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을 닫아두세요.”
어느 술집 화장실 창문에 붙어있는 문구였다. 그런데 어느 술집 화장실에는 보통 볼 수 있는 이런 문구에 다른 말이 부가되어 붙어 있었다.
“고양이가 들어와요.”
화장실에서 일보고 있는데, 열린 창문으로 고양이가 불쑥 들어온다면 끔찍할 것이다. 아무리 고양이를 좋아해도 화장실 창문을 타고 들어와 실내에서 고양이가 어슬렁거리고 다닌다면 좋아할 사람이 있겠는가? 실제로 창문이 열려 있을 때 고양이가 그 창문을 타고 들어오는 경우가 얼마나 많이 일어나는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그 창문을 감히 열어 놓는 사람은 없었다. 무조건 창문을 닫으라고 한다면 호기심에라도 창문을 열어 보고 싶은 충동이 생긴다. 혹은 괜한 반발심에 창문을 여는 사람이 생긴다. 하지 말라면 더욱 하고 싶은 사람들이 꽤 있지 않은가? 특히 술에 취한 상태면 더욱 그런 성향은 강해진다. 창문을 열고 닫는 사소한 일이라도 이유를 확실히 알려주어야 한다. 그런데 아무 이유 없이 무조건 어떤 행동을 강제하는 경우가 우리 주위에도 살펴보면 많다.
숟가락과 젓가락을 따로 수거하는 이유
식사하는 사람들이 식사 후에 숟가락과 젓가락을 따로 반납하는 식당이 꽤 있다. 포크와 나이프를 쓰는 경우도 있어서 포크는 숟가락 통에, 나이프는 젓가락 통에 넣도록 한다. 그런데 어떤 식당에서는 그게 반대로 되어 있다. 나이프를 숟가락 통에 넣고, 포크를 젓가락 통에 넣도록 한다. 왜 분리를 하냐고 물으니 설거지를 하는 시간이 절약된다고 한다. 예전에 90년대 중반 어느 대기업의 직원식당에서는 숟가락과 젓가락 분리수거를 통해서 설거지 시간을 30분 단축하여 일년 단위로 계산하니 30억원의 원가절감 효과를 가져왔다는 기사도 보았다.
문제는 사람들이 잘못 넣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전형적인 어느 직원식당에서 식사 후에 식판을 반납하는 절차를 보았다. 식판을 반납하며 놓는 컨베이어벨트가 있고, 그 바로 앞에 숟가락과 젓가락 수거 통이 따로 있고, 그 전에 리사이클 쓰레기 반납통과 휴지 등 일반 쓰레기 반납 통이 있다. 그러니까 식판을 컨베이어벨트에 놓기 전의 짧은 순간에 줄을 선 채로, 곧 뒷사람들에게 시간압박을 받으면서 쓰레기를 리사이클과 일반으로 분리해서 버려야 한다. 이후 숟가락과 젓가락을 따로 집어넣고, 식판을 컨베이어벨트에 올려놓아야 한다. 당연히 ‘아차’하며 숟가락과 젓가락을 제대로 통에 집어넣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예전에 한번 식사 시간에 늦게 가서 식당에서 일하는 분들이 수거된 숟가락과 젓가락을 치우는 것을 보게 되었다. 놀랍게도 분리된 것들을 한통에 몰아서 넣었다. 그럼 왜 분리를 해서 넣도록 사람들에게 작게나마 스트레스를 주는가? 숟가락과 젓가락을 분리해서 설거지를 하면 시간이 절약되기는 한단다. 그런데 사람들이 잘못 넣은 것들을 제대로 분리하려면 시간이 더 든다. 그래서 아예 설거지 전에 숟가락과 젓가락을 분리하는 기계를 설치한 대형식당이 있다고도 한다. 분리기가 설치되어 있고, 설거지 전에 그 단계를 거치는 데도 여전히 분리 통을 따로 마련한 식당들은 어떤 연유일까? 아마도 그 기계가 설치되기 이전에 분리하도록 만들어 놓은 것을 관습적으로 행하고 있을 확률이 크다.
관습적으로 떠받들여지는 ‘신성한 암소’
유사한 에피소드들은 역사 속에서 아주 흔하게 찾아볼 수 있다. 2년 전 이 지면에서도 언급했던 것으로, 프랑스군의 침입 감시 역할을 맡아 도버해협 쪽 영국해안선에서 경계를 섰던 봉수(熢燧)대원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유선통신시대가 열린 이후에도 이들은 자리를 지켰다. 이들의 직무가 봉화를 올리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냥 불 올릴 필요가 없어진 봉화대를 지켰던 것이다. 디젤기관차가 등장한 이후에도 아무 일없이 기관실 안에서 자리를 지킨 석탄화부도 마찬가지 경우이다.
<착각하는 CEO>(유정식 지음, RHK펴냄, 2013)라는 책에 보면 19세기 프러시아 출신으로 독일 통일의 주역인 ‘철혈재상’으로 유명한 비스마르크가 관련된 에피소드 하나가 나온다. 비스마르크가 러시아 대사로 재직하던 시절에 당시 러시아 황제인 알렉산드르 2세를 예방하러 갔다가 궁정 정원의 한적한 곳에서 경비를 서고 있는 군인들 몇 명을 보았다. 특별히 지킬 만한 시설도 없고 해서 무엇을 지키는지, 왜 그곳에 병사들이 있는 것인지 물어보았다. 황제는 물론이고 신하들 아무도 그 이유를 몰랐단다. 꼬박 3일 동안 조사한 결과 그 유래를 알게 되었다. 80여 년 전 겨울이 다 가기 전에 캐서린 대제로 알려진 예카테리나 2세가 창밖을 보다가 언 땅을 뚫고 나온 꽃을 발견했다. 혹여 누가 그 꽃을 꺾을까봐 경비병을 세워 지키도록 한 것이었다. 이후 아무 꽃도 그곳에서 피지 못하고, 이유도 모르는 채 그냥 관습적으로 그곳을 지킨 것이었다. <착각하는 CEO> 책에서는 이런 관습을 힌두교에서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는 암소에 빗대어 ‘신성한 암소’로 비유했다.
신성한 암소는 지금도 우리 주변에서 숱하게 볼 수 있다. 이런 관습은 이유나 환경의 변화 따위를 따지지 않기에 지나치게 철저히 지켜지게 되는 경향이 있다.
예전에 군대에서 병사 한 명이 휴가를 나가서 사고를 치면 바로 그 부대에 휴가전면금지 조치가 내려오곤 했다. 왜 사고를 쳤는지, 개선시킬 대책을 마련하든지 하는 노력없이 무조건 막고 보자는 식이다. 그래서 한동안 아무도 영외로 못나가고 있다가, 견디다 못한 장교들부터 슬그머니 나가기 시작하면서, 유야무야 공식적인 해제조치 없이 번갈아 휴가를 가기 시작하곤 했다. 최근 육사에서 발생한 음주와 성폭력 사고의 후속대책도 얼마나 효과를 발휘할 지 두고볼 일이다.
옛날 초등학교 시절, 하굣길에 애들이 신발주머니를 가지고 싸웠다니까 신발주머니를 두고 다니라는 명령을 내린 선생님도 계셨다. 그 선생님께서는 자신이 직접 내린 결정은 아니었다고 생각하셨을 게다. 애들이 집에 가다가 신발주머니를 가지고 하던 장난이 심해져서 싸우기 시작했다. 그것을 교장선생님이 우연히 보셨는지, 이후에 얘기를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애들이 신발주머니 가지고 장난치거나 싸우지 말라고 하세요.’ 정도 말씀하셨겠지. 그런데 그것이 교감이나 학년주임을 거치면서, 어느 담임선생님은 애들이 아예 신발주머니를 갖고 다니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 시행이 되었다. 2년 전 신라호텔에서 한복을 입으면 식당 출입이 안 된다고 해서 말썽이 났던 적이 있다.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 여러 가지 이유가 나왔는데, 내 추측으로는 위에서 가볍게 한 얘기의 후속조치가 경직되게 만들어지고 시행되면서 벌어졌을 것이다. 설령 한복 치마에 누가 미끄러졌든지, 소매 깃에 음식이 쓸리든지, 촛대가 넘어졌든지 하는 사고는 벌어졌을 수 있다.
그걸 위에서는 한복 입은 손님이 오면 특별히 조심하도록 주의를 주라고 했을 수 있다. 그런데 구두로 한 말이 ‘지시사항’이 되고, 그 이행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서면으로 보고를 해야 된다면, 뭔가 쓸 거리를 만들어야 한다. ‘직원들에게 한복 착용자에 대해 주의토록 지시·교육’ 정도 가지고는 약하다.
‘규정에 추가’ 혹은 ‘규정으로 특별 지시’ 정도는 해야만 뭔가 한 것 같다. 물론 그 규정도 사실은 규정 나름일 것이다. 회사 차원에서 정식으로 번호 매겨 인쇄된 규정이 있을 수도 있고, 내부적으로 ‘팀’단위에서만 마련하여 공유하는 규정일 수도 있다.
지금 와서 그 사건의 이면을 생각해보면 호텔의 조직 분위기와 문화가 어떠한지 그려볼 수 있다. 조직운영의 유연성은 극도로 떨어지고, 당연히 담당자의 재량권이란 것도 아주 제한적이다. 다른 측면에서 보면 일선 담당 직원의 업무에 대한 책임감과 조직에 대한 충성도는 극히 경직된 분위기와 편협한 영역에서 이루어져서 그렇지 높은 점수를 줄 수 있다.
관습적으로 충실하게 일했던 것이다. 그런 조직에서 마케팅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옮긴다고 생각해보자.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Bottom-Up marketing’은 불가능하다. 최고경영층에서 지시가 있어야 한다. 그것도 아주 구체적인 지시가 있어야만 제대로 된 마케팅 활동이 이루어질 수 있는 조직이다. 아주 작은 부분이라도 그것을 왜 해야 하는 것이며, 마케팅 활동과는 어떤 연관성을 가질 것인가, 어떻게 계획을 제시하고 실행하여야 할 것인지를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불편했던 스티브 잡스의 걸음걸이
얼마 전 영화<잡스(Jobs)>를 보았다. 사람들의 기대가 커서 그랬는지 개봉 전의 평은 그리 좋지 못했다. 거의 신격화된 스티브 잡스를 영화에서 담아내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으니 당연할 수도 있다. 기대치를 워낙 낮추어서인지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스티브 잡스가 영욕의 세월을 거쳐서 아이맥과 아이팟으로 화려하게 귀환하기까지의 역정이 그리고 인물 브랜드와 기업 브랜드가 어떻게 씨줄과 날줄로 엮여져 둘 모두에게 성공을 가져다주는지 쓸 만하게 펼쳐졌다. 스티브 잡스 역을 맡은 배우의 연기는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는 것을 느낄 수 있게 훌륭했다. 하지만 눈에 거슬리는 부분이 딱 하나 있었다. 영화에 나오는 잡스의 걸음걸이였다. 팔을 늘어뜨리고 구부정하면서도 크레용팝의 ‘5기통춤’처럼 수직으로 몸을 들쑥날쑥하며 걷는 그 모습이 대단히 불편했다. 당연히 잡스의 실제 걸음걸이가 그랬고, 배우는 충실히 재연했을 것이다. 그런데 왜 불편했을까?
잡스의 걸음걸이가 그랬다는 것을 알지 못한 게 가장 큰 이유인 것 같다. 영화에서 그려진 잡스와 애플의 이야기나 소소한 사건들은 모두 알고 있는 내용이었는데, 잡스의 걸음걸이는 처음 보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사람이 잡스가 걷는 모습을 본 건 프레젠테이션 무대 위에서 몇 걸음씩 옮기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니 잡스의 그 영화에서 보인 걸음걸이는 생소할 수밖에 없고, 그런 생소한 것에 사람들은 거부감을 보이게 마련이다. 굳이 걸음걸이까지 어색하게 흉내 낼 필요가 있었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잡스의 독특한 일면이나 괴팍스러움을 나타내고자 한 의도였을까? 싱크로율이 100%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 같다. <잡스>처럼 실재 인물을 그린 영화나 드라마를 만들 때, 대상 인물의 버릇, 몸짓 등을 세세히 복원하는 데 지나치게 가치를 두는 경우가 많다. 작품을 만드는 근본적인 목적과 이유가 도외시되고, 100% 싱크로가 ‘신성한 암소’처럼 떠받들여지며 본말이 전도되어 버린다.
다시 서두의 술집으로 돌아가서 생각하면 창문을 열지 못하게 하는 이유는 굳이 고양이 때문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 술집이 들어있는 건물 안에서는 어디나 금연인데, 보통 그러하듯이 화장실에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 꽤 있다.
특히 창문이 열려 있으면 환기가 잘 된다고 생각을 해서인지 몰래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 늘어난다. 물론 화장실 내 금연 안내문이 걸려 있기는 하지만, 그런 안내문 따위는 무시하고 화장실에 들어선 흡연자들은 그래도 약간은 꺼림칙하여 공기가 잘 통할 것 같은 창문 근처에 서기 마련이다. 자연스럽게 고양이가 불쑥 들어올지 모른다는 창문에 붙은 경고문을 보게 되고, 입에 물었던 담배를 다시 담배갑에 집어넣게 되지 않을까? 물론 그런 경고문 따위는 무시하고 금지된 흡연을 하는 이들도 있다.
현실적으로 술집 화장실에서의 금연을 모든 흡연자들이 지킬 수는 없다. 규정 따위야 무시하고 흡연을 마음먹었던 사람들의 소수라도 흡연을 자제하게 만드는 것만으로도 효과적이었다고 자부할 수 있다. 행동지침을 포함한 메시지에는 이유가 있어야 한다. 근본적으로 왜 그런 행동을 하여야 하는가 생각하게 만들고 이해하도록 유도해야 한다. 주입식이 아닌 자연스럽게 깨우치도록 하는 것이 더욱 효과적임은 말할 나위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