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죽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천국에 가고 싶은 사람들조차 그곳에 가기 위해 죽고 싶어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죽음은 우리가 모두 공유하는 목적지입니다. 그 어느 누구도 죽음을 피한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래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죽음은 아마도 인생에 있어서 최고 발명품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삶을 변화시키는 원동력입니다. 죽음으로 오래된 것들은 새것에 길을 만들어 줍니다.”
스티브 잡스가 2005년, 미국 스탠퍼드대학교 졸업생들에게 이와 같이 조언했다. 시간은 지나보면 그 기간이 아무리 길더라도 순간일 뿐이다. 엊그제 고등학교에 입학한 것 같은데 벌써 수십 년이 지나갔다. 예를 들어 우리가 20년 후에 2013년을 회상한다고 하더라도 그 20년이란 세월은 순간일 뿐이다. 그래서 고대 그리스인들은 지내보면 순간인 시간을 ‘크로노스’라고 불렀고, 순간이었지만 그 순간의 경험이 지속되어 영원이 되는 시간을 ‘카이로스’라고 불렀다. 인생에서 강물처럼 야속하게 흘러가버리는 ‘크로노스’를 ‘카이로스’로 변화시키는 기술을 ‘예술’이라고 불렀다.
종교에서 특히 ‘사후세계’라는 개념을 정교하게 발전시켰다. 아무도 죽었다 살아온 사람이 없기 때문에 죽음은 바로 신비이며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만드는 특성이다. 종교에서 ‘사후세계’는 인간이 죽은 후 그 개인의 정체성 혹은 의식의 본질적인 부분이 계속해서 존재하는 영역이다. 불교와 힌두교와 같은 종교에서 인간은 환생하며 사전(死前)세계와 사후(死後)세계 사이에 살고 있으며, 사전세계에서의 행동인 업(業)에 따라 현재 세계의 생명의 형태가 결정된다. 유대교-그리스도교-이슬람교에서 인간은 지상에 살아있는 동안의 행위 혹은 믿음에 견주어 천국이나 지옥에 간다. ‘사후세계’의 존재에 대한 철학적인 설명 중 하나는 소위 ‘파스칼의 내기’이다. 17세기 프랑스 철학자, 수학자이자 물리학자인 블레즈 파스칼(1623~1662)은 그의 작품 <팡세>에서 사후세계의 존재를 믿던 믿지 않던 이성적인 사람은 신의 존재와 사후세계를 믿는 것이 이득이라고 주장했다. 만약 신이 없다고 하더라도 일생을 정직하게 살았기 때문에 별 손해가 없다.
그러나 반대 경우를 상정해 보자. 만일 무신론자가 죽은 후 사후세계가 없다면 별 손해를 당하지 않지만 어떠한 이득도 얻을 수 없다. 그러나 만약 신이 있다면 그 사람은 무신론자이기에 사후에 큰 손해를 본다는 주장이다. ‘파스칼의 내기’는 확률 이론과 의사결정 이론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는 점에서 획기적이지만 신의 존재나 사후세계를 이성을 통해 알려는 전형적인 계몽주의적 설명이다.
18세기 독일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1724~1804)는 도덕적인 삶이 가장 이성적인 선택이며, 이성적인 선택은 그 선택에 대한 ‘상벌(賞罰)’이라는 정의가 실행될 때 진가를 발휘한다고 했다.
이 세상에는 악한 사람들도 행복하게 살기 때문에 정의가 실현된다고 볼 수 없고 도덕적인 행위도 이성적이지 않다. 삶은 공평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도덕적인 삶의 이성적인 근거는 사후세계를 기초로 한다. 전통적인 그리스도 사후세계에서는 죄인은 벌을 받고 의인은 상을 받는 사후세계가 존재한다. 칸트는 사실 그리스도교의 사후세계는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 그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이성적인 삶, 도덕적인 삶을 가능하게 하는 지렛대로 사후세계에 대한 개념이 존재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사후세계에 대한 체험, 소위 ‘임사체험’을 하고 그것을 증언하는 사람들의 기록은 지극히 개인적이어서 그 내용이 아무리 구체적이라 할지라도 객관적인 동의를 얻지 못해왔다. 임사체험을 증언한 책들의 형태는 대개 다음과 같다. 혼수상태에 빠져 거의 죽음의 상태에 빠진다. 신체기능은 마비됐지만 빛과 찬란한 색깔과 드넓은 경관을 경험한다. 이 모든 경험이 신체와는 상관없이 일어난 경험이다. 기적적으로 살아난 사람은 자신의 경험을 말하고, 그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은 감격한다. 건강을 회복해 일상으로 돌아온 그 사람은 삶이 근본적으로 변하고 자신의 생생한 경험을 사람들에게 기꺼이 말하려 한다.
최근 한국에서 번역되어 출간된 <나는 천국을 보았다>는 이전의 서적들과는 다르다. 뇌사상태에서 7일 만에 살아 돌아온 사람이 무신론자이며 하버드대학교 신경외과 의사를 지냈고 세계적인 뇌신경과학자인 이븐 알렉산더이기 때문이다.
알렉산더는 원인을 알 수 없는 박테리아성 수막염에 걸려 혼수상태에 빠져 뇌 부위가 완전히 정지됐고 생물학적으로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7일째 되는 날에 그는 기적처럼 다시 눈을 떴고, 일상으로 돌아와 자신이 아는 최첨단 과학적인 이론과 추론으로 사후세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람들이 이 책에 열광하는 이유는 우리 사회에 깊이 뿌리박힌 학벌주의 때문이다. 실제로 그의 학벌이나 놀라운 경험에 대한 이야기가 사후세계의 존재를 증명한 것은 아니다. 이 책에 대한 반응은 알렉산더가 뇌 상태에 대해 가장 많이 아는 전문가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의 경험을 믿을 수가 있는가?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가 아는 모든 과학적인 지식도 한 개인의 생각과 감정에서 온다. 객관성이라는 과학탐구의 근간도 주관성에 근거하고 있다. 알렉산더가 사후체험을 한 내용이 우리의 삶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이런 임사체험을 한다는 현상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무엇인가? 이런 내용들은 인생에는 우리가 알 수 없는 신비가 존재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지 않은지.
수많은 종교들에서 사후세계와 그 담론이 그 종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을 조절할 수 있는 효율적인 도구가 된다. 1세기 팔레스타인의 유대교의 한 분파였던 바리새인들이 청년 예수에게 자꾸 질문한다. 천국이 어디이고 언제 오는지. 청년 예수는 천국은 인간이 볼 수 있는 장소도 아니고 인간이 존재하는 시간도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천국은 너희들 안에 있다’라고 말한다.
천국은 죽은 다음에 가는 곳이 아니라 오늘 내가 존재하는 바로 여기에서 내 가족과 이웃들과의 이상적인 상태이며 추구해야 할 공동체이다. 오늘을 인생의 마지막 날처럼 살아 가족과 이웃과 심지어는 원수까지 이해해주고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일 때 여기가 천국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