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주의자이자 법 앞의 평등, 소유권 불가침을 주창한 법치주의자, 혁명의 계승자라는 평가와 함께 노예제를 부활시킨 인종차별주의자, 여성의 참정권을 제한한 여성혐오자라는 평가를 동시에 받고 있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eon Bonaparte, 1769~1821)가 세상을 떠난 지 올해로 200년이 됐다. 인간의 삶을 되돌아볼 때 명과 암이 교차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나폴레옹처럼 그 평가가 극과 극으로 나뉘는 예도 드물 것이다. 그의 서거 200주년을 맞아 많은 전시와 행사로 프랑스의 영광을 상기시키고자 하지만 축제와 추모의 분위기가 커질수록 한편으론 전쟁광에 문화적 약탈자라며 반추모의 분위기 또한 뜨겁다. 사실 나폴레옹 사후에 그에 관한 책이 약 8만5000권이나 나올 정도로 평가와 관계없이 세상 사람들의 관심을 받아왔다. 또 그의 16년간의 프랑스 통치가 없었다면 오늘날의 프랑스는 없었을 것이라는 평가도 일반적이다. 하지만 역시 프랑스 대혁명으로 이뤄낸 공화정을 제정으로 되돌려놓은 과오 때문에 배신의 아이콘이기도 하다.
그는 전쟁광이자 문화적 약탈자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오늘날 루브르박물관의 기반을 마련했다는 공도 지니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박물관 중 하나이며 관람객이 연간 1000만 명이 넘는 루브르는 나폴레옹의 문화적 정복욕과 탐욕이 큰 역할을 했다. 이런 약탈의 역사가 일궈낸 박물관은 루브르에 국한된 것은 아니다. 영국의 영국박물관의 ‘엘긴마블’은 원래 ‘파르테논 마블’이다. 아테네 파르테논 신전의 벽면 조각들을 영국의 부르스 엘긴(Thomas Bruce Elgin, 1766~1841)이 뜯어온 것이다. 독일의 페라가몬박물관도 고대부터 헬레니즘에 이르는 조각과 그리스 및 로마 고대의 예술품, 이슬람과 중동의 시장이나 제단을 그대로 뜯어다 놓은 박물관이다.
베로네세의 <가나의 결혼식> (1563) 유화 677x994㎝ 루브르미술관 소장
루브르가 소장한 미술품 중 가장 큰 그림으로 베니스의 산 조르지오 마조레 섬에 있는 베네딕트 수도원의 식당에 걸렸던 작품이다. 1797년 나폴레옹이 약탈해온 그림으로 운반 시 너무 커 그림을 반으로 잘라 다시 붙여 현재 루브르의 모나리자 맞은편 벽면에 전시되어 있다. 자세히 보면 중간에 이은 자국을 찾을 수 있다. 원 소장처인 베니스에는 사본이 걸려 있다.
루브르는 1193년 외적의 침입을 막을 목적으로 세워진 요새였다. 이곳은 평시에는 감옥이나 재물, 무기, 고문서, 그림이나 보석 등을 수장하는 공간으로 쓰였다. 그 후 1386년 샤를 5세가 시테섬을 나와 루브르를 왕궁으로 개조했지만 ‘백년전쟁’에서 패배한 샤를 7세는 루아르의 쉬농소성에 기거했다. 1546년 루브르궁으로 돌아온 프랑수아 1세는 음침한 요새를 헐고 르네상스풍의 궁전을 새로 지었다. 이후 앙리 4세, 루이 13세, 14세를 거치면서 400년 동안 변모를 거듭해 오늘에 이르렀다. 그 후 100여 년간 잠시 사람들의 이목을 받지 못했지만 혁명기에는 프랑스 아카데미가 100년간 사용하면서 프랑스의 과학, 문화, 예술의 중심이 되었고, 1789년 프랑스 대혁명 이후, 혁명정부가 루브르궁을 정부청사로 사용했다. 이후 프랑스 대혁명과 함께 왕실과 귀족의 소유물을 대중과 나눈다는 의미로 1791년 5월 국회는 “모든 과학과 예술의 기념물을 모으는 장소”를 만들 것을 선언하고, 1792년 루이 16세가 투옥되자 국유화된 왕실컬렉션 537점의 그림과 184점의 공예품을 바탕으로 1793년 루브르궁에 중앙박물관(Museum Central des Arts de la Republique)을 개관해 누구나 무료로 입장해 진귀한 작품을 관람하도록 했다.
루브르는 ‘예술과 천재의 고향, 자유와 신성한 평등의 고향인 프랑스’가 유물을 관리하는 것이 옳다는 이유로 약탈을 정당화했다. 1794년 톨렌티노 조약을 통해 바티칸의 라오콘과 아폴로 등 유물을 확보하면서 박물관의 소장품은 확장되었고, 1802년 종신통령이 된 나폴레옹은 1803년 루브르박물관의 이름을 나폴레옹박물관(Musee Napo leon)으로 바꿨다. 1815년 자유·평등·박애의 혁명정신을 버리고 왕보다 더 지체 높은 황제, 즉 나폴레옹 1세로 즉위해 루브르에 기거하면서 전쟁에서 약탈해온 각종 유물을 전시해 소장품의 숫자는 물론 질도 급격하게 높아졌다.
특히 나폴레옹은 이집트원정을 떠나면서 167명의 학자와 예술가들을 데리고 출병해 다양한 연구를 수행함과 동시에 엄청난 양의 고대 이집트 유물들을 수집할 수 있었다. 하지만 1801년 워털루 전투에서 영국군에 패하면서 프랑스는 로제타석을 비롯한 대량의 이집트 유물을 영국에 넘겨주어야 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이미 스페인,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이탈리아의 문화재 미술품을 전리품으로 루브르에 귀속시킨 뒤였다. 이후 프랑스는 1814년부터 스페인과 오스트리아, 벨기에, 프로이센에 약탈유물을 반환했다. 하지만 많은 이유로 반환은 지체되면서 절반 이상이 프랑스에 남았고 지금도 여전히 반환요구가 그치지 않고 있다. 이렇게 약탈유물의 반환이 이루어진 1815년 이후 유럽에서의 박물관은 더 이상 단순한 유물의 보고나 전시장이 아닌 정치적, 문화적 힘의 상징이 되었다.
자크 루이스 다비드의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 (1801) 유화 260x221㎝
새로텐버그 궁전 베를린
반환 이후 루이 18세와 샤를 10세는 구입과 기증을 통해 다시 큰 규모로 소장품을 늘렸고, 나폴레옹 3세가 통치하던 제2제국 당시 2만여 점이 추가되었고, 제3공화국 때부터 기증의 형태로 지금까지 소장품의 규모는 계속해서 커졌다. 루브르는 이때까지 초기 박물관의 형태인 독일의 ‘경이의 방’이란 의미의 분더카머(Wunderkammer)나 프랑스의 ‘호기심의 방’이란 의미의 카비네 드 큐리오지테(Cabinet de Curiosite), 이탈리아의 스투디올로(Studiolo)라는 형식의 온갖 신기하고 진귀한 예술품이나 이국의 낯선 물건, 동식물의 표본 등 호기심을 자극하는 모든 것을 모은 곳으로 루브르라는 큰 우산 아래 여러 박물관이 모여 있는 형태였다. 하지만 18세기 이후 체계적인 분류가 필요했고 그래서 새롭게 근대적 의미의 박물관 형태로 진화하기 시작했다. 19세기 말부터 루브르는 근동과 프랑스, 서양문화에 집중하는 박물관으로 선택과 집중의 방식을 택한다.
루브르는 1887년 멕시코 등 남미의 유물과 루브르 2층에 있던 해양박물관의 비서양유물들은 트로카데로박물관(Musee d’ Ethnographie du Trocadero)과 생 제르맹에 있던 국립고고박물관과 퐁텐블로궁전의 중국박물관으로 이관했다. 또 해양 관련 유물은 1943년 샤오궁(Palais de Chaillot)의 인류학박물관과 해양박물관으로 분가를, 1945년에는 아시아컬렉션을 기메박물관(Guimet Museum)으로 보냈다. 그리고 1922년 처음으로 이슬람관을 열었다. 이후에도 박물관의 고도화와 전문화를 위해 1991년에 19세기 인상파를 모은 근대미술관 오르세(Musee d’Orsay)를 개관했고, 2006년 미주, 아프리카, 아시아 및 오세아니아의 유물을 다루는 새로운 퀘 브랑리박물관(Quai Branly Museum)의 문을 열어 각각의 대통령 재임 시 1개의 전문박물관이 새로 설립되는 전통을 지켜오고 있다. 2019년 연례보고서에 의하면 현재 루브르는 61만5797점의 유물을 소장하고 있으며, 이는 이집트, 중동, 그리스·에트루리아 로마, 이슬람, 조각, 장식미술, 회화, 판화 및 드로잉의 8개 부서로 나뉘어 관리되고 있다. 여기에 최근 228년 만에 처음으로 임명된 여성 관장 로랑스 데 카르가 비잔틴과 곱트예술분과(Byzantine and Coptic Art Depart ment)를 신설하겠다고 밝히면서 총 9개 부서, 즉 9개의 박물관이 루브르라는 이름 아래 존재하게 됐다.
근대국가, 즉 국민국가를 목표로 했던 프랑스 혁명의 성과로 탄생한 루브르는 처음부터 프랑스의 영광과 문명국가로서의 위상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처음에는 ‘국가의 기억을 보존하기 위한’ 위원회의 결정으로 박물관을 만들고 전시를 시작했다. 물론 오늘날의 루브르가 있기까지는 나폴레옹의 문화적 성취욕에서 비롯된 약탈이 바탕이 되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박물관학의 성립과 발전, 문화재 보수와 복원 분야의 발전, 그리고 열악한 환경에서 문화재를 구했다는 성과를 고려할 때 나폴레옹이란 한 사람의 평가가 입장과 관점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박물관과 미술관도 나폴레옹처럼 이중적인 의미를 지닌 공간이다. 하지만 역사를 부정하지도 후회할 필요도 없이 ‘국가와 국민의 기억을 보존한다’는 의미에서 박물관과 미술관을 대했으면 한다. 그리고 박물관과 미술관은 국력의 상징이자 국격의 표상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어디에 미술관, 박물관을 지을 것인가 하는 토목공사형 논란에 앞서 어떤 유물 즉 문화적 자산을 토대로 우리 공동체의 기억을 보존할 것인가를 먼저 고민하고 답을 구해야 제대로 된 미술관, 박물관을 보유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의 루브르는 나폴레옹의 힘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해석하고 연구한 지혜로운 후손들과의 합작품이란 것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