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하반기부터 국내 주류 시장은 요동치기 시작했다. 맥주 신제품이 출시되면서 더욱 진한 맛 경쟁이 불거지는가 하면 소주는 반대로 도수를 낮추며 ‘연성화’를 거듭하고 있다. ‘부어라 마셔라’ 하며, 폭탄주만 연거푸 들이키던 문화도 점점 바뀌어 술맛을 제대로 느끼려는 소비자들이 늘고 있다.
특히 올해는 집에서 직접 맥주를 제조해 마시는 하우스비어나 스몰비어도 크게 늘어날 예정이어서 선진국형 주류문화가 정착되는 해가 될 전망이다.
보리 100% 올몰트 비어 급팽창
hite 맥주
일단 가장 대중성이 짙은 맥주 시장에선 100% 보리맥주, 이른바 ‘올몰트 비어’가 급팽창하고 있다. 올몰트 맥주는 맥주의 3대 원료인 맥아, 호프, 물 외에 다른 첨가물을 일절 사용하지 않은 100% 보리 맥주로서 맥주 본연의 풍부한 맛과 향이 특징이다. 사실 현재 맥주 시장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건 보리 70~80%의 일반 라거 맥주다. 맛이 순한 데다 소주와 섞어 마시는 ‘소맥 폭탄주’ 수요가 워낙 커 일반 라거 맥주의 인기는 여전히 높다.
하지만 올해는 올몰트 비어가 대거 약진하며 관련 제품을 생산하는 업체 간 경쟁이 뜨거워질 전망이다. 맥주 맛이 진해지고 있는 것이다. 일단 지난해 봄 롯데주류가 처음 맥주 사업에 뛰어들어 올몰트 비어인 ‘클라우드’를 출시했다. 지난해 클라우드의 인기는 실로 대단했다. 국내 대형마트에서 크게 약진한 클라우드는 미국 시장에도 출시돼 11월 첫 수출 2주 만에 2만병이 모두 팔리기도 했다.
미국 현지 한인 대상 언론들도 ‘한인 맥주 시장 클라우드의 경계령’이라는 표현까지 써가며 클라우드 인기를 집중 보도했다. 하이트진로의 올몰트 맥주인 ‘맥스’도 올해는 탄탄한 성장세를 이어갈 전망이다. 국내 최초 올몰트 맥주는 2002년 당시 하이트맥주가 출시한 ‘프라임’ 맥주였다. 하이트진로는 프라임의 맛과 향, 가격을 조정해 2006년 맥스를 출시했다.
맥스는 출시 후 불과 2년 만에 경쟁 브랜드를 제치고 맥주 3대 브랜드로 성장하며 국내 맥주 시장의 판도를 바꾸는 돌풍을 일으켰다. 맥스의 지난해 1~3분기 누적판매량은 약 1124만 상자(1상자=500㎖×20병)로 1046만 상자를 판매한 전년도 같은 기간보다 더욱 늘어났다.
‘크림 생맥주’로 잘 알려진 맥스 상품을 위해 제조사인 하이트진로는 거품 양을 조절할 수 있는 ‘거품 발생 코크주’ 도입 등 품질관리 기준을 강화하고 있다. 특히 매년 세계적으로 품질 좋은 맥주 홉(Hop)을 사용한 맥스 스페셜 홉도 선보이고 있다.
2011년 ‘오비 골든라거’를 내놓은 오비맥주도 최근 해당 제품 생산을 중단하고 새로운 공법의 신제품 ‘더 프리미어 오비’를 전격 출시하면서 올몰트 맥주 경쟁에 기름을 부었다. 더 프리미어 오비는 독일 노블 홉 재료와 독일 황실 양조장에서 키우는 효모만을 사용한 데다 종전 오비 골든라거와 달리 숙성기간을 3배로 늘려 더욱 풍부하고 진한 맛을 내는 게 특징이다.
수입 올몰트 맥주도 잇따라 선보이고 있다. 2011년 이후 일본 기린맥주의 ‘이치방시보리’와 산토리의 ‘더 프리미엄몰츠’ 등 올몰트 맥주가 수입되기 시작했고 ‘크롬바커’ ‘하이네켄’ 등도 인기를 끌고 있다. 올몰트 맥주의 성장은 국내 맥주 시장이 수년째 제자리걸음을 하는 동안 수입맥주 시장이 커지면서 국내 소비자들의 선호도가 점차 다양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기존 라거 맥주도 조금씩 변화를 모색 중이다. 하이트진로는 지난해 4월 대표 맥주 브랜드 하이트를 이름만 빼고 신제품 수준으로 대폭 업그레이드했다. 부드러운 목 넘김과 정통성을 강조한 디자인으로 기존 제품과 차별화했다. 뉴 하이트는 80년 양조기술을 집약해 맥주 품질을 글로벌 수준으로 향상시킨 제품으로 상표 디자인뿐 아니라 제조 공정과 맛, 알코올 도수까지 모든 부문에 걸쳐 새로워졌다.
시장 규모가 작았던 에일 맥주 또한 올해는 더욱 거센 열풍을 몰고 올 전망이다. 일반 라거 맥주가 맥주통 아래쪽에서 효모를 발효시키는 ‘하면 발효’ 방식이라면 에일 맥주는 상면 발효를 통해 탄생한다. 라거 맥주는 알코올 도수가 낮고 색깔도 맑으며 톡 쏘는 청량감이 강해 전 세계 맥주의 80~90%를 차지하지만 에일 맥주는 라거보다 걸쭉하고 알코올 도수도 높아 깊은 맛이 난다.
라거 맥주 시장에서 올몰트가 각광 받는 것처럼 아예 더욱 진한 에일 맥주 인기 또한 뜨겁다. 에일 맥주 전문점으로 등장한 ‘데블스 도어’의 약진이 대표적이다. 신세계푸드가 지난해 말 서울 반포 센트럴시티에 내놓은 이 에일 맥주 전문점은 빠른 입소문을 타며 마니아층을 확보해 가고 있다. 신세계푸드 측은 “소규모 양조장에서 생산한 수제 에일 맥주에 새로운 소비자가 형성되고 있는 만큼 틈새시장 공략에 주력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알코올 도수 18도 선 무너진 소주
하이트진로, 90주년 기념주 진로1924
소주는 한없이 부드러워지고 있다. 업체마다 경쟁하듯 알코올 도수 내리기에 바쁘다. 국내 소주시장 절반을 장악하고 있는 하이트진로는 지난해 말 대표 제품 ‘참이슬’의 알코올 도수를 기존 18.5도에서 17.8도로 낮추며 순한 소주 경쟁에 불을 댕겼다. 지난해 초 19도에서 18.5도로 내린 지 9개월 만에 다시 18도 선까지 무너뜨린 것이다. 경쟁사인 롯데주류도 지난해 2월 ‘처음처럼’ 도수를 2년 만에 19도에서 18도로 낮춘 뒤 다시 10개월 만에 0.5도를 더 낮춰 17.5도까지 내려갔다. 이로써 ‘소주=알코올 도수 25도’라는 공식은 옛말이 되었다. 새로 나온 참이슬은 주조 공법과 블렌딩 기술을 바꿔 알코올 도수를 줄였다. 기존 천연 대나무 활성숯 정제공법보다 대나무숯 사용량을 늘려 목 넘김을 부드럽게 한 것이 특징이다. 대나무 활성숯은 숙취 원인물질인 헥사날 등을 제거하는 데 효과가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하이트진로는 정통 소주 맛을 선호하는 소비자를 겨냥해 기존 ‘참이슬 클래식’ 도수는 20.1도로 유지시켰다.
중장년층이 선호하는 25도짜리 ‘진로골드’에도 변화를 주지 않았다. 특히 이번 참이슬 개편과 함께 증류식 소주인 35도짜리 ‘진로 1924’도 새로 출시해 주목 받고 있다. 이로써 하이트진로는 10도대에서 30도대에 이르는 다양한 소주 제품군을 운영하게 됐다. 이 회사 관계자는 “최근 소주 시장에 젊은 층과 여성 소비자, 건강을 고려하는 애주가 등이 늘며 순하고 깨끗한 소주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고 있다”고 신제품 출시 배경을 설명했다. 무엇보다 알코올 도수가 낮을수록 소주 매출이 증가하기 때문에 업계 간 저도주 경쟁은 갈수록 뜨거워지고 있다. 하나대투증권에 따르면 하이트진로와 롯데주류, 무학 등 소주시장 점유율 상위 3개사의 지난해 상반기 소주 매출은 전년도 같은 기간보다 10% 증가했다. 저도수 소주를 마시면 기존 소주보다 덜 취하기 때문에 소비량이 늘게 된 것이다.
소주 연성화는 이미 1990년대 말부터 조금씩 진행됐다. 1998년 하이트진로가 ‘소주는 25도’라는 공식을 깨고 23도의 참이슬을 출시했으며 2001년 22도, 2004년 21도로 도수를 점점 낮췄다. 특히 지난 2006년 부산·경남지역을 주 무대로 활동 중인 소주업체 무학이 알코올 도수 16.9도의 ‘좋은데이’를 내놓으며 인기를 끌자 저도수 경쟁은 더욱 거세졌다. 2006년 19.8도의 참이슬을 내놓은 하이트진로는 2007년 19.5도, 2012년 19도를 거쳐 지난해 들어서만 알코올 도수를 두 차례 더 낮췄다.
양조장서 바로 빚은 전통술
처음처럼 부드러운-17.5도, 참이슬
최근 주류업계는 직영점을 통해 소비자들에게 신선한 술을 제공하고 이색 주류문화 체험까지 제공하고 있다. 전통주와 맥주, 양주가 대표적이다. 서울 청계천에 있는 ‘느린마을 양조장&펍’은 배상면주가가 운영하는 막걸리 전용 가게다. 이 매장 안에는 막걸리 양조장이 있어 막걸리를 즉석에서 빚어 고객에게 내놓는다. 별도의 가공처리 없이 곧바로 빚어 신선한 맛을 즐길 수 있는 데다 양조과정도 직접 볼 수 있어 입은 물론 눈까지 즐겁다. 물론 기존에도 특정 주류 브랜드를 내세운 매장은 있었지만 대부분 프랜차이즈 가맹점이어서 매장 내부의 독특함이나 이색 서비스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브랜드 직영점에서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내기 시작한 건 역시 전통주였다. 2010년 서울 홍대 앞에 유기농 현미 막걸리 전문점 ‘월향’이 들어선 게 시초였다.
신선한 자체 막걸리를 팔며 젊은 층 사이에서 입소문을 탄 막걸리 직영점은 이듬해 충남 당진 신평양조장의 막걸리 전문점 ‘셰막’과 월향 2호점, 느린마을 양조장&펍까지 더해지며 독보적인 영역을 구축했다. 지방 양조장이 빚는 독특한 전통주점도 인기다.
당진 신평양조장 막걸리를 선보이는 셰막은 신사동 가로수길과 강남역에 매장을 내 젊은 직장인들에게서 인기가 높다. 광화문에 위치한 ‘자희향’도 전남 함평의 자희자양이란 업체가 운영하며 고급 막걸리로 차별화한다. 주류 직영점은 양주로까지 확대됐다.
서울 강남구 신사동과 청담동에는 각각 ‘조니워커하우스’와 ‘메종 페르노리카’가 있다. 국내 양주 수입 1~2위 업체인 디아지오코리아와 페르노리카코리아가 나란히 양주 직영점을 세운 것이다.
특히 지난해엔 맥주도 가세했다. 지난해 7월 롯데주류는 자사 맥주 신제품 클라우드 생맥주를 전문적으로 판매하는 ‘클라우드 비어 스테이션’을 서울 잠실 롯데호텔 지하에 마련했다.
산토리프리미엄몰트 역시 지난해 6월 ‘토리펍’을 홍대 앞에 연 데 이어 부산 해운대 2호점과 서울 여의도 3호점을 잇따라 개장했다. 결국 이 같은 매장이 인기를 끄는 건 단순히 먹고 마시는 술이 아닌, 보고 즐기는 술 문화가 빠르게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배상면주가 관계자는 “주류업체들이 자사 브랜드 중에서도 고급 제품만 선별해 매장을 마련한 뒤 제조과정까지 소비자와 공유하고 있다”며 “최근 브랜드 간 경쟁 심화로 불황을 겪는 업계에 이와 같은 직영점은 신선한 마케팅 전략으로 떠오르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