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태원 SK그룹 회장과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 부부는 몇 년 전 딸이 아르바이트로 일하는 GS25 편의점을 한밤중에 찾아다닌적이 있다고 한다. 고등학생이었던 딸은 부모에게 편의점이 위치한 동네 이름만 얘기한 채 나간 터였다.
그 얘기를 듣는 순간 기자의 머릿속에는 여러 가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무엇보다 부잣집 딸답지 않은 행동에 대한 신선함을 느꼈다. 자기 용돈을 스스로 벌겠다는 발상이 좋아 보였다. 동시에 성장기 한때의 종잡을 수 없는 행동 가운데 하나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다르다’는 일종의 소영웅심리 내지 치기 말이다. 강한 인상을 받았지만 솔직히 무게를 두지는 않았다.
몇 년 뒤 그 아이는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최근 임관한 최민정 해군 소위 얘기다. 최 소위는 고등학교 졸업 후 스스로 학비를 벌면서 중국 최고의 명문 베이징대학을 졸업했다고 한다. 기회만 있으면 병역의무를 회피하려는 세태를 꾸짖기라도 하듯 여자의 몸으로 초급 장교의 길에 접어들었다.
최 소위가 일으킨 사회적 파장은 한국 사회의 무기력증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경제는 저성장 시대로 접어들었고, 정치인들은 국가 발전을 이끌기는커녕 발목을 잡는 집단으로 전락했다. 청년들은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대학가와 학원가를 전전하고 있다. 규제 개혁이니 서비스 산업이니 하는 해법들은 하나같이 제자리걸음이다. 사회를 얼어붙게 하는 사건 사고는 줄이어 벌어지고 있다.
여기에 대기업그룹의 경영이 3~4세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간간이 노출되고 있는 재벌가 자제들의 일탈은 또 다른 논란에 기름을 끼얹고 있다. 이들에게 한국의 경제를 맡겨도 되겠느냐는 물음표다. 이런 때 대표적 대기업그룹의 딸인 최 소위가 보여준 행동은 신선한 감동을 이끌어내기에 충분했다.
개인적으로는 최 소위가 짊어지게 된 부담에 대해 안쓰럽다는 생각도 든다. 일반인 같으면 친구들과 술을 먹다가 만취돼 업혀 가는 일도 있다. 너무 급하면 길 가다가도 실례를 하는 수도 있다. 살면서 한두 번 겪을 수 있는 평범한 실수조차 그에게는 용납되지 않을 것이다.
사실 이 세상의 어떤 집단도 도덕적으로든 기능적으로든 완벽할 수는 없다. 최고의 엘리트 집단이라는 법조계만 해도 그렇다. 사법고시를 패스하기 위해서는 유전적으로 우수하고 개인적으로 매우 성실해야 한다. 그런 사람들만 모아놓은 법조계에서도 온갖 추문이 생기고 범죄가 발생한다.
결국 이 세상의 모든 집단은 정규 분포(Normal Distribution)하게 마련이다. 잘하는 소수와 잘 못하는 소수 사이에 대부분이 존재할 따름이다. 재벌 3~4세 문제도 마찬가지다. 아주 잘하는 일부를 두고 모두가 잘할 것이라고 믿는 것이나, 일부의 일탈을 전부의 문제인 양 치부하는 것 모두 지나친 일반화다.
대기업그룹 지배 구조에 관한 문제는 사실 정답이 없는 문제다. 누가 조직의 역량을 이끌어내 기업을 발전시킬 수 있는지에 관한 문제로 좁혀볼 필요가 있다. 그룹 경영에 장기간 존재해온 재벌 3~4세를 배제하고 다른 방법을 택했을 때 그룹 경영이 제대로 굴러가고 발전할 수 있는지 자신 있게 답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성공 가능성보다는 하방 리스크만 잔뜩 있는 시나리오들을 자꾸 얘기하는 건 비현실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