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경제가 자신감을 되찾았다. 지난 5월 18일 저녁, 모두 합쳐 20조달러 규모의 자산을 주무르는 펀드매니저 수백 명이 주식 시장 개혁과 기업 거버넌스 개선의 약속에 이끌려 일본에 도착했다. 코로나19 팬데믹 이래 도쿄 최대 규모의 투자 콘퍼런스 ‘시틱 CLSA 재팬 포럼’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마침 TSMC, 삼성, 마이크론, 인텔을 비롯한 세계적인 반도체 기업들이 경제안보 관련 우려와 글로벌 공급망 재편으로 인해 상당 규모의 제조시설을 일본에 신설할 수도 있다는 발표도 잇따라 나왔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자신의 고향이기도 한 히로시마에서 G7 정상회담을 열어 각국 정상을 맞았다. 일본은 이번 정상회담에 한국, 인도, 브라질, 베트남의 정상들도 초청했다. 일본 경제와 증시는 이전에도 세계가 분열할 때 성장하고 평화기에 정체되는 패턴을 보여왔다. 냉전이 극에 달한 1960~1980년대 일본 경제는 급성장해 세계 2위 경제 대국으로 떠올랐지만, 옛 소련의 붕괴로 냉전이 종식된 1990년대 초쯤부터 거품이 꺼졌고 이후 침체의 늪에 빠졌다. 1989년 말 3만9000엔에 육박하며 정점을 찍은 닛케이 평균은 2009년 7000엔 선까지 하락했다가 미·중 무역 분쟁이 본격화한 2021년쯤부터 반등을 시작했다.
이지평 한국외대 융합일본지역학부 특임교수는 “엔저에 따른 수익성개선으로 30년간의 구조조정이 마무리 단계라는 인식이 확산하고 있다. 1분기 소비가 확실한 회복세를 보이고 있고, 투자를 통해 성장 활력을 재고하고 경제 체질을 바꿔야 한다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기시다 후미오 총리는 지난 6월 7일 ‘새로운 자본주의 실현’ 회의를 열어 반도체와 배터리, 바이오산업, 데이터센터 등 4개를 전략 분야로 선정했다. 미래 성장산업에 필수적이면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 이후 경제 안전보장상 중요도가 높아진 물자들이다.
일본 정부는 급변하는 국제 정세를 자국 산업의 육성 기회로 보고 있다. 일본 정부는 “선진국들이 지정학적 리스크에 대응하기 위해 부품 공급망을 이전하려는 상황에서 새 투자처로서 일본의 매력이 커지고있다”고 밝혔다. 4개 전략 분야 가운데 일본 정부가 특히 지원을 집중하겠다고 밝힌 분야가 반도체다. 1988년 세계 시장의 50.3%를 차지했던 일본 반도체 점유율은 2019년 10%로 떨어졌다. 2030년에는 반도체 점유율이 0%가 될 것으로 예상되자 일본 정부는 반도체산업을 되살리기 위해 파격적인 정책을 잇달아 내놓고 있다. 실제 일본 정부는 미·중 반도체 전쟁의 틈을 집요하게 파고들며 글로벌 투자 열기를 일본으로 돌리는 데 성공하고 있다.
일본 정부가 내놓는 투자 유치 미끼는 보조금이다. 10년 이상 자국에서 반도체를 생산하는 조건만 지키면 자국 기업이든, 글로벌 기업이든 보조금을 지급한다. 규모는 첨단과 범용 반도체 모두 설비투자의 최대 3분의 1이며, 반도체 장비 및 소재는 최대 50%를 지원한다. 일본이 소재·부품·장비업계에서 아직 주도권을 쥐고 있고, 토요타 등 자동차 제조업체나 소니를 비롯한 글로벌 전자업체 등 반도체 주요 고객사가 다수 모여 있는 상황에서 보조금이 지급되면 비용 절감이 가능해 글로벌 반도체 기업의 투자 결정에 도움을 주게 된다. 마이크론(5000억엔)과 삼성전자(300억엔)가 투자를 결정했고, TSMC는 일본에 추가 공장 설립을 검토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마이크론에 2000억엔, TSMC에 4760억엔, 라피더스에 700억엔 등 막대한 보조금 지원도 서슴지 않고 있다. 반도체 시장의 훈풍은 소니와 덴소 등 일본 기업들의 반도체 투자도 이끌어내고 있다.
일본은 미국과의 공조를 통해 기술력 강화에도 공을 들이고 있다. 지난 30년간 제조 기술 측면에서는 한발 뒤처졌던 만큼 반도체산업의 핵심 경쟁력인 초미세 공정 기술을 확보하기 위해 미국과의 협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미국 인텔과 일본 소프트뱅크 산하의 반도체 설계 회사 ARM은 파운드리(위탁생산) 분야 협업을 발표한 바 있다. 일본 키오시아와 미국 웨스턴디지털의 합병도 논의되고 있다. 미국 중심의 반도체 공급망 구축이라는 미국 정부의 야심에 일본은 핵심 파트너로 동참하며 실리를 챙기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일본산 반도체를 개발하기 위해 일본 정부는 지난해 8월 토요타자동차 등 대표 기업 8곳과 공동으로 라피더스를 설립했다. 라피더스는 2㎚(나노미터, 1㎚=10억분의 1m)급 최첨단 반도체를 양산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일본 정부는 라피더스에 총 3300억엔을 지원한다.
일본은 자국의 반도체 소재, 부품, 장비 산업의 우위도 지렛대로 적극 활용하고 있다. 일본의 전 세계 반도체 장비 시장점유율은 35%로 미국(40%)에 이은 세계 2위고, 반도체 소재는 55%로 1위다. 7월부터 일본은 중국에 고성능 반도체 제조장비 등의 수출을 제한하겠다고 발표했는데, 이 조처가 실제 실행될 경우 중국의 반도체 자립 전략에 타격을 줄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지평 교수는 “일본 정부는 반도체 투자 유치를 비롯해 산업계 전반의 투자 분위기를 살려 새로운 제조업 생태계로 탈바꿈을 시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다만 반도체업계에선 일본 반도체가 단기간에 유의미한 위협이 되긴 어려울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현재 반도체 제조 실력이 40나노 수준인데, 3나노인 한국·대만을 넘어 2나노로 직행한다는 목표가 비현실적이란 것이다. 하지만 미국이 과거와 달리 일본 반도체산업을 육성하려는 자세로 변한 데 따른 영향을 무시할 수는 없다. 반도체업계 관계자는 “일본은 반도체 소재·장비 분야에서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는 만큼, 앞으로 진행 상황을 유의 깊게 지켜봐야 한다”
고 했다.
임금 인상이 진행되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임금 인상은 소비로 이어져 내수 회복에 보탬이 된다. 일본에서는 그동안 임금이 정체되면서 소비와 경제성장에 부정적으로 작용한 측면이 있었다.
올해 춘투(매년 봄에 하는 일본의 임금 인상 투쟁)에서 가중평균 임금 상승률이 3.67%를 기록했다. 이는 올해 민간 소비를 0.6%포인트, GDP를 0.4%포인트 끌어올릴 것으로 추산된다. 물가 변동을 고려한 실질임금은 여전히 마이너스지만, 연말엔 플러스로 전환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물론 임금 인상 한 번으로는 한계가 있으나 기시다 후미오 내각은 새로운 자본주의 정책을 강조하면서 임금 상승을 유도하고 있다. 이지평 교수는 “사실 일본 기업은 과거 20년가량의 임금 동결 등 장기적인 구조조정의 효과로 수익성이 개선되고 있어 임금 인상 여력이 있다”고 평가했다.
실제 일본 기업의 내부유보(이익잉여금)는 2022년 12월 말 기준 536조엔에 달한다. 강철구 배재대 일본학과 교수는 “임금인상이 물가 상승 부담을 조금이나마 덜어주고 있고, 실질임금도 오르고 앞으로 급여가 더 오를 수 있다는 기대도 커지고 있다”며 “이러한 심리적 요인이 현재 일본 경제에 긍정적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전했다.
인구구조 역시 일본에 유리하게 변화하고 있다. 오랫동안 인구 감소와 고령화를 겪으면서 적응 단계에 이른 일본은 2030년이 되면 우리나라와 중국에 비해 양호한 노동력을 보유하게 된다. 지난해 일본의 합계출산율은 1.26명이지만, 0.78명인 한국보다 크게 높은 수준이다. 중국은 도시지역 청년실업률이 20%를 넘어섰지만 일본은 대졸 취업률이 95%에 이르면서 사회적으로 안정된 분위기와 자신감이 일본의 부활에 일조한다. 이지평 교수는 “일본 경제는 글로벌 경제 불안 속에서도 선방하는 등 과거 장기 불황기와 달라진 모습을 보이고 있으나 보다 강력한 성장을 위해서는 저출생과 인구고령화 등 구조적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병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