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연교차가 50~60℃에 달한다. 한여름 최고기온이 30℃를 웃도는 날씨는 예삿일이 됐고, 한겨울 최저기온이 영하 20℃ 밑으로 떨어지는 날도 심심치 않게 있다. 한국처럼 사계절이 뚜렷한 지역에서 전기자동차의 주행거리 성능은 늘 시험대에 오른다. 시베리아 고기압이 위세를 떨치는 겨울이 깊어질수록 국내 전기차 차주들의 고민은 하나로 모인다. ‘히터 온도를 조금 더 높여도 괜찮을까.’ 완성차 제조사들은 전기차 신모델을 선보일 때마다 1회 충전 주행가능거리를 넉넉하게 확보했다고 강조한다. 한 번의 완전충전으로 서울에서 부산으로 이동하는 일도 거뜬하다는 부연도 뒤따른다. 다만, 이 주행가능거리가 기온이 25℃ 안팎을 기록하는 따뜻한 봄 날씨를 기준으로 측정된 수치라는 설명은 생략되기 일쑤다. 전기차는 겨울철 주행 성능을 뜯어봐야 그 진면목을 알 수 있다. 이에 매일경제는 국내에 출시된 모든 전기승용차 모델의 겨울철 1회 충전 주행가능거리를 분석했다.
국내에서 전기차를 판매하려는 완성차 제조사들은 판매 가격에 상관없이 환경부 인증을 받아야 한다. 1회 충전 주행거리는 상온(25℃), 저온(영하 6.7℃) 등 2가지 기온 상황에 따라 도심·고속·복합 등 3개 구간별 주행거리를 측정해 ‘상온 도심’부터 ‘저온 복합’까지 총 6가지 결과 값으로 나타난다.
일반적으로 전기차 주행거리를 말할 때는 도심·고속 구간을 합산한 복합 주행거리를 사용한다. 겨울철 주행거리 효율성을 나타내는 지표는 저온 복합 주행거리 대 상온 복합 주행거리 간 비율이다. 복합 주행거리 기준으로, 국내에서 판매되고 있는 전기승용차 가운데 겨울철 주행 효율이 가장 뛰어난 모델은 롤스로이스 스펙터가 꼽힌다. 스펙터는 저온 환경에서 최장 주행가능거리가 380㎞로, 상온 주행거리(386㎞)의 98.4%를 유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스펙터는 기온 변화에 따른 주행거리 성능 차이가 미미한 모델이라는 뜻이다. 환경부의 주행거리 인증을 받은 전체 전기차 가운데 저온 주행거리가 상온 주행거리의 90% 이상을 유지하는 모델은 스펙터, 제네시스 G80 일렉트리파이드(94.9%), 기아 EV6(93.4%), 현대자동차 아이오닉5(93%), EV6 GT(90.9%), 아이오닉5 N(90.9%) 등 6종뿐이다. 겨울철에는 배터리 효율이 떨어지고 난방으로 인한 전력 소모가 커 주행거리가 줄어들지만 이들 모델은 그 격차를 최소화했다. 겨울에 전기차 주행거리가 줄어드는 이유는 리튬이온 배터리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리튬이온은 액체 상태의 전해질을 통해 양극과 음극을 오가며 충·방전한다. 기온이 떨어지면 전해질이 굳고, 리튬이온 이동이 둔해지면서 내부 저항이 커지고 배터리 성능은 떨어진다.
고성능 모델인 아이오닉5 N의 저온 주행효율이 상온 상태의 90% 이상을 기록한 비결은 향상된 BMS(배터리 관리 시스템)에 있다. BMS는 배터리팩 내부의 전압·전류·온도 등 데이터를 읽어내고 배터리 사용 조건을 조절하는 두뇌 역할을 한다. 현대차는 아이오닉5 N에 ‘배터리 사전조절’ 기능을 탑재해 주행 전에 배터리를 적합한 온도로 냉각·예열해 차량이 최적의 주행 성능을 발휘 하도록 했다. 판매 가격이 6억원 이상으로 책정된 스펙터는 제조원가에 구애받지 않고, 차량이 어떠한 환경에서도 일정한 성능을 낼 수 있도록 최고 수준의 열 관리 기술을 탑재했다. 롤스로이스는 스펙터를 개발할 때 북극 빙설, 사막지대 등지에서 영하 40도~영상 50도에 이르는 극한의 온도에서도 차량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는지 확인했다.
국내 판매 전기차들 중 저온 주행효율이 가장 낮은 모델은 메르세데스-벤츠 EQE 350+(53.9%)로 조사됐다. 벤츠코리아 관계자는 “메르세데스-벤츠의 전기차는 가혹한 날씨 환경에서도 운전자가 본인 선호도에 맞게 최적의 실내 온도를 설정할 수 있도록 넓은 범위의 공조 기능을 제공한다”며 “메르세데스 전기차 운전자는 저온 환경에서도 쾌적한 주행을 경험할 수 있다. 이는 모든 환경에서 럭셔리한 주행 경험을 제공하고자 하는 브랜드의 가치를 반영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통상 내연기관차는 고속도로 연비(ℓ당 주행거리)가 도심 연비보다 높게 측정되고, 전기차는 도심 전비(㎾h당 주행거리)가 고속도로 전비보다 더 높다. 엔진과 변속기가 장착된 내연기관차는 2000rpm 이하 조건에서도 효율적으로 고속 주행이 가능하지만, 전기차의 모터는 속력이 빨라질수록 회전수가 늘어나고 에너지 소모량도 커지기 때문이다.
다만 겨울철에는 전기차 전비가 도심에서보다 고속도로에서 더 높게 측정된다. 추운 날씨에 저속으로 주행하는 동안에는 전해질이 굳어 있는 상태라 배터리가 제 성능을 온전히 내지 못하는 탓이다. 고속 주행 시에는 차량에서 발생한 열로 인해 굳어 있던 전해질이 풀리고, 리튬이온 이동이 상대적으로 원활해져 저속 주행 때와 비교해 배터리 성능이 개선된다.
전기차의 1회 충전 주행가능거리를 나타내는 6개 지표 중저온 도심 주행거리는 해당 전기차 모델의 밑바닥 실력을 보여주는 수치라 할 수 있다. 도심 주행과 고속 주행을 병행하는 일상적인 운전 상황에선 환경부가 측정한 저온 도심 주행거리보다 높은 실제 주행거리를 확보할 수 있다.
환경부 인증 결과, 겨울철 도심에서 1회 충전 주행거리가 400㎞ 이상인 모델은 3종뿐이다. 제네시스 GV60(후륜·휠 19인치)이 415㎞로 가장 길었고, 롱레인지 후륜 모델에 19인치 휠과 20인치 휠을 각각 장착한 EV6가 413㎞로 뒤를 이었다.
겨울철 도심에서 최장 주행거리가 300㎞ 이상 400㎞ 미만인 모델은 총 47종으로 집계됐다. 여기서 현대차·기아·제네시스 차량을 제외한 나머지 모델은 12개뿐이다. 브랜드별로 테슬라 7종, 롤스로이스 2종, BMW 2종, KG모빌리티 1종 등이다.
수입 전기차 모델들 중 저온 도심 주행거리가 가장 긴 모델은 테슬라 모델3 롱레인지(386㎞)로 조사됐다. 이어 모델Y 롱레인지(384㎞), 모델X(381㎞), 롤스로이스 블랙배지 스펙터(360㎞), 모델S AWD(359㎞), 모델Y 퍼포먼스(357㎞), 스펙터(344㎞) 순으로 나타났다.
국내에서 가장 많이 판매되고 있는 전기차인 테슬라 모델Y RWD의 저온 도심 주행거리는 249㎞로 테슬라 차량들 중 가장 짧은 것으로 나타났다. NCM(니켈·코발트·망간) 배터리가 장착된 다른 테슬라 차량들과 달리 국내에서 판매되고 있는 모델Y RWD에는 LFP(리튬인산철) 배터리가 탑재됐다. 중국 상하이에서 제조해 국내로 들여온, 보조금 적용 시 4000만원대 후반으로 구매할 수 있는 바로 그 차량이다. LFP 배터리는 NCM 배터리와 비교해 제조원가는 저렴하지만, 에너지 밀도가 떨어지고 이로 인해 전기차 주행거리가 짧다는 게 한계로 지적된다. 한편, 겨울철 도심 주행거리가 가장 짧은 모델은 포르쉐 타이칸 크로스 투스리모 터보(160㎞), 기아 레이 EV(163㎞), 타이칸 GTS(167㎞) 순으로 조사됐다.
환경부의 전기차 주행거리 인증 검사는 전 세계에서 가장 까다롭기로 유명하다. 유럽에선 1회 충전 주행거리가 500㎞ 넘는 것으로 인증을 받은 차량들이 한국으로 수입된 뒤 환경부 인증을 다시 받으면 주행거리가 400㎞ 밑으로 떨어지는 일도 허다하다.
전기차 주행거리 측정 기준은 크게 유럽 방식(WLTP)과 미국 방식(EPA)으로 나뉜다. WLTP 인증은 총 23㎞를 주행한다. 평균 속력은 시속 47㎞, 최고 속력은 시속 130㎞로 차량의 주행 성능을 테스트한다. 고속도로보다는 도심 주행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주행거리 표본이 짧고, 기후 환경이 고려되지 않는 탓에 전기차 모델별로 주행거리가 실제보다 넉넉하게 측정되는 경향이 있다.
미국에선 도심 주행과 고속 주행을 모두 테스트한다. 2가지 주행 모두 배터리 잔량이 0%가 될 때까지 실시한다. 이렇게 주행한 거리에 0.7을 곱해 주행거리를 산정한다. 0.7을 곱하는 이유는 기온이나 주행 환경 등 다양한 변수에 따라 전기차 주행거리가 30%가량 감소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한 것이다.
한국의 환경부는 미국 방식을 참고하되 ‘5-Cycle’이라는 보정식을 적용해 더 가혹하게 테스트한다. 보정식에는 ▲도심 주행 ▲고속도로 주행 ▲최고속·급가감속 주행 ▲에어컨 가동 주행 ▲저온 도심 주행 등 다양한 주행 상황이 포함된다. 상온과 저온에서의 주행거리를 구분해서 측정하는 곳은 주요 국가들 중 한국뿐이다.
환경부의 전기차 주행거리 측정 방식에도 맹점은 있다. 완성차 제조사가 전기차 히터의 최고 설정 온도를 몇 도로 제한하는가에 따라 주행거리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환경부는 전기차 모델별로 저온 주행거리를 측정할 때 히터를 최고 온도로, 최대 풍량으로 작동시킨다. 이때 실내 희망 온도를 30℃ 이상으로 설정할 수 있는 차량과 최고 26℃까지 올릴 수 있는 차량 간 차이는 고려되지 않는다. 수입 전기차들과 비교했을 때 현대차·기아 등 국내 완성차 브랜드의 전기차 모델들이 저온 주행 효율이 높게 측정된 배경으로는 ‘열 관리 기술’이 꼽힌다.
현대차·기아는 전기 모터나 배터리에서 발생한 열을 실내 난방에 활용하는 히트펌프를 전기차에 장착하고 있다. 다른 수입 전기차들도 히트펌프를 장착하고는 있지만, 폐열 회수 효율은 현대차·기아가 더 높다는 평가다. 현대차·기아의 전기차는 주행 시 전기모터, 배터리, 전자장비 등에서 발생하는 각기 다른 온도의 열을 차량 상태에 따라 선택적으로 흡수해 활용한다.
이 밖에도 완성차 제조사들은 전기차에서 난방에 쓰이는 전기를 절약하기 위해 히트펌프 시스템을 포함해 다양한 기능을 개발해 적용하고 있다. 차량에 운전자만 타고 있을 경우 운전석 쪽 바람만 내보내 송풍 모터의 불필요한 전기 사용을 줄이는 ‘드라이브 온리’ 기능이 대표적인 사례다. 겨울철 전기차 주행거리는 운전자의 조작 방법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히터보다는 열선 기능을 활용하는게 추운 날씨에도 주행거리를 늘리는 데 유리하다. 히터 기능을 이용하면 차량 내부에서 열원을 만들어내고 송풍구로 불어내는 작업을 진행한다. 스티어링휠(운전대)과 시트의 열선을 이용하면 공기 온도를 올리는 것보다 배터리 소모가 적다.
[문광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