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르도 지역은 와인으로 유명하지만, 뛰어난 품질의 식재료가 생산되는 마을들이 가까이에 있어서 미식가들의 혀를 기쁘게 한다. 자동차로 동쪽으로 한 시간 조금 더 달리면 페리고(Perigord)라는 지역이 있다. 보르도와 도르도뉴(Dordogne) 강으로 연결되는 페리고 지역은 프랑스 최고의 블랙 트러플 산지이다. 페리고의 중심 도시인 페리괴(Perigueux)에는 주말마다 식자재 시장이 열리는데, 마을 전체가 재래시장처럼 바뀌며 장관을 이룬다. 페리고의 반대 방향으로 보르도에서 1시간 정도 거리에는 아르카숑(Arcachon)이라는 마을이 있다. 프랑스 남서부의 휴양도시이자, 부유한 은퇴자들이 모여 사는 아르카숑은 프랑스어로 위트르(Huitre)라고 부르는 굴로 유명하다. 이곳의 12월 굴 축제는 전 유럽에서 관광객이 몰려들 정도로 인기가 있다. 과거에는 이 마을의 해변에서 바로 주울 수 있을 정도로 해산물이 너무 흔해서, 부자들은 해산물과 함께 베이컨과 소시지를 같이 먹었다고 한다. 가난해서 해산물을 먹는 게 아니라는 표시로 말이다.
▶고급 레스토랑이 운영하는 비스트로
좋은 와인이 생산되고 식자재가 풍부해서인지 보르도에는 좋은 식당이 많다. ‘코르데이엉 바쥬(Cordeillan Bages)’나 ‘로지스 들라 카덴(Logis de la Cadene)’, ‘라 그랑드 매종(La Grande Maison de Bernard Margret)’처럼 보르도의 유명한 와인 생산자가 직접 식당을 운영하면서 자신들이 만드는 와인에 가장 잘 어울리는 음식을 보여주기도 한다. 보르도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식당 중에 하나는 ‘르생제임스(Le Saint James)’다. 미쉐린 가이드에서 별 하나를 받은 이곳은 음식도 훌륭하지만, 테라스에서 보이는 풍경이 매우 장관이다. 사실 내가 르생제임스를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이곳에서 같이 운영하는 식당 ‘카페드 레스페랑스(Cafe De L’Esperance)’ 때문이다. 르생제임스의 동생식당 격인데, 음식의 맛은 르생제임스 수준이지만 가격이 훨씬 저렴하고 심지어 문을 닫는 날도 없다. 프랑스 식당들은 휴가를 좋아하는 프랑스 국민처럼 쉬는 날이 많은 편인데, 싼 기차나 비행기 티켓 때문에 날짜를 맞춰 올 수 없는 여행객에게 카페드 레스페랑스는 언제나 열려있는 착한 식당이다.
르생제임스가 운영하는 카페드 레스페랑스처럼 파인 다이닝 혹은 가스트로노미라고 불리는 프랑스의 고급 식당들은 별도로 비스트로라고 하는 대중적인 식당을 운영하는 경우가 많다. 고급 식당이 비스트로를 같이하면 크게 세 가지 장점이 있다. 최고급 식당들은 맛뿐만 아니라 음식의 모양도 중요하기 때문에, 재료의 일부분만 사용하여 낭비하기 쉽다. 하지만 근처에 비스트로를 같이 운영한다면 재료를 버리지 않고 활용할 수 있다. 두 번째로는 고객과 평론가들의 기대 때문에 엄격한 파인 다이닝의 코스에 비해 비스트로에서는 셰프들이 자신들의 아이디어를 자유롭게 실험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높은 수준의 음식을 저렴하게 먹을 수 있어서 고객의 폭을 넓게 하는 장점도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윤화영 셰프와 그의 아내인 박현진 사장이 운영하는 부산의 메르시엘에서 ‘메르시엘 비스’라는 비스트로를 운영한 적이 있으나 아쉽게도 문을 닫았다. 윤화영 셰프에 의하면 많은 고객들이 두 식당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했다고 한다. 어떤 손님들은 두 식당을 동시에 예약하여 당일 주방에서 확인한 경우도 있었고, 어떤 손님들은 비스트로를 카페로 착각하고 식사 예약을 한 후 커피만 마시러 오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 비스트로가 우리나라에서는 생소한 개념이지만, 매우 성공적으로 운영되는 경우도 하나 있다. 청담동의 인기 식당 ‘뚜또베네’는 서울 프렌치의 원조격인 ‘팔래드 고몽’에서 운영하는 비스트로다.
▶비스트로의 역할을 하는 세컨드 와인
와인을 만드는 일은 종종 음식을 요리하는 것과 비교된다. 셰프가 좋은 재료를 고르고 그에 맞는 조리 장비를 이용하는 것처럼 와인 메이커들은 좋은 포도를 고르고 발효 탱크와 오크통을 적당히 이용하여 와인을 만든다. 고급 레스토랑이 운영하는 비스트로와 같은 것이 고급 보르도 와인에도 있는데, 이런 와인을 보통 ‘세컨드 와인’이라고 부른다.
와인 메이커들은 날씨 외에도 본인이 통제하기 어려운 조건을 안고 와인을 만들어야 하는데, 바로 포도밭이다. 거의 대부분의 포도원들은 그들이 가진 포도밭이 균일하지 않아서 균일한 포도가 생산되지 않는다는 어려움이 있다.
무엇보다 보르도에서는 같은 포도밭에서 카베르네 소비뇽이나 메를로 등 서로 다른 포도가 생산될 수 있다. 두 번째로는 같은 포도 품종이라도 포도나무의 수령이 달라서 표현되는 깊이가 다를 수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같다 하더라도, 포도밭의 토양이 달라서 생산되는 포도의 맛이 다를 수 있다. 이 모든 조건들이 조합되어 매년 서로 다른 맛이 나는 포도가 생산되는데 와인 메이커들은 생산된 포도 중에 어떤 포도를 사용하여 와인을 만들지 정해야 한다. 품질도 좋아야 하지만 포도원에서 추구하는 와인의 맛에도 가까워야 한다.
포도의 선별 작업은 보통 1차 발효가 끝난 후 이루어지는데, 선택되지 않은 포도 중 품질이 떨어지는 경우 다른 생산자에게 넘겨진다. 일정한 품질 이상이 되는 와인들은 해당 포도원의 두 번째 와인, 즉 세컨드 와인으로 탄생한다. 1906년 처음 시작한 샤토 마고의 ‘빠비용 후즈(Pavailon Rouge)’, 샤토 팔머의 ‘알터 에고(Alter Ego)’, 샤토 슈발 블랑의 ‘쁘띠 슈발(Petit Cheval)’ 등은 보르도의 대표적인 세컨드 와인이다. 포도원에서 세컨드 와인을 운영하면 크게 3가지 장점이 있다. 첫째는 남는 양질의 포도를 버리지 않아도 된다. 둘째로는 포도원의 주력 와인의 품질에 더욱 집중할 수 있다. 과거에는 주력 와인에 같이 블렌딩되었던 애매한 품질의 포도들이 세컨드 와인에 사용된다. 마지막으로 같은 와인 메이커가 만드는 보다 대중적인 와인을 생산해 저변을 넓히고 매출을 늘릴 수 있다. 보르도에서 가장 성공적인 세컨드 와인은 ‘클로뒤 마르키(Clos du Marquis)’라는 와인이다. 원래 ‘샤토 레오빌 라스카스(Leoville Las Cases)’의 세컨드 와인으로 만들어졌으나, 아이러니하게도 레오빌 라스카스보다 더 큰 성공을 거두게 되어 별도의 와인 브랜드로 독립되었다. 레오빌 라스카스는 지금은 2010년부터 ‘쁘띠 리옹(Petit Lion)’이라는 다른 이름의 세컨드 와인을 만들고 있다.
거의 100년간 인기를 끌었던 보르도 세컨드 와인은 21세기가 들어서면서 위기를 겪게 된다. 지금의 와인 애호가들은 세컨드 와인의 ‘세컨드’란 말에 더 영향을 받아, 좋은 가격에 좋은 품질의 와인이라는 이미지보다는 ‘메인 와인보다 낮은 품질’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지는 편이다. 그러다보니 유명한 세컨드 와인들 외에는 판매도 쉽지 않다.
지금은 대부분의 포도원들은 세컨드 와인을 두 번째 와인으로 소개하기보다 와이너리에서 만드는 다른 와인으로 소개한다. 실제로 점점 많은 보르도의 샤토들이 남는 포도를 사용하여 세컨드 와인을 만들지 않고 애초에 포도밭 중의 일부를 지정하여 싱글 빈야드 형태의 와인을 만들고 있다. 이런 와인들은 ‘부티크(Boutique) 와인’으로 탄생하기도 한다.
부티크 와인이란 매우 소규모로 생산되는 고급 와인을 의미하는데, 생산량이라는 수치적인 기준보다는 미니멀리즘을 추구하는 정신적인 기준이 더 중요하다. 대표적으로 샤토 피작에서 만드는 ‘샤토 밀러리(Chateau Millery)’, 샤토 오바이에서 만드는 ‘샤토 르 파프(Chateau Le Pape)’가 있다.
현지에서도 수백만원이 넘는 ‘샤토 르팽(Le Pin)’처럼 초고가의 부티크 와인이 있기도 하지만, 대부분 오히려 세컨드 와인 정도의 가격으로 부담이 적다. 이런 부티크 와인들은 희귀하지만 거만하지 않고 특별하지만 가족처럼 따뜻한 느낌을 주는 와인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