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은, 지금도 여전히 즐거운 추억으로 남아 있다. 내 생애 첫 두루마기를 입고 시인 박목월 선생 댁으로 세배를 갔던 추억이다. 원효로 4가. 옛 전차 종점이 멀지 않은 곳이었다. 나이 마흔이 되던 그해에 무슨 생각에서 아내가 내게 한복을 맞춰주었는지, 정확한 기억은 없다. 다만 한복을 갖추어 입었다는 것이 몇 가지를 나에게 일깨워주고 있었다. 나이가 들었다는 것, 겨우 생활의 안정을 갖추었다는 것, 늘 혼란스럽기만 하던 감정의 물결들이 저녁놀에 물든 강물처럼 가라앉아 하루하루가 별 탈 없이 잔잔하게 흘러가고 있다는, 그런 상징적 의미였다.
이미 박목월 선생은 세상을 떠나고 계시지 않았으니 사모님께 세배를 갔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리라. 언제나 얼굴에 잔잔한 웃음을 잃지 않으시던 사모님이 여전한 모습으로 나를 맞아 주셨다. 세배를 마친 내 손을 잡으며 술상을 차려주신 사모님이 말씀하셨다. “자네 얼굴에도 어느새 주름이 다 잡혔네.” 그 말씀에 감회가 서렸던 것은 나는 시인 박목월의 제자가 아니라 그 아드님 박동규 교수의 제자였기 때문이다. ‘아들의 제자’라는 특이한 신분(?)으로 드나들게 된 집이 박목월 선생 댁이었다. 열아홉 나이에 처음 뵈었던 사모님께 마흔이 넘어서도 세배를 가며 처음으로 두루마기에 한복으로 차려 입었던 것이다.
우리 민족 고유의 의복인 한복은 직선을 기조로 하면서 곡선이 조화를 이루는 아름다운 옷이다. 색깔이 아닌 선이다. 민족의 러브스토리라고 할 춘향전의 첫 장면도 춘향의 그네 타는 모습, 그 나부끼는 치마의 선에서 시작한다. 러브스토리는 어디서 어떻게 만나는가가 중요하다. 그것이 그들이 앞으로 맞이할 사랑의 역정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춘향전의 사랑은 바로 춘향의 치맛자락이 펼쳐내는 현란하면서도 우아한 선이었다. 이것은 그 후 두 사람의 운명을 가로지르는 선이기도 하다. 상체를 작게 보이게 하는 저고리와 허리에 감아 입어 활동에 편안함을 주면서도 하체를 풍성하게 만드는 치마의 균형감만이 아니다. 짧은 저고리와 넉넉한 치마가 어울려 단아하면서도 아담한 이 여인들의 옷은 특히 한옥주택과 흡사해 절묘한 아름다움을 자아낸다. 한옥의 처마선과 닮아 있는 도련(저고리나 두루마기 자락의 가장자리)의 멋이다. ‘대청마루를 거니는 스란치마’는 탄식에 가깝게 아름답지 않은가.
이 치마에도 변천은 있었다. 조선시대 영조 20년경까지는 긴 저고리와 함께 치마를 허리에 둘러 입었다고 하니,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먼 노동복에 가까웠다. 이것이 저고리 길이가 짧아지면서 위로 올라가고 치마는 허리끈을 가슴에 두르게 올라가면서 오늘 날의 맵시를 이루어내게 된다. 그것만이 아니다. 한복은 예복과 평상복이 있고 성인과 어린이용이 다르며 사계절이 뚜렷한 나라답게 계절로도 나뉘는 옷이다.
그러나 예찬으로 끝날 일이 아니다. 한복에는 결점이 수두룩하다. 우선 대님을 비롯한 매듭들이 많아서 자주 풀리는 불편함이 있다. 폭이 커서 거추장스럽고 땅에 끌리는가 하면 무엇보다도 활동하기에 여간 불편한 옷이 아니다. 이순신 장군의 해전을 빼고 나면 거의 모든 육상 전투에서 지기만 하는 우리의 과거사를 보자면, 한복이 이해가 된다. 그런 옷을 입고 어떻게 전쟁을 하겠는가.
이런 불편을 해소하고자 등장한 것이 개량한복인가 생활한복인가 하는 옷이다. 생긴 건 노동복인데 가만히 보면 그게 아니다. 이 옷의 애호가들을 보면, 정장을 갖추어야 할 자리에도 이 옷들을 입고 나오기에 하는 말이다.
옷은 그 옷을 태어나게 한 민족의 정서만이 아니라 그들이 살아가는 땅, 기후 환경과도 깊이 연결되어 있다. 그런데 이 생활한복에는 민족의 정서는커녕 환경의 영향이나 기후에 대한 어떤 배려도 없다. 목 부위는 시원하게 트고 허리끈과 대님으로 찬바람을 막아주면서 ‘가슴 위는 차게, 배꼽 아래는 따뜻하게’ 하여야 한다는 한방의 이론에 맞춘 한복의 기본과도 배치되는 게 이 옷이다. 고름이나 대님을 지퍼나 단추로 대체하다 보니 한복의 품위와 자태가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아예 품위도 자태도 없애버린 옷이 되었다.
여기에서 나타난 현상의 하나가 흥미롭다. 어떤 일인지 이 개량한복을 애호하는 남자들이 가지는 특징이 있다. 덥수룩하게 수염을 기른다. 수염만이 아니라 머리를 길게 길러서 여자처럼 뒤로 묶는 꽁지머리를 한다. 수염을 무성하게 기르고 꽁지머리를 해야 제대로 된 차림새가 되는 것이다.
아주 오래 전에 <어우동>이라는 영화가 있었다. 표현의 허용치가 지금보다는 말도 안 되게 억압되던 시대였다. 전라는커녕 에로영화라고 해야 여배우가 하릴없이 입이나 허걱 허걱 벌려대는 것이 에로였던 시절이었다. <어우동>도 그 시절의 영화였다. 그러나 주인공 어우동이 누구인가. 세종대왕의 형님(효령대군)의 손주 며느리가 어우동이다. 그런 여자가 근친상간은 물론 종친이나 재상부터 노비까지도 섹스의 대상으로 삼았던 조선왕조 최대 섹스 스캔들의 주인공이다. 얼마나 큰 사회문제가 되었으면 조선의 국가공권력이 한 여인의 깊고 은밀한 아랫도리 자유에 개입했겠는가. 섹스가 죄가 되어 사형에 처해진 여인이 어우동이다.
이 여인을 그렸다고 하는 영화 <어우동>은 그 선정성이 아니라 한복이 참으로 아름다웠다고 영화사에 남아 있는 기이한 영화다. 우연하게 이 영화의 의상을 담당했던 디자이너를 만나게 되었을 때, 내가 물었다.
“영화를 안 봐서 죄송한데요…. 선생님이 만든 영화 속의 한복이 그렇게 아름답다면서요?”
디자이너의 대답이 절묘했다.
“예쁘면 뭐해요. 나는 입으라고 만들어 준 옷인데 영화에서는 자꾸 벗기만 하니!”
우리 주변에서 한복이 사라져간다. 조금 과장하자면, 이러고도 반만년 역사를 운운할 수 있을까 싶은 민족적 허전함이다. 한복의 수난을 생각하자면 국악은 어떨까 떠올리게 된다.
‘우리 음악인 국악을 생각하면 무엇이 제일 먼저 떠오르십니까.’ 요즈음 이런 설문지를 돌리면 어떤 대답이 나올까 궁금할 때가 있다. 십여 년 전 이런 설문을 청소년들에게 돌렸을 때 1위를 차지했던 대답이 우황청심환이었다. ‘국악’이라고 했을 때 청소년이 떠올리는 단어의 1위가 우황청심환이었다는 말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작고하신 명창 박동진 선생이 바로 그 무렵 우황청심환 광고CF에 나와서 우황청심환을 내밀며 “우리 것은 좋은 것이여”하고 소리쳤기 때문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자면, 요즈음 청소년들에게 한복이 무엇인가 하고 물으면 ‘국악인들의 무대의상’이라고 대답하지나 않을까. 한복을 가장 쉽게 만날 수 있는 것이 TV의 시대극 드라마를 빼고 나면 국악프로그램의 출연자들이기 때문이다.
박목월 시인 댁에 세배를 갔던 그 두루마기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모르겠다. 그해 뿐, 어찌어찌하면서 나는 한복을 입지 않게 되었다. 그랬던 한복인데, 어쩐 일인지 요즘 들어 한복이 입고 싶어진다. 노인이 되어 하는 일 없이 집안에서 오가니까 하는 말이 아니다. 한복이라는 그 그윽한 옷이 입고 싶은 것이다. 그윽한 옷을 입고 그윽한 마음으로 내가 산 시대가 사라져가는 모습을 그윽한 눈길로 바라보며 앉아 있고 싶다.
갓끈이 날리는 바람 속을 두루마기 자락을 날리며 성큼성큼 강둑길을 걷고 있는 남자는 얼마나 우리 산하와 잘 어울리는가. 저고리 고름을 날리며 나도 그런 옷을 입고 싶다. 옥색 두루마기 자락을 날리며 걷고 싶다. 그러나… 아서라. 내 나이가 얼마인데 이제 와서 옥색 두루마기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