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중국에서는 황제를 천자(天子)라 불렀다. 맹자(孟子)에 따르면 천자는 보통 사람이 아니라 하늘 아래 살고 있는 모든 사람을 다스리라는 천명(天命:하늘의 뜻)을 받은 특별한 사람이다. 그래서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천자보다 높을 수 없었고, 이 세상 어떤 사람도 천자보다 고귀할 수 없었다. 또 그랬기 때문에 천자는 보통 사람들이 사는 곳과는 아득히 먼 구중궁궐 속에서 살다가, 보통 사람들이 묻히는 곳과는 다른 아주 특별한 곳에 묻혔다. 이처럼 살아서도 죽어서도 보통 사람들의 생활과는 아득히 먼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 ‘하늘의 아들’이 바로 천자였다.
건릉
이런 천자들이 생전에 어떻게 살았는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궁궐이며, 사후에 어떻게 되는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무덤이다. 천자들은 살아서는 땅 위에 세워진 궁궐에서 사람들을 다스렸고, 죽어서는 땅 속에 만들어진 무덤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 그런데 땅 위에 세워진 유명한 궁궐들은 진시황의 아방궁(阿房宮)이나 당나라의 대명궁(大明宮)이 말해주듯 어지러운 세월 속에서 거의 모두 파괴되거나 불타버려서 쓸쓸히 주춧돌만 남았다. 그렇지만 땅 속에 축조된, 지하궁전이라 부르는 장대한 무덤들은 견고한 방어막 아래 숨겨진 덕분에 상당수가 살아남았다. 그 결과 천자가 생전에 어떻게 살았는지를 온전히 생생하게 엿볼 수 있는 지상의 건축물로는 베이징의 자금성이 거의 유일한 반면 사후에 어떻게 휴식을 취하고 있는지를 엿볼 수 있는 지하의 건축물들은 무수히 많다. 이를테면 우리는 시안에서는 진시황릉(秦始皇陵)을 비롯해, 한무제의 무덤인 무릉(茂陵), 당태종의 무덤인 소릉(昭陵), 당고종과 측천무후가 합장된 건릉(乾陵) 등을 만날 수 있고, 난징에서는 주원장의 무덤인 효릉(孝陵)을 만날 수 있으며, 베이징 교외에서는 영락제의 장릉(長陵), 만력제의 정릉(定陵) 등 명청시대의 수많은 무덤들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건릉 무자비
13명의 황제가 잠든 ‘명 13릉’
현재 우리가 천자들의 사후생활과 가장 생생하게 마주칠 수 있는 장소는 베이징 교외에 있는 만력제의 정릉이다. 그것은 발굴돼 일반 사람들에게 내부를 공개하고 있는 천자의 무덤이 정릉밖에 없는 까닭이다. 물론 뤄양에 있는 북위(北魏) 선무제(宣武帝)의 경릉(景陵)이나 광저우에 있는 남월왕(南越王) 조매(趙昧)의 무덤 등이 공개돼 있지만 그 무덤의 주인들은 천하를 다스린, 다시 말해 통일된 중국을 다스린 천자가 아니라 한 지역을 다스렸던 사람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의 아들로서 천하의 주인 노릇을 했던 사람이 사후에 어떻게 휴식하고 있는지를 제대로 보자면 현재로서는 정릉에 가는 방법이 유일하다.
1990년 초의 무더운 여름날 정릉을 보기 위해 택시를 대절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명 13릉 관광은 중국에서 팔달령 만리장성 관광에 버금가는 여행상품이기 때문에 정릉이 있는 창평현(昌平縣) 천수산(天壽山)으로 가는 길은 택시와 관광버스로 붐비고 있었다. 내가 당시 시골공항 같았던 서우두(首都) 공항에 내려 정릉을 찾은 때로부터 10년여의 세월이 흐른 2004년경 나는 다시 괄목상대할 정도로 바뀐 베이징을 찾았고, 중국 언론이 하루 동안에 정릉을 찾은 사람의 숫자가 1만여 명이 넘는다고 보도하는 기사를 읽었다. 하루에 1만여 명이라니! 그 기사는 문득 나로 하여금 10여 년 전 정릉에서 뒤따라오는 입장객에게 떠밀려 앞으로 나아가지 않을 수 없었던 기억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그리고 입장객의 제한에도 불구하고 그 정도라면 30년 동안 한 번도 자금성을 벗어나지 않고 살았던 만력제가 생전과는 달리 사후에 너무나 많은 사람들에게 시달린다고 생각하며 미소를 머금었었다.
명 13릉은 13명의 황제가 한 지역에 잠들어 있는 까닭에 붙여진 이름이다. 베이징 시내에서 45km 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는 천수산 아래에 명나라를 통치한 황제 13명이 잠들어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모두 16명의 황제 중 영락제가 수도를 난징에서 베이징으로 옮긴 후 황제의 자리에 있었던 13명의 무덤이 천수산 아래에 집단적으로 모여 있는 셈이다. 이런 점에서 명 13릉은 아무렇게나 여기저기 조성된 무덤이 아니라 영락제 이후 지속적으로 치밀한 계획 하에 배치된 무덤들이다. 이 사실을 나는 장릉(長陵)을 향해 뻗어 있는, 석수(石獸)들이 늘어선 신도(神道)에서부터 느낄 수 있었다. 13개의 무덤 중 가장 오래된 무덤이자 모두의 할아버지가 되는, 영락제의 장릉을 향한 하나의 신도가 13개의 무덤 모두를 연결해주고 있는 모양 앞에서 나는 무덤의 주인들이 한 핏줄이라는 사실과 함께 잘 계획된 배치라는 사실을 손쉽게 읽었던 것이다.
한여름의 뜨거운 햇빛에 시달리다가 정릉의 지하궁전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피부에 느껴지는 서늘한 기운이 약간 상쾌하면서도 이곳은 살아 있는 사람의 세계가 아니라는 섬뜩함으로 나를 엄습했던 기억을 지금도 또렷이 기억한다. 동시에 줄지어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짜증스럽게 떠밀리면서도 지하궁전의 장대함 앞에서 넋을 잃고 말았던 모습 역시 또렷하게 기억한다. “정릉의 지하궁전 규모가 이 정도라면 진시황의 지하궁전 규모는 도대체 어느 정도일까?”하는 의문을 나도 모르게 떠올리고 있었던 것이다.
중국의 천자들은 최초의 황제였던 진시황제가 그랬듯이 황제의 자리에 오르면 곧 사후에 자신이 묻힐 무덤을 만들기 시작했다. 정릉의 주인인 만력제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1573년 10살의 나이로 황제의 자리에 올라 뛰어난 명신이었던 대학사 장거정(張居正)의 보필을 받으며 대명제국이 태평성대를 구가하게 만든 인물이었지만, 그럼에도 자신이 묻힐 무덤에 관한 한 진시황으로부터 이어지는 오랜 관습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리하여 만력제는 48년의 재위기간 중 21살 때부터 시작해 6년여의 세월에 걸쳐 은화 800만냥이란 국고를 쏟아 넣으며 지하궁전을 만들었다. 학자들은 당시 명나라의 1년치 총 세수를 400만냥 정도로 추산하고 있으니까 800만냥이란 액수는 2년치 총 세수에 해당하는 엄청난 금액인 셈이다.
정릉 지하궁전, 정릉
천자도 하늘의 아들은 아니었도다
엄청난 금액을 소비하면서 만든 정릉이 우리 앞에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은 실로 우연한 계기, 하찮은 사건 때문이었다.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1956년에 명 13릉의 가장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장릉을 발굴하기로 결정했으나 발굴시작 직전에 이 결정이 실로 우연한 사건에 의해 정릉으로 바뀌는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그것은 정릉을 둘러싼 성벽에 의심스러운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을 발견한 때문이었다. 그 구멍으로 말미암아 이미 도굴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의혹이 생겼고, 그렇다면 정릉부터 발굴작업을 시작하자는 결정으로 바뀐 것이다. 정릉은 이렇게 하여 우리 앞에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고 만력제는 300여 년 동안의 휴식을 끝내고 수많은 백성들의 소음에 시달리게 되었다.
정릉의 지하궁전 내부는, 지하궁전을 채웠던 진귀한 유물들을 모두 박물관으로 옮긴 탓인지, 장대한 규모로 말미암아 오히려 텅 빈 쓸쓸함으로 나를 맞이했다. 그리고 지하 67m에 건설된, 돌로 된 5개의 전각을 가진 이 궁전은 하늘의 아들을 자부한 천자 역시 사후에 인간세상과는 다른 하늘의 세계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오랜 세월 동안 그가 거주했던 자금성의 건청전(乾淸殿), 교태전(交泰殿), 곤녕궁(坤寧宮) 등을 본따서 축소시킨 지하궁전은 천자의 사후세계도 우리 인간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것이며, 생전의 생활을 사후로 연장시킨 것일 따름이란 사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지하 궁전의 모조 옥좌 앞에서 나는 그 옥좌의 주인이 박물관으로 자리를 옮긴 적막함을, 관광객들의 소음이 채우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그렇게 생각했었다.
천자는 살아 있을 때는 어느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절대적 권력을 가진 존재였지만 죽은 후까지 그러한 것은 아니었다. 정릉의 주인 만력제도, 자신의 무덤은 스스로 만들 수 있었지만, 그 무덤 속에 함께 들어갈 사람들은 자신의 의지대로 결정하지 못했다. 만력제가 죽은 후 황제의 자리에 오른 태창제(泰昌帝) 주상락(朱常洛)이 불과 한 달 남짓 만에 죽은 까닭에 그와 함께 묻힐 사람을 결정하는 권한이 손자인 천계제(天啓帝) 주유교(朱由校)에게 넘어가버린 것이다. 그 결과 그의 옆에 묻힌 사람은 자신이 그렇게도 사랑했고 함께 묻히기를 바랐던 정귀비(鄭貴妃)가 아니라 궁녀 왕씨(王氏)가 되고 말았다. 만력제는 사후 그의 좌우에 한쪽에는 정식 황후를 다른 한쪽에는 정귀비를 두고 오래오래 사랑을 나누고 싶어 했지만 그의 손자인 천계제는 할아버지의 생각을 무시하고 자신의 친할머니인 궁녀 왕씨를 황태후로 봉해서 정귀비 자리에 안치했다. 그리고 정귀비는 정릉의 서남쪽 먼발치로 내쳐버렸다.
하늘의 아들임을 자부한 중국의 천자들은 절대무비의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러한 그들의 권력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한계가 있었다. 천자에게는 비록 자신의 위에 있는 사람은 없었지만 눈치를 봐야 할 수많은 신하들이 있었다. 만력제는 총애하던 정비 소생의 아들을 태자로 삼고 싶어 했지만 15년 동안의 세월을 허비하면서도 장자를 주장하는 신하들의 여론을 꺾지 못했다. 또 측천무후처럼 과감하고 잔인하게 신하들을 제압하고 이씨(李氏) 왕족들을 숙청하고 친자식까지 죽이면서 국호를 당(唐)에서 주(周)로 바꾸어 새로운 왕조를 열었던 인물도 다가오는 운명 앞에서는 무력함을 느껴야 했다.
과감하고 잔인하고 총명했던 측천무후도 이씨 성을 가진 자기 아들이 황제자리에 올라 주왕조가 다시 당왕조로 돌아가는 운명을 막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이렇듯 하늘의 아들을 자부한 사람들도 자신의 능력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일들이 많았다. 생전의 일에서 그러했을 뿐만 아니라 죽은 후의 일에서는 더더욱 그러했다. 그것은 그들이 제도가 만들어낸 천자였을 따름이지 진정으로 ‘하늘의 아들’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