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루미 선데이(Gloomy Sunday) 음악이 생각나는 날들입니다.”
그렇게 시작되는 문자 메시지를 보낸 분은 가깝게 알고 지내는 중학교 교감 선생님이었다. 그때가 세월호 참사 후, 단원고 교감선생님이 자신만이 살아남았다는 고통 속에 번민하다 자살한 지 며칠이 지났을 때였다. 알고 보니 자살한 교감선생님이 대학 후배더라는 말과 함께 보내온 문자메시지였다. 같은 교사로서 느끼는 그 마음이 글루미 선데이 바로 그 마음이리라 더듬거려졌다.
글루미 선데이는 1933년 헝가리의 피아니스트이며 작곡가인 레조 세레스(Rezso Seress)가 만든 노래다. ‘헝가리의 자살노래’라는 부제를 달고 인터넷에 떠 있는 오리지널 곡을 듣고 있자면 이 노래의 진정성이랄까 처절함이 가슴에 와 닿는다.
글루미 선데이의 나날을 보내고 있을 ‘선생님의 마음’을 그는 이렇게 적고 있었다.
‘요즈음 오래 된 제자들을 하나하나 만나고 있습니다. 20년이 지났는데도 그들이 10대 때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서 너무 고맙고 감사했습니다. 그런데, 지난날의 추억을 더듬으며 나오는 이야기가 하나같습니다. 다들 저에게 맞은 기억을 이야기합니다. 그것이 저를 더욱 슬프게 했습니다. 한걸음 앞에서 따라올 수 있도록 기다려 주지 못하고 왜 그렇게 내몰았을까. 많은 세월이 흘렀는데도 그날들이 후회가 됩니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나는 혼자 웃었다. 다 그렇지 않던가. 무슨 마음의 앙금이 남아 있을 리 없건만 왜 선생님에게 맞았던 기억들은, 색이 바래지도 않고 푸들푸들 살아 있는지.
‘오늘은 두 번째 담임을 맡았던 때의 우리 반 반장을 만났습니다. 그때가 1987년, 지금은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어 있는 제자가 어젯밤에 보고 싶다며 전화를 걸어온 겁니다. 만사 제쳐두고 달려가 만나고 왔습니다. 그런데 돌아와 보니 아내가 오늘이 결혼기념일이라네요. 전 항상 그렇게 살아왔나 봅니다.’
이 부분에서 나는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그리고 선생님에게 문자를 보냈다.
‘맞은 기억? 좋은 선생님은 그렇게도 남는답니다. 잊어버린 결혼기념일? 좋은 남편은 그렇게도 남는답니다. 나쁜 남편이나 그런 거 잘 챙겨요, 쥐새끼처럼. 며칠 후 부인께서 좋아하시는 꽃 한 다발 들고 뒷머리 긁으며 들어가시기를!’
내게는 ‘첫 제자’라고 부르는 특별한 제자가 있다. 대학교수가 된 첫날, 첫 강의에서 만났던 제자였다. 그 제자는 지금 여고에서 국어선생님이 되어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세대차이라는 게 이런 것인가보다 놀랄 정도로 그와 나는 가치의 기준이 많이 다르다. 무슨 일만 터지면 제일 먼저 내놓는 처방이 ‘대통령이 먼저 물러나야 한다’는 게 제자다. 그때마다 ‘미친놈아. 그게 대통령하고 무슨 상관이냐’고 하는 게 나다. 그런 우리들이 정년퇴임을 한 이제까지 만남을 이어오고 있다. 그의 취미가 잠수라는 걸 알았을 때 나는 비명을 질렀다.
‘이놈아. 하늘을 날면 모를까. 인간이 어쩌자고 하릴없이 물속으로 기어들어가니!’
아름다운 바다를 찾아 방학 때면 해외로 나가곤 하는 그는 자격증을 갖고 있는 정도가 아니라 수중잠수를 가르치는 교사라고 한다. 그에게 문자메시지로 안부를 물었다.
‘넌 진도 앞바다에 가 있어야지 왜 서울에 엎어져 있니?’
그에게서 문자가 왔다. 인사말에 이어진 내용은 그가 스스로 ‘무서운 이야기지만’이라고 단서를 달았듯이 나 또한 그것을 여기 그대로 옮겨 놓기에도 무섭다. 그는 적고 있었다. 참사의 정확한 실태를 알 수 없었던 초기에 가까운 교사들끼리 모여 나눈 이야기는, 그랬다는 것이었다. ‘구조된 교사가 없는 건 그나마 다행한 일’이라고. ‘우리끼린 할 수 있는 말’이지만 ‘아이들을 두고 나올 선생은 없다’고, ‘없어야 한다’고.
그리고 그가 흐느끼듯 적고 있던 말을 그대로 옮기면 이렇다.
‘원래 선생들이 다 그래요. 아이들을 두고 나오진 않아요. 그건 의로움이나 책임감 같은 게 아니에요. 나날이 웃으며 화내며 하이파이브하며 냄새 맡고 진절머리치고 혼내고 껴안고 수업하고 듣고 나누던 그런 미립자들이 그렇게 만드는 거예요. 우린 다 그래요. 하나도 특별하지 않은 아주 좁쌀 같은 인간들이지만 선생들은 원래 그래요. 저도 기꺼이 그들과 함께 하길 바랍니다. 지치고 힘겨울 때 홍삼캔디를 입에 물고 호호거리며 인사하던 녀석들을 두고 나오지 않을 만큼 꼭 그 만큼의 용기가 허락되기를 기도합니다. 삶이 그저 숨 쉬며 생존하는 것이 아닌 의롭게 살아가는 일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의로움이나 책임감이 아니라는 말, 서로 부대끼며 살아낸 세월의 미립자들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라는 말, 그 ‘선생님의 마음’만은 떠나지 않고 오랫동안 내 안에 두웅두웅 울리며 남았다.
내가 기억하건대, 단원고 학생들을 데리고 떠났던 선생님들에 대한 언론의 시각이 확연하게 변한 것은 사고가 나고 2주 정도가 지난 4월 말부터였다. ‘세월호 참사 속 희망, 아름다운 교사들’ 같은 제목의 기사가 오르내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단원고 교감선생님의 자살 소식을 전하면서 TV의 모든 채널은 약속이나 한 듯이 ‘단원고 교감’이라고 했지 ‘단원고 교감선생님’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다.
‘선생님이 계셨다’는 기사가 뜨고… 김초원 교사의 유족이 가정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을 위해 써 달라며 조위금으로 들어온 260여만원을 단원고에 기부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초원이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랬던 것처럼 하늘에서도 제자들을 챙길 아이다”라는 아버지의 말과 함께. 그리고 어느 언론은 이렇게 썼다. ‘이번 사고로 수학여행을 인솔하던 교사 14명 가운데 2명만 살아남았다’고. ‘이런 스승들이 있기에 아직 희망은 있다’고.
글루미 선데이의 첫 헝가리어 제목(Szomoru Vasarnap)을 직역하면 ‘슬픈 일요일’이 된다. 이 노래를 부른 젊은 세대, 자우림이나 채동하도 우리 말이 아닌 ‘글루미 선데이’라고 노래이름을 붙이고 있다.
부다페스트의 레스토랑 키슈피파(Kispipa)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며 생활하던 작곡가 레조 세레스는 1968년 투신자살했다. 그의 아내도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부다페스트에 가면 생전의 그가 피아노를 치던 레스토랑 키슈피파가 아직도 문을 열고 있다고 한다. 먼 어느 날 그곳을 여행하게 된다면 그때 세월호 참사 속의 선생님과 희생된 젊은 영혼들을 떠올리며 ‘글루미 선데이’를 신청해서 들을까 하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정말 그날이 와서 내가 거기 가 앉아 있게 된다면, 그때 나는 기억하리라. 내 어둡고 슬픈 젊은 날에도 얼마나 많은 ‘선생님의 마음’이 있어 나를 감싸주었던가를. 정부가 아연실색할 정도의 무능과 무책임을 민낯으로 드러내면서, 우리가 만들어냈다고 믿었던 모든 신뢰를 송두리째 배반하면서 무너져 내리던 그때, ‘우리에게 아직 희망은 있다’고 외치게 하는 저 선생님의 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