60% 부과한다는 방침을 냈다는 점까지 감안할 때 미국 전기차 기업들이 반사 효과를 입을 것이라는 예상도 따른다. 한편 내연기관 자동차 역시 중국 리스크를 감안할 때 미국 기업들은 하루빨리 중국 시장에서 철수해야 한다는 권고도 눈에 띈다.
전문가들은 전기차 사업 확장에 나선 완성차 기업들이 반사이익을 볼 것으로 내다본다. 트럼프가 11월 미국 대선 승기를 잡자 미국에 생산 거점을 둔 한국 기업들도 향후 정국 변화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임은영 삼성증권 연구원은 “미국과 유럽, 중국이 관세 전쟁을 벌일수록 현대차와 기아는 돈을 벌 수 있다”고 봤다. 두 기업은 중국 판매 비중이 5% 안팎에 불과해 중국 의존도가 낮은 데다, 하이브리드 차량 인기에 힘입어 중국을 제외한 한국·미국·인도 등지에서 80% 넘는 이익을 내고 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따른다.
김성래 한화투자증권 연구원도 “현대차와 기아는 현지 공급망이 이미 구축된 만큼 미국·EU의 관세 조치 영향이 제한적일 것”이라고 예상했다. 현대자동차그룹은 미국 조지아주에 전기차 공장 개장을 준비 중이며 생산 설비를 예정보다 앞당겨 완공할 것으로 기대되는데 트럼프가 당선되는 경우 신규 경쟁자 진입이 어려워질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 기회로 작용할 수 있다.
이런 가운데 월가에서는 뱅크오브아메리카(BofA)를 중심으로 제너럴모터스(GM)와 포드자동차, 스텔란티스 등 미국 3대 간판 자동차기업들이 ‘가능한 한 빨리’ 중국에서 철수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존 머피 BofA 자동차 담당 연구원은 최근 디트로이트에서 열린 자동차언론협회 행사에서 ‘자동차 전쟁’이라는 보고서 발표를 통해 이같이 권고했다.
머피 연구원은 “중국은 더 이상 GM과 포드, 스텔란티스의 주력 시장이 아니다”라면서 “디트로이트 자동차 제조 3사(D3)는 핵심 제품을 개발하고 더 수익성 있는 지역시장에 집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중국에 진출한 미국 기업들은 지정학적 위험과 불확실성에 휘말릴 수밖에 없다는 이유도 따랐다. 이런 경고는 세계 최대 자동차 시장인 중국 시장에서 저가 출혈 경쟁이 치열해지는 한편 비야디(BYD)와 지리자동차 등 중국 자동차 업체들이 미국 견제를 피해 중남미와 중동 등으로 해외 시장 공략에 나선 가운데 나왔다.
GM은 합작사를 포함해 중국 시장 점유율이 2015년 약 15%에서 지난해 8.6%로 낮아졌으며 이는 2003년 이후 처음으로 9%를 밑돈 수준이다. 중국 사업 이익도 2014년 정점을 찍은 후 78.5% 줄었다.
한편 머피 연구원은 전기차 기업인 테슬라의 경우 디트로이트 자동차 3대 기업들과 사정이 다르다고 봤다. 테슬라가 디트로이트 3사에 비해 전기차 부품에서 약 1만7000달러 정도의 비용 우위를 점하고 있어 중국 시장에서도 살아남을 여력을 가지고 있다는 분석에서다.
다만 미국 전기차 기업들은 종목별 희비가 엇갈릴 것으로 보인다. 미·중 갈등 리스크에 따라 반사효과를 입을 수 있고, ‘미국 중앙은행’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올해 9월 이후 금리 인하에 나서는 경우 부채 비용 부담이 줄어들 것이라는 점은 긍정적이지만 한편으로 ‘트럼프 2기 정부’가 출범하는 경우 오히려 악재를 맞을 것이라는 예상이 나오기 때문이다.
일례로 트럼프는 “기후 문제는 과학자들의 사기”라고 말하면서 대통령 재임 시절 오히려 화석 연료 개발 제한을 푸는 정책을 취하는 등 전기차 산업에 비우호적인 것으로 유명하다. 올해 4월 미시간주 그랜드래피즈 유세에서 그는 “임기 첫날 나는 전기차(보조금 지원) 명령 폐기에 서명할 것을 약속한다”라고 말하는 등 전기차 보조금 폐지 발언을 꾸준히 내놓기도 했다. 업계에서 전기차 1대당 최대 7500달러(약 1037만 원)에 이르던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세액공제 보조금이 사라질 수 있다는 예상이 나온 배경이다.
부통령 후보로 지명된 밴스 의원도 전기차에 매우 부정적 입장을 취해왔다. 상원 의원 활동 당시, 전기차 보조금을 없애자고 주장하는 한편 휘발유 차량을 홍보하기 위해 ‘드라이브 아메리칸 액트’(Drive American Act) 법안을 주도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 최고경영자(CEO)는 트럼프 지지자로 나서는 등 트럼프 관련주로도꼽힌다. 머스크는 “트럼프를 지지한다”고 공식 선언한 데 이어 매달 트럼프 진영에 4500만달러(약 624억원)의 정치자금을 기부할 것으로 알려졌다.
머스크는 게다가 지난 6월 16일 자신의 X 계정을 통해 “전기차 보조금을 없애야 한다”고 밝히면서 트럼프 진영 정책 성향과 비슷한 의견을 냈다. 이와 관련해 월가에서는 전기차 보조금 철폐가 테슬라보다는 다른 전기차 업체에 더 큰 타격을 줌으로써 테슬라의 시장 점유율을 높이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댄 아이브스 웨드부시 연구원은 “미국 정부의 전기차 보조금 폐지는 테슬라가 업계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어 경쟁사들과 기술 격차를 더욱 벌리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언급했다.
다만 전기차 보조금 폐지가 테슬라에게 유리하게 작용할지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도 있다. 미국 투자사 구겐하임의 론 제우시코프 연구원은 트럼프와 밴스가 약속하고 있는 전기차 보조금 폐지는 테슬라의 핵심 경쟁력을 갉아먹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편에서는 중국 전기차 기업들도 리스크가 부각된다. 중국 자동차 기업 만리장성자동차(창청차 ·GWM)는 유럽에서 철수한다고 밝혔다. GWM은 이달 8월 독일 뮌헨에 있는 유럽 본사를 폐쇄하고 약 100명의 직원을 해고할 계획이다. 앞서 GWM은 성명을 통해 “유럽 전기차 시장 확보가 어려워지면서 유럽 전략을 조정하고 있다”고 지난 5월 31일 발표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당일 홍콩 증시에서 GWM 주가는 약 9% 급락해 1월 이후 최대 낙폭을 기록했다.
GWM뿐 아니라 다른 중국 자동차 기업들도 미국과 EU 관세 인상 위협에 직면해 있다. 일례로 EU 집행위원회는 지난해 10월부터 중국산 전기차에 대한 반보조금 조사를 시행했다. 중국이 막대한 보조금으로 비야디(BYD)를 비롯한 자국 전기차 저가 공세를 지원해 시장을 장악했다는 판단에서다.
독일 폭스바겐과 메르세데스-벤츠그룹을 비롯한 유럽 자동차 제조업체들은 ‘유럽산 저가 전기차’ 생산에 힘쓰면서 중국 점유율 낮추기에 나섰다. 이런 가운데 6월 말 폭스바겐은 ‘아마존 전기차’로 유명세를 탄 리비안에 오는 2026년까지 50억달러(약 7조원)를 투자할 계획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폭스바겐은 우선 10억달러를 리비안에 투자해 지분을 확보하고, 이후 40억달러를 추가로 투자해 리비안과 합작 회사를 세울 계획이다. 이번 투자로 리비안은 전기 픽업 트럭을 비롯해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개발과 생산을 위한 새로운 자금원을 확보할 수 있게 됐다. 투자 플랫폼 하그리브스 랜스다운의 수잔나 스트리터 자금·시장 책임자는 “폭스바겐의 투자 계획은 전기차 시장 전망에 대한 신뢰를 보여준다”면서 “이런 방식으로 미국·유럽 기업이 협력하면 차량당 비용을 낮추고 중국 전기차 업체 확장에 대한 방어력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평가했다.
김인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