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걱거리는 나무계단을 올라가면 그 찻집이 있었다. 그 계단이 끝날 무렵이면 안에서 들려오던 음악, 그건 대체로 반 클라이번이 연주하는 차이콥스키의 피아노 협주곡이거나 브루노 발터가 지휘하는 베토벤의 심포니일 때가 많았다. 대학 1학년 때 드나들던 찻집, 최백호가 노래하는 ‘낭만에 대하여’처럼 ‘그야말로 옛날식 다방’이었다. 거기서 내 첫사랑이 시작되었다.
목조계단. 클래식 음악. 찻집… 그리고 첫사랑. 이렇게 이어가면 누군가는 아취(雅趣) 있는 그림을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다방은 지저분하고 난잡하기 짝이 없는 재래시장, 그곳에서도 비린내 가득한 어물전 뒷마당을 벗어나자마자 골목길 하나 건너에 자리해 있었다. 그 옆으로는 강아지가 시도 때도 없이 오줌을 갈기고 가는 국보 몇 호라는 석탑이 온갖 오물에 둘러싸여 모욕을 당하고 있었고, 골목을 빠져나간 길 저편에는 미군유도탄기지와 비행장 활주로가 언제 바라보아도 낯선 불빛 속에 드넓게 펼쳐져 있었다.
그때 그 다방에는 딱히 하는 일을 꼬집어 말하기 어려운 남자 종업원이 하나 있었다. 때로는 차를 나르기도 하고 때로는 음악을 틀기도 하고 때로는 삐걱거리는 계단에 걸레질도 하는 청년이었다. 그리고 때로는 자기보다 조금 나이어린 여자 손님들을 마주하고 앉아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그 이야기의 백미가 비 내리는 날의 메콩강과 거기서 자살하려는 여자가 있는 그의 꿈이었다.
당시로서는 베트남의 메콩강이라는 이름이 낯설지 않았다. 베트남 전쟁에 많은 청년들이 파병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소설가로보다는 조선일보의 언론인으로 더 알려졌던 선우휘 씨가 그 무렵 <메콩강은 흐른다>라는 소설을 쓰기도 했다. 우리는 그렇게 메콩강이라는 이름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먼 어느 남의 나라의 강일 뿐 티베트 고원에서 발원해 베트남을 지나 동남아시아를 관통하며 흐르는 4000㎞가 넘는 강으로, 동남아시아 사람들에게는 삶의 터전이 되는 강이라는 것을 어찌 알았으랴.
내가 처음 이 청년의 꿈을 들은 것은 어느 눈 내리던 날이었다. 그의 이야기는 멀리 뒷자리에 앉아 귀동냥으로 듣기에도 황당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이야기는 이랬다. 자신은 이제 월남으로 가야 한다. 메콩강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고, 비 내리는 날 메콩강 다리에서 자살하려는 여인을 구해야 하기 때문이다. 강물 속으로 뛰어내린 그녀를 자신이 구한 후 부잣집 외동딸인 그녀와 결혼해서 살아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이 청년보다도 내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그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듣던 여자 손님들이었다. 감동어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면서까지 그의 꿈을 듣고 있던 모습은 기이하기까지 했다. 처음 이 이야기를 들었던 겨울이 가고, 봄을 지나 여름이 왔지만 그는 베트남으로 가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 장맛비 내리던 날도 그는 뒷자리에서 여전히 자신의 꿈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또 얼마가 지나서 그 청년이 다방에서 사라졌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설마 그가 메콩강으로 떠났는지 나는 누구에게도 물어보지 못했다. 뭐 저런 놈이 있나, 생각하면서 차라리 메콩강 물속으로 걷어차 버리고 싶었던 그 녀석이 어쩌면 정말 메콩강으로 떠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지난해 15년간 머물던 대학을 정년퇴임하면서 나는 꽤 많은 것들을 꿈꾸었었다. 작가로 살아왔으니 이제 작가로 돌아가면 될 터인데도 무언가 정년이라는 그 ‘나이’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먼저 나의 일, 소설쓰기에 대해서였다. 앞으로 몇 권의 책을 더 쓸 것인가를 곰곰이 생각했고, 이제부터 해야 할 일은 ‘나 아니면 아무도 쓰지 않을 책’만을 몇 권 더 쓰자는 참 기특한 생각도 했었다. 그렇게 해서 일이 끝나면 손을 털고 ‘남은 자유’ 속으로 떠나자는 것이었다.
그 ‘남은 자유’가 또 꿈이 되었다. 사진을 찍으러 다니고도 싶었다. 목공예를 배워서 내가 내 손으로 내가 쓸 의자나 탁자를 만들고도 싶었다.
이 ‘남은 자유’ 가운데는 미국 플로리다에 위치한 항구도시 키웨스트를 찾아가는 꿈도 있었다. 오직 극작가 테네시 윌리엄스의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다. 테네시 윌리엄스가 브로드웨이에서 성공한 첫 작품은 <유리동물원>이었다. 그는 이 작품의 성공으로 일약 인기작가가 되면서 하룻밤 숙박비가 예전의 한 달 치 생활비와 맞먹는 호텔에서 화려한 생활을 시작한다. 매일 밤이 파티로 지새는 나날이었다. 그러나 그는 다음 작품을 쓸 수가 없었다. 써지지가 않았다. 결국 그는 뉴욕에서의 그 번드르르한 생활을 접고 예전에 살던 키웨스트로 내려간다.
지저분한 시궁창과 가난이 득시글거리는 키웨스트로 돌아온 그는 거기에서 포커와 술로 쓰레기처럼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내들과 몰락한 남부의 영화를 잊지 못하면서 부서져가는 여인의 이야기를 써내려갔다. 이 작품 <포카의 밤>이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로 제목이 바뀌어 무대에 오른다. 그리고 현대의 고전이 되어 오늘도 세계의 어딘가에서 밤을 밝히며 “저는 언제나 모르는 사람들의 친절에 기대어 살아왔답니다”하는 블랑슈의 대사가 울려 퍼진다.
테네시 윌리엄스는 쓰고 있다. 내가 성공한 이후의 삶은 하루하루가 상실의 나날이었다고. 아침마다 잠에서 깰 때면 내 손목시계의 초침은 재깍거리며 돌아가고 있었다고. 그 초침소리는 마치 ‘상실(Lost), 상실, 상실’하고 울리는 것 같았다…라고.
테네시 윌리엄스가 이 삶을 상실의 나날이라고 했던 그 키웨스트에 가서 그를 추억하며 걷고 싶다.
그 항구 어디쯤에서 나도 ‘Lost, Lost’하고 중얼거려 보고 싶다. 그러나 이 많은 꿈들의 어느 것을 향해서도 나는 아직 한 걸음도 떼어놓지 않은 채 1년을 넘게 쪼그리고 앉아만 있다.
며칠 전이었다. 문득 내게 비 내리는 날의 메콩강과 거기서 자살하려는 여자를 구하러 가는 청년의 꿈이 떠오른 것은. 그 청년의 꿈이나 키웨스트를 향한 내 꿈이나 황당하기로는 형님 아우 사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섬뜩하게 찾아온 것은 그 다음이었다.
홍해가 갈라지듯 두 가지로 삶이 갈라져서 바라보였다. 더 많은 풍요를 위한 돈, 더 많은 안락을 위한 건강과 사회적 성취… 한쪽 바다에는 그것이 있었다. 키웨스트에서 중얼거려보고 싶은 ‘상실’은 다른 쪽 바다에 있었다. 그리고 두 가지 가운데 어느 것도 이루지 못한 채 한가운데 어정쩡하게 서 있는 것이 나였다.
한 생애 동안 우리는 얼마나 많은 꿈을 꾸고 또 부수는가. 얼마나 많은 밤을 그 꿈을 쌓아올리고 또 부수면서 뒤척이는가.
퇴근길의 누군가를 생각한다. 지하철에서 휴대전화에 열중하고 있는 앞자리의 승객을 바라보면서, 택시 안에서 불빛이 일렁이는 거리를 내다보면서, 정체가 계속되는 승용차 안에서 마음바닥을 긁고 가는 음악채널의 다이얼을 끄면서 문득 누군가는 생각하리라. 내 꿈은 무엇이었던가.
그때 그 시절의 꿈들은 어디로 갔는가. 아직도 가슴 바닥에서 그 꿈의 씨앗들은 싹이 틀 날의 지열과 햇빛과 물기를 기다리며 웅크리고 있는가. 내가 끝내 버리지 못하는 꿈들은 이제 무엇이 되어 남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