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어디서나 인터넷에 접속해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모바일 혁명은 우리의 생활패턴을 확 바꿔놓았다. 요즘 중년층에 그 못지않은 변화를 꼽으라면 어떤 것을 들까. 아마 소니 워크맨을 연상하는 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 이름처럼 자유롭게 걸어 다니며 원하는 음악을 손쉽게 즐기는 꿈을 1979년 탄생한 소니 워크맨은 이뤄냈다. 손바닥만한 기기에서 터져 나오는 고음질 스테레오 음향에는 어깨가 저절로 들썩여졌다. 소니는 요즘 젊은이들의 표현대로 간지나는 선물로 최고 인기품목이기도 했다. 팔뚝이나 옆구리에 워크맨을 차고 조깅을 하는 여성은 건강미의 상징으로 여겨질 정도였다.
2000년대 초반만 해도 소니는 삼성이 감히 넘보기 어려운 세계 초일류기업으로서 입지가 탄탄했다. 삼성그룹은 ‘소니 따라잡기’를 공공연히 외치고, 이건희 회장의 복심(腹心)이라 불리던 이학수 당시 삼성그룹 구조조정본부장이 기자들을 만난 자리에서 “소니를 제칠 수 있겠어?...”라며 말끝을 흐리던 기억이 난다. 삼성전자에 소니는 유력한 파트너로 늘 조심스럽게 대하고 경외감을 품던 대상이었다. 해외 주재원들이 소니의 프로젝션TV나 평면TV를 귀국용 이사짐 리스트 맨 위쪽에 올려놓을 정도로 소니는 한국 제품을 멀찍이 앞서갔다.
그런 소니가 대규모 적자에 허덕인 끝에 국제신용평가회사인 무디스로부터 신용등급을 투자부적격(정크)으로 강등 당했다. 1980년대 이후 20년간 세계 전자시장을 주름잡던 소니에는 굴욕이요, 우리에겐 격세지감이다. 이미 깊은 내상을 입은 소니의 실패 요인 분석은 명확하다.
워크맨, TV, 게임기로 세계시장을 쥐락펴락하던 혁신의 상징, 소니가 무너진 것도 혁신을 외면한 탓이다. 다른 부서와 담을 쌓고 부서 이익만을 추구하는 ‘사일로 현상(Silo Effect·사일로는 곡물을 저장하는 독립된 창고)’이 만연해 스스로 성장 동력을 갉아먹었다. 예컨대, 소니 내 세 곳에서 기능이 비슷한 뮤직클럽, 디지털 워크맨, MP3라는 이름의 제품을 연이어 시장에 내놓았지만 모두 애플 아이팟에 조금씩 못 미친다는 평가를 받았다. 각 사업부가 독립회사처럼 운영되는 경영방식 때문에 중복사업이 조정되지 않은 채 역량이 분산된 것이다. 소니는 영화, 음악 등 콘텐츠 사업에서도 독보적이었지만 하드웨어와는 별개로 놀아 시너지를 내지 못했다. 개별의 합이 전체의 합에 미달하니 버텨내기 어려운 게 당연하다.
소니 추락은 남 얘기가 아니다. 소니의 전설이 뒤안길로 사라져가는 것은 불확실성의 시대에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다. 한 시대를 풍미했으나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한 순간에 고난의 행군 대열에 들어선 곳이 수두룩하다. 휴대용 전화기의 혁신 아이콘 모토롤라는 구글에 넘어간 뒤 다시 중국 레노버에 인수됐고 세계 자동차산업의 리더 GM은 파산보호 신청서에 사인을 해야 했다. 리먼 브라더스, AIG, 노키아, 야후 등도 옛 영화를 뒤로 한 채 순식간에 쇠락했고 필름업체 코닥은 세계 최초로 디지털 카메라를 개발해놓고도 시장 흐름을 간과해 파산하고 말았다.
최근 한국의 간판기업들도 국제신용등급 평가에서 줄줄이 투자 부적격 추락을 걱정해야 할 판이다. 삼성전자와 현대차 의존도가 갈수록 높아지고 이들 쌍두마차마저 정점을 찍은 게 아니냐는 위기감이 감도는 상황이다.
소니를 바라보는 한국인의 심리는 복합적이다. 지난 2006년 일본에서 ‘기술공동(技術空洞)’이라는 제목으로 발간된 책이 한국어판에서는 ‘소니 침몰’이라는 자극적인 제목으로 바뀌었다. 그 덕분에 내용에 비해 더욱 많은 주목을 끌었다. 상술도 섞여 있겠지만 삼성이 소니를 따라잡았다는 성취감과 함께 소니의 몰락에서 뭔가를 위로받고 싶은 마음의 일단이 드러난 게 아닐까.
하지만 소니는 소니일 뿐이라고 치부할 수 없는 게 한국 기업들의 현주소다. 소니가 안고 있던 부서 간 칸막이와 폐쇄성, 단기 매출과 이익에 급급한 경영진 마인드 등은 우리에게도 경계대상이다.
글로벌 기업들의 경쟁은 기업 대 기업 차원을 넘어선 점에도 주목해야 한다. 이젠 네트워크 대 네트워크 경쟁이다. 삼성전자가 애플과 다투는 것은 삼성전자와 애플이 그 협력업체들의 네트워크를 포함해 경쟁을 펼치는 것이다. 공동운명체 인식이 회사 내부와 외부에서 동시에 확산될 때 진정으로 지속가능한 경쟁력이 생겨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