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평론가 윤덕노의 음食經제] 조선시대에는 쌀 세 가마 값? 부자들 별미에서 시작된 비빔밥
입력 : 2021.07.05 16:04:40
수정 : 2021.07.05 16:23:36
“비빔밥은 아무리 먹어도 질리지 않는다(骨董吾無厭).”
<성호사설>로 유명한 18세기 조선 영조 때의 실학자 이익이 한 말이다. 비빔밥 마니아의 개인적 입맛으로 치부해 버릴 수도 있지만 어찌 보면 한민족의 식성을 대변한 말일 수도 있다. 실제 한국인은 비빈 음식을 유독 좋아한다. 밥은 물론 국수도 비비고, 심지어 국물까지 비빈다. 그래서 국에다 밥을 만 국밥에 김치 국물, 깍두기 국물을 부어 비빔 국물을 만들어 먹는다.
이토록 비빈 음식을 좋아했기에 우리는 옛날부터 비빔밥이 발달했다. 재료에 따라, 그리고 지역별로 다양하고 특색 있는 비빔밥이 많았다. 순조 때 실학자 이규경이 <오주연문장전산고>에 사람들의 기호에 따라 진미(珍味)로 여기는 비빔밥이 서로 다르다면서 갖가지 비빔밥을 소개했다. 그중에는 지금은 낯설게 보이는 비빔밥도 적지 않다. 예컨대 숭어회, 갈치회, 준치회를 고추장이 아닌 겨자장(芥醬)으로 비빈 이른바 ‘생선회비빔밥’이다. 지금의 회덮밥과 비슷하지만 초고추장이 아닌 겨자장으로 비볐으니 맛은 크게 달랐을 것 같다. 회덮밥은 흔히 일식집에서 먹기에 일본 음식의 변형으로 생각하지만 <오주연문장전산고>의 기록으로 보면 우리 전통음식이었을 수 있다. ‘전어구이비빔밥’, 새우 또는 새우가루로 비빈 ‘새우비빔밥’, 황해도 황주 특산물인 ‘새우젓비빔밥’에 ‘새우알비빔밥’도 있다. 지금 알밥의 원조쯤 될 것 같다. ‘게장비빔밥’은 지금도 흔하지만 ‘마늘비빔밥’에 ‘생오이비빔밥’, 기름에 재서 구운 ‘김가루비빔밥’, 산초가루를 넣고 비빈 것으로 보이는 ‘미초장(美椒醬)비빔밥’, 볶은 콩으로 비볐다는 ‘콩비빔밥’까지 있었으니 조선은 실로 비빔밥 왕국이었다.
비비는 재료만 상식을 넘었던 것이 아니다. 지역별로도 독특한 특산 비빔밥이 이름을 떨쳤다. 예를 들어 지금은 ‘전주비빔밥’이 한국을 대표하지만 19세기에는 평양의 ‘채소비빔밥’이 유명했다. 냉면, 소주인 감홍로와 더불어 평양 3대 명물로 꼽았는데 레시피는 밥 위에 볶은 소고기와 갖은 채소를 얹은 비빔밥이라고 했다. 요즘 흔히 먹는 채소비빔밥이 ‘평양비빔밥’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싶다.
근대에 소문났던 비빔밥은 ‘진주비빔밥’이다. 1929년 발행된 잡지 <별건곤>의 팔도명물음식 예찬에 비빔밥의 대표로 꼽혔다. “서울비빔밥 같이 큰 고기 점을 그대로 올려놓은 것과 콩나물 발이 세치나 되도록 넝쿨지게 놓은 비빔밥과는 비교할 수 없는 맛”이라는 것이다. 진주비빔밥은 흰쌀밥에다 숙주나물, 고사리, 도라지, 산채 나물 등 갖가지 채소로 색을 조화시키고 그 위에 육회를 올려놓아 화려하기가 그지없어 꽃밥이라는 뜻의 화반(花飯)이라고도 불렀다. 황해도의 ‘해주비빔밥’은 1925년 출간된 <해동죽지>에서 전국 유명 음식으로 꼽은 별미 비빔밥이다. 특징은 밥을 볶은 후 버섯, 도라지, 고사리, 해삼, 전복, 조개, 닭고기, 계란 등을 얹어 비벼 먹는 음식으로 밥 속에 산해진미가 다 담겨있는데 “맛이 기이하다(奇品)”고 평했다.
현대 한국 비빔밥의 대표인 전주비빔밥은 조선과 근대 문헌에는 기록이 거의 보이지 않기에 현대에 들어 유명해진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전주 향토음식이었던 콩나물밥이 현대에 전주 한정식에 편승해 관광 상품화되면서 대표 비빔밥으로 발전한 것으로 보고 있다.
▶전주비빔밥은 ‘꽃밥’으로 불려
조선시대에는 비빔밥이 왜 그토록 다양하고 화려하게 발달했을까? 지금의 상식과 달리 비빔밥은 옛날 부자들의 별미 요리였기 때문일 수도 있다. 옛날 비빔밥이 얼마나 호화로웠는지는 영조 때 문헌 <낙하생집>의 기록에서 엿볼 수 있다.
“허리띠 값이 부자가 여름에 먹는 골동반(비빔밥) 한 그릇과 같은 값으로 600전에 달한다.”
시중 물가를 비빔밥과 비교하며 사치풍조를 비판한 것인데 당시 600전이 어느 정도의 가치였는지 그리고 부자들이 먹었다는 비빔밥이 어떤 재료를 넣어 만든 것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한 세대 후에 나온 정약용의 <경세유표>에서 1만 전은 100냥으로 쌀 20섬 값이라고 했다. 이 기준으로 보면 600전은 6냥으로 쌀 3섬 값이다. 화폐가치가 그때그때 달랐던 조선 후기였기에 정확한 비교는 할 수 없지만 어쨌든 기록에 나오는 비빔밥이 상식을 넘는 비싼 가격이었던 것은 틀림없다. 비빔밥이 흔한 음식이 아니었다는 것은 조선 초, 세조 때의 공신, 홍윤성의 일화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인조 때 문헌 <기재잡기>에 나오는 내용이다. 세조의 총애가 두터웠던 홍윤성의 세도를 믿고 방자하게 굴던 하인을 포도대장 전림이 잡아들였다. 그러자 홍윤성이 권력 눈치를 보지 않는 좋은 인재를 만났다며 술과 밥을 대접했는데, 이때 차린 음식이 비빔밥이었다. 인재에게 대접한 음식이었으니 아무렇게나 만들어 먹었던 음식은 아니었을 것이다.
고종 때 경상도 함안부사를 지냈던 오횡묵이 쓴 <총쇄록>이라는 일기에도 계곡으로 나들이를 갔을 때 하인을 시켜서 꽃을 꺾어 화전을 지지고 준비해간 골동반으로 식사를 했다는 내용이 보인다. 골동반은 비빔밥으로 조선의 양반들은 나들이 음식으로 골동반(비빔밥)을 준비했던 것이다.
▶19세기 말 요리책 <시의전서>에서 처음 등장
그러고 보면 현대에 비해 옛날 비빔밥은 오히려 고급요리에 가깝다는 느낌이 드는데, 어쩌면 여기서 우리 비빔밥의 뿌리를 찾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이것저것 넣고 대충 비비면 그만이지 비빔밥에 무슨 역사가 있을까 싶지만 비빔밥이 그렇게 간단한 음식은 아니었을 것이다. 비빔밥의 기원에 대해서는 궁중음식에서부터 농번기음식, 제사 후 먹는 음복 음식, 심지어 연말 묵은 음식을 처리하며 먹었던 음식 등등 다양한 기원설이 있다. 비빔밥은 언제 어떻게 생겨난 음식일까? 옛 문헌에서 비빔밥이라는 단어는 19세기 말 <시의전서>라는 요리책에 처음 한글로 ‘부밥’이 나온다. 한자로는 ‘골동반(骨董飯)’이라고 표기했다. 그러면 비빔밥 역사가 100년 남짓밖에 안됐나 싶겠지만 그건 절대 아니다. 한글 이름이 이때 처음 등장했을 뿐이다. 비빔밥을 한자로 표기한 골동반이라는 음식은 조선 초 내지 고려 때인 11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골동반은 골동품이라고 할 때의 골동이라는 단어를 쓰는데 사전적으로 골동(骨董)은 오래된 것이나 희귀한 옛날의 도자기, 예술품이다. 하지만 ‘여러 가지 자질구레한 것이 한데 섞인 것’이라는 뜻도 있다. 그러니까 골동반(骨董飯)은 다양한 재료를 한데 섞어 놓은 밥이라는 뜻이 된다. 동양에서 골동반이라는 음식 이름이 처음 보이는 것은 11세기 중국 송나라 시인 소동파의 <구지필기>다. 소동파는 “밥 속을 파헤쳐 가며 먹는다”고 했으니 밥 속 깊숙한 곳에 젓갈이나 회, 구이 등의 각종 재료를 묻어 꺼내어 먹거나 비벼 먹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우리 문헌에는 15세기 때 사람인 홍윤성이 포도대장에게 비빔밥인 골동반을 대접했다는 기록을 포함해 조선 초 문헌부터 골동반이 눈에 뜬다. 골동반이라는 같은 이름을 쓰니 혹시 비빔밥도 중국이 원조라고 주장할지도 모르겠다. 김치는 물론 중국 고문헌에 비차(飛車)가 보이고 축국(蹴鞠)이 보이니 비행기와 축구의 원조가 중국이라고 떠드는 자(者)들이다. 어쨌든 골동반이라는 음식이 등장한 것은 조선 초지만 문헌에 보이는 빈도로 봤을 때 비빔밥이 제삿밥이나 손님접대 고급요리에서 벗어나 중산층에서 먹는 대중 음식으로 자리매김한 것은 조선 후기일 가능성이 높다.
비빔밥의 기원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상식적으로 그리고 문헌기록을 볼 때 조선시대 이전부터 생겨난 비빔밥은 고급음식에서 비롯돼 발달했을 것이다. 지금은 각종 나물과 김치, 고기, 생선 등을 넣고 아주 쉽게 비벼 먹을 수 있지만 조선시대 초기만 해도 고기와 생선은 말할 것도 없고 배추김치도 드물었다. 나물도 양념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을 것이다. 더욱이 고추장은 18세기에나 등장하니 조선 중기 이전에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밥을 맛있게 비빌 수 있는 재료가 소중했던 시절이니 비빔밥이 지금처럼 아무렇게나 먹을 수 있는 음식은 아니었다. 비빈다는 것 자체가 별미였을 것이고 이런 비빔밥이었기에 아무리 먹어도 질리지 않는다는 말을 했을 것이다. 한국의 대표음식 비빔밥에 담긴 내공이 보통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