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공부라는 말을 좋아한다. 언젠가 은퇴해서 아무 일도 안 하고, 한없이 책 읽으면서 공부만 하는 게 인생의 큰 소원이다. 한 계절에 하나 정도 마음 끌리는 공부 주제를 염두에 둔 채, 산더미처럼 책과 논문을 쌓아둔 채, 하나씩 읽으면서 요약하고 정리해 초록(抄錄)을 만들고 작은 의견을 덧대면 얼마나 행복할까 싶다.
비슷한 말로 배움이나 학습도 있으나, 어쩐지 공부란 말에 더 끌린다. 배움은 가르침과 짝을 이룰 때 온전해지므로, 반드시 선생님이나 모범 답안 같은 게 있어야 할 듯하다. 학습은 체계와 연관이 있어 딱딱한 느낌이 드는 데다 괜히 강제나 의무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공부엔 ‘스스로’의 뜻이 깃들어 있으므로 자립적·자발적이다. 가르치는 사람이 없어도 공부는 홀로 애써서 그 내용을 깨우칠 수 있는 데다, 대상이 딱히 정해져 있지도 않아서 자유롭다. 특히, 인생은 배움이나 학습보다는 공부와 이어질 때 훨씬 자연스럽다.
한자로 공부를 工夫 또는 功夫라고 쓴다. 工夫는 한국에서, 功夫는 중국에서 주로 쓰인다. 공(工)과 공(功)은 서로 통용되는 글자이므로 그 뜻은 같다. 이 말은 본래 시간을 뜻한다. 한마디로, 공부는 어떤 일이 머리 또는 몸에 완전히 익숙해질 때까지 시간을 들여서 차곡차곡 공을 쌓는 일이다. 돌을 하나씩 올려야 탑을 이룩할 수 있듯이, 공부엔 요령 같은 건 따로 없다. 오로지 바른 뜻과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하루하루 꾸준히 정진하는 것이 유일한 길이다.
<자신을 속이지 않는 공부>(창비)에서 박희병 서울대 교수는 공부엔 ‘실용의 공부’와 ‘무용의 공부’가 있다고 말한다. 실용의 공부는 시험, 입시, 자격증 등을 따는 데 필요한 공부, 좋은 성적으로 얻고 먹고사는 데 도움을 주는 공부, 하우투(How-to) 형태로 제공되어 현실 문제 해결에 직접 도움에 되는 공부를 말한다. 실용의 공부가 모자라면, 아마도 당장 생계가 곤란해질 수 있다.
그러나 실용의 공부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실용이 삶의 전부는 아닌 까닭이다. 무엇을 위한 실용이고, 어디로 가는 실용인지 묻지 않는 공부는 결국 자기 삶을 공허하게 한다. 그런 공부는 “타인을 지배하기 위한 공부, 경쟁에서 남을 이기려는 공부, 출세하기 위한 공부, 돈을 많이 벌고 부귀영화를 얻기 위한 공부, 남이야 무슨 고통을 겪는 자기만 잘살면 된다는 공부”에 불과하다. 의미와 가치가 담기지 않는 공부는 우리를 불길에 뛰어드는 부나비처럼 만들 뿐이다. 일찍이 장자는 말하지 않았는가. “출세할 생각으로 공부한다면 공부에 해가 된다. 그런 생각을 품으면 반드시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을 하면서 견강부회하게 되므로 문제를 일으킨다.”
무용의 공부는 인간다운 삶에 도움 되는 공부 또는 진정한 나를 찾는 데 필요한 공부다. 일찍이 연암 박지원이 보여주었듯이, 무용의 공부는 “눈 내리는 막막한 벌판에 홀로 서서,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떤 식으로 이 유한한 생을 살아야 옳은가?’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라고 문득 스스로에게 절실히 물을 때 비로소 의미를 얻는 공부”이다. 무용의 공부는 실용의 근원을 따지는 공부이고, 실용의 나아갈 길을 질문하는 공부이다. 이 공부는 눈앞의 일에는 도움 되지 않을 수 있어도, 삶 전체를 하루하루 더 나은 쪽으로 이끌어간다.
저자에 따르면, 오늘날 세상에서 번성하는 공부는 지나치게 실용의 공부에만 치우쳐 있다. “실용의 밑바닥 또는 저 너머에 있는” 무용을 무시하려 하기에 “맹목과 자기 상실”이 넘쳐난다. 인간보다 돈을 더 숭상하는 “배금주의와 냉혹한 이기주의, 성장주의와 시장 만능주의”가 온 세상에 횡행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근본과 말단이 뒤집힌 세상은 위기를 향해 치달을 수밖에 없다.
이 책은 실용의 공부 이전에 무용의 공부, 즉 인간적 완성을 위한 공부에 힘썼던 옛 선인들의 말들을 엮은 책이다. 공자, 주희, 왕수인, 이이, 이황, 박지원, 정약용, 김정희 등 글 속에서 공부에 관한 잠언들을 가려 뽑았다. 잠(箴)은 본래 대나무를 깎아 만든 침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 말이 점차 마음의 병을 바로잡는 데에도 쓰이면서 자신 또는 타인에게 주는 경계의 말을 뜻하게 되었다. 예부터 선비들은 이 책과 마찬가지로 특정한 주제에 맞추어 일상에서 거울로 삼을 만한 잠(箴)을 짓거나 엮어서 삶의 길잡이로 삼곤 했다.
책에서 다루는 공부의 범위는 매우 폭넓다. 율곡 이이는 말했다. “공부는 일상과 일 속에 있다. 평소에 행동을 공손히 하고, 일을 공경히 하며, 남을 진실하게 대하는 것, 이것이 곧 공부라고 할 수 있다. 책을 읽는 것은 이 이치를 밝히고자 해서다.” 이 말처럼 이 책에 담긴 공부는 정보나 지식에 대한 학습보다는 독서, 글쓰기, 인간관계, 삶의 태도 등 좋은 삶을 사는 데 다져야 할 마음가짐에 관한 공부에 기울어져 있다.
‘자신을 속이지 않는 공부’라는 제목부터가 그렇다. 이 제목은 “난 치는 데 손대자면 마땅히 자신을 속이지 않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라는 추사 김정희의 글에서 따온 것이다. 문인화의 난초는 현실의 꽃과 풀이 아니라 정신적 풍경, 즉 군자의 자태이다. 문인화는 한낱 손끝의 재주론 그릴 수 없다. 난을 제대로 치려면, 먼저 자기 몸과 마음부터 갈고 닦아 군자의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 추사는 말한다. “서법(書法)은 전해 받을 수 있지만, 정신과 흥취는 자신이 스스로 이룩하는 것이다. 정신이 없는 글은 그 서법이 아무리 볼 만해도 오래 두고 감상하지 못하며, 흥취 없는 글은 그 글씨가 아무리 아름다워도 고작 글씨 잘 쓰는 기술자라는 말밖에 듣지 못한다.” 따라서 무용의 공부인 자신을 속이지 않는 공부, 진정한 자신을 잃지 않는 공부가 실용의 공부인 난을 치고 글씨를 쓰는 공부보다 앞서야 하는 건 당연하다.
그런데 모든 공부가 그러하듯, 무용의 공부 역시 한순간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배를 저어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과 같은(주희)” 큰 정성과 노력을 요구한다. 더욱이 세상이 온통 실용의 공부를 향해서만 치닫고 있으므로, 무용의 공부를 하려는 자는 의지와 용기, 강한 자기 확신과 끈질긴 인내가 필요하다. 그런 사람만이 “공부가 끊어지려는 곳에 이르렀을 때, 더욱 공부에 힘을 쏟아 배가 뒤집히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용의 공부는 “살아 있는 동안 끊임없이 해가면서 그것을 통해 자기 인격을 향상하고, 세상을 밝히며, 인간과 우주의 도를 깨달아가는 과정”이다. 상갓집 개처럼 천하를 떠돌며 도를 구하던 공자는 나이 오십에야 간신히 하늘의 뜻을 알았다[知天命]고 하지 않았던가. 따라서 “마지막 흙 한 삼태기를 붓지 않아 산을 못 이루더라도 그 중지하는 것은 내가 중지하는 것이며, 평지에 흙 한 삼태기를 붓더라도 그 나아감은 내가 나아가는 것”이라는 담대한 마음을 품은 사람만이 무용의 공부를 잘할 수 있다. 무용의 공부를 할 때는 “공부하면 성인(聖人)이 될 수 있다”(서경덕)라고 믿고 그저 앞을 향해서 계속 걷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살아보고 나서야 그 가치와 의미를 알게 되는 것이 인생 아니던가.
장은수 문학평론가
읽기 중독자. 출판평론가. 민음사에서 오랫동안 책을 만들고, 대표이사를 역임했다. 현재 편집문화실험실 대표로 주로 읽기와 쓰기, 출판과 미디어에 대한 생각의 도구들을 개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