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우리나라 소비자들의 미국 와인 소비가 크게 늘었다. 통계에 따르면 오는 9월까지 미국 와인의 수입은 금액 기준으로 55.7% 증가하였다. 이는 시장 점유율 1위와 2위로, 각각 2.5%, 7.6% 성장한 프랑스와 칠레 와인과 비교해 뚜렷하게 차이를 보이는 수치이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미국 와인은 이탈리아 와인을 제치고 시장점유율 3위로 올라서게 되었다. 최근 미국 와인의 소비가 저가 와인이 아닌 프리미엄 와인을 중심으로 증가하고 있다는 것도 흥미로운 특징이다. 과거에는 고급 와인은 당연히 프랑스, 특히 보르도 와인이라는 의식이 강했다. 좋은 와인을 마시는 자리에는 으레 히딩크 와인으로 불리는 ‘샤토 탈보’나 ‘샤토 린쉬 바즈’와 같은 보르도 와인이 빼놓지 않고 등장하였다. 당시 미국 와인 소비는 콩코드 와인이 주도하였는데, 콩코드라고 불리는 북미 자생포도로 양조하여 설탕을 첨가한 스위트 와인이다. 콩코드 와인은 와인 애호가들이 좋아하는 달지 않은 드라이 와인과는 많은 거리가 있다. 하지만 최근에는 ‘케이머스’ ‘바소’ ‘오퍼스원’ ‘텍스트북’ 같이 미국 샌프란시스코 인근의 나파 밸리(Napa Valley)에서 생산된 프리미엄 와인들이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이는 유럽이나 혹은 다른 아시아 국가에서 보기 힘든 독특한 현상이다.
와인은 문화적인 상품이다. 명품처럼 소비자들은 품질 외에도 제품이 가진 아이덴티티와 메시지를 중요하게 여긴다. 와인에 있어서 메시지는 주로 와인이 생산된 원산지와 큰 연관이 있다. 가령 중국 와인의 품질이 지난 10년간 큰 발전을 이루었고 현지에서는 수십만원이 넘는 와인들이 소비되지만 아직까지는 다른 나라에서 찾아보기 쉽지 않았다. 아마도 중국이 가지고 있는 가짜나 저가 공산품의 이미지 때문일 것이다. 대체적으로 유럽이나 일본에서는 물론이고 자국을 벗어난 해외 시장에서 미국산 프리미엄 와인은 유럽 와인에 비해 인기가 없다. 그렇다고 미국산 고급 와인의 품질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스크리밍 이글’ ‘할란’ 등의 나파 밸리 와인들은 프랑스 1등급 와인들과 비교하여도 품질이 떨어지지 않는 와인들이다. 다만 전통이라는 아이덴티티를 선호하는 와인 애호가들에게 미국의 현대적인 이미지는 약간의 디스카운트 효과가 있는 것 같다. 특히 와인 경매 시장에서 좋은 조건에 거래되는 와인들은 미국 와인보다는 주로 유럽 와인들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소비자들은 미국 와인을 선입견 없이 받아들이는 편이다. 어쩌면 미국에서 공부한 사람들이 많고 문화·경제적인 교류가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생각해 보면 우리나라 와인 애호가들은 미국 나파 밸리 와인 이전에 칠레 프리미엄 와인을 선입견 없이 받아들였다. 그전부터 칠레와 많은 교류가 있던 것도 아니다. 미국이나 호주와 비교해도 프리미엄 와인의 역사가 짧은 칠레 와인을 오로지 ‘품질’만으로 받아들인 것을 보면, 우리나라 소비자들은 매우 현명하고 실용적이다.
프랑스 보르도, 칠레, 그리고 미국 나파 밸리로 이어지는 우리나라 프리미엄 와인의 유행은 얼핏 달라 보이지만 하나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바로 카베르네 소비뇽이라고 불리는 포도를 중심으로 한 보르도 블렌딩 와인이라는 점이다. 칠레 프리미엄 와인은 처음부터 프랑스의 영향을 받아 보르도식 블렌딩이 대세였으며, 우리나라에서 인기 있는 나파 밸리산 프리미엄 와인들은 주로 카베르네 소비뇽만으로 만든 와인들이다.
샤토 라피트 로칠드 프리미어
와인은 카베르네 소비뇽 외에 시라, 메를로 등으로 불리는 서로 다른 포도를 블렌딩하거나, 지역이나 전통에 따라 한 가지의 포도를 사용해서 만든다. 물론 토양과 기후에 따라 잘 자라는 포도가 다르기도 하지만, 와인을 만드는 입장에서 볼 때 포도품종에 따라 가장 큰 차이는 열매가 익는 속도가 다르다는 점이다. 예를 들자면 보졸레 누보는 매년 11월 셋째 주에 출시하는 와인이다. 양조 과정을 거쳐 세계 시장에 유통되는 다양한 과정을 고려할 때, 10주 전인 9월 초에는 수확이 끝나야 한다. 다행히 보졸레 누보를 만드는 가매라는 포도는 이런 납기일정에 맞추어 수확할 수 있는 품종이다. 반면 와인 애호가의 입장에서 서로 다른 포도로 만든 와인은 마치 서로 다른 성격을 가진 친구들과 같다. 시라 같은 포도로 만든 와인은 진하거나 맵고, 메를로로 만든 와인은 대체로 부드럽다. 가매로 만든 와인은 바로 따서 마셔도 맛이 있지만 어떤 포도로 만든 와인들은 최소 30분 이상 열어 놓지 않으면 그 맛을 느끼기가 힘들다. 카베르네 소비뇽은 메를로와 함께 세계에서 가장 많이 재배되는 포도 품종으로, 와인을 만드는 농부의 입장에서, 그리고 와인을 즐기는 소비자의 입장에서 보는 장점의 곡선에 가장 상위에 위치한 품종이다. 카베르네 소비뇽으로 만든 와인은 오래 보관하기도 좋고 어떻게 양조하느냐에 따라 가볍게 즐길 수도 있다.
포도의 왕으로 불릴 만한 카베르네 소비뇽도 원조가 있다. 바로 보르도 5대 샤토 중 하나인 ‘샤토 라피트 로칠드(Chateau Lafite Rothschild)’이다. 미국 나파 밸리나 호주에는 카베르네 소비뇽을 90% 이상, 혹은 100%까지 사용하는 와이너리들이 많지만 카베르네 소비뇽의 원산지인 프랑스 보르도에는 오히려 이 포도만 사용하여 와인을 만드는 곳은 그렇게 흔하지 않다. 아마도 기술적인 어려움이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오랫동안 내려온 블렌딩의 전통 때문에 보르도 와인은 반드시 블렌딩 와인이어야 한다는 정서가 양조가들 사이에 심어져 있다. 하지만 샤토 라피트 로칠드는 오래전부터 카베르네 소비뇽 위주의 와인을 만들어 왔는데, 특히 최근에는 90% 이상 블렌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역사적으로도 1994년에는 99%, 전설적인 빈티지인 1961년산에는 카베르네 소비뇽을 100% 사용하였다.
카뤼아데 드 라피트
샤토 라피트 로칠드와 관련된 많은 전설이 있는데 가장 유명한 이야기는 루이 15세 때 보르도 지역의 지방 장관을 지낸 리슐리외 경에 관한 이야기이다. 삼총사에 등장하는 리슐리외 추기경의 후손이다. 보르도에서의 오랜 임무를 마치고 파리로 돌아온 리슐리외 경이 루이 15세를 알현하였을 때, 여전히 젊은 외모를 간직하고 있던 리슐리외 경에게 왕이 그 비결을 물었다고 한다. 이에 리슐리외 경은 ‘젊음의 샘물’이라고 불리는 샤토 라피트 와인 덕분이라고 대답하였다고 전해진다. 와인과 관련된 다양한 전설들처럼 이 일화가 사실인지 아니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당시는 귀족 사회에서 주로 부르고뉴산 와인이 소비되던 때로, 루이 15세와 그의 정부인 퐁파두 부인에 의해 막 샤토 라피트 로칠드가 보르도산 고급 와인으로 소개되고 있던 시기였다. 보르도 와인 중에 파리에 처음 입성했던 샤토 라피트 로칠드는 1855년 보르도 그랑크뤼 등급이 정해졌을 때에도 가장 먼저 1등급의 자리에 올랐다. 덕분에 지금까지 오랫동안 이어지고 있는 보르도 와인 등급 명단에서 가장 위에 그 이름을 올리고 있다.
5대 샤토라고 불리는 다섯 개의 1등급 와인 중에서도 샤토 라피트 로칠드가 가장 높은 가격에 거래되고 있다. 무엇보다 중국 시장에서의 폭발적인 인기를 높은 가격의 가장 큰 원인으로 꼽을 수 있는데, 그 때문에 샤토 라피트 로칠드의 품질과 명성을 폄하하는 와인 애호가나 전문가들도 있다. 하지만 중국 시장에서의 인기는 결과일 뿐이며, 샤토 라피트 로칠드는 오래전부터 최고의 와인 중에 하나였다. 와이너리를 소유한 로스차일드 가문의 명성, 세계 최고의 양조팀, 세계 최고의 카베르네 소비뇽을 수확할 수 있는 포도밭은 모두 샤토 라피트 로칠드 품질의 원천이다. 샤토 라피트 로칠드는 레드 와인 중에서 가장 오랫동안 보관할 수 있는 와인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로스차일드 가문이 포도원을 인수한 150주년을 기념하는 만찬에서 1868년산 라피트 로칠드 와인이 서브되어 많은 전문가들을 놀라게 했다. 아마도 전 세계에서 150년 된 와인을 자신 있게 서브할 수 있는 양조장은 거의 찾기 어려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