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와인 생산지인 보르도의 최근 분위기가 좋지 않다. 그 이유는 지역의 와인 등급을 가리는 ‘그랑크뤼’ 등급의 가장 높은 4개의 포도원 중 3곳, 샤토 오존, 샤토 슈발 블랑, 샤토 안젤뤼스가 이 등급을 탈퇴한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면 미슐랭 가이드의 3스타 식당 대부분이 가이드를 떠나기로 결정한 것과 같다. 이 정도라면 가이드를 앞으로 계속 발행할 수 있는지조차 의문스럽다.
보르도에는 여러 개의 와인 등급과 가이드가 존재하지만, 그중 가장 공신력 있는 것은 그랑크뤼 클라세라고 불리는 2개의 와인 등급이다. 하나는 보르도 서쪽에 위치한 메독 지역의 등급으로 1855년 나폴레옹 3세 때 만들어져 지금도 큰 변화 없이 유지되고 있다. 여기서 약 80㎞ 떨어진 생테밀리옹 마을에도 와인 등급이 있는데, 1955년 지역 조합에서 발의하여 프랑스 정부 산하의 INAO에 의해 인증되었다. 메독의 등급과 달리 최근까지 여러 번에 걸쳐 개정되었으나, 기본적인 구조는 샤토 오존과 샤토 슈발 블랑 2개의 포도원이 리드를 하며 그 아래로 2개의 등급을 두는 것으로 유지되어 왔다. 2012년에 샤토 안젤뤼스와 샤토 파비(Chateau Pavie)가 리더십에 합류하면서 등급체계의 근본적인 변화가 있었고, 올해 새로운 개정의 발표가 예정되어 있었다. 얼마 전 생테밀리옹 와인협회는 3개의 1등급 포도원이 탈퇴하더라도 2022년산 리스트의 발표는 예정대로 진행될 것이라고 공표하였다. 하지만 과연 전 세계의 컬렉터들이 이 리스트를 계속 신뢰할 것인가는 큰 의문이다.
이제 가장 큰 질문은 그랑크뤼 등급의 왕좌에 유일하게 남은 샤토 파비가 계속 이 리스트에 남아 있으며 생테밀리옹의 전통을 수호할 것인가이다. 오랫동안 보르도 와인을 즐겨온 독자라면 이미 눈치 챘을 터이지만 이 질문은 매우 아이러니하다. 왜냐하면 약 20년 전 지금의 주인이자 슈퍼마켓으로 재산을 쌓은 제라르 페르스가 샤토 파비를 인수하고 양조장과 포도밭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을 때 동네 사람들과 많은 전문가들은 전통을 파괴한다는 이유로 샤토 파비를 크게 비난하였기 때문이다. 아마 지난 100년간 샤토 파비만큼 논쟁적인 포도원은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나는 샤토 파비에 관한 지역 사회의 비난이 한창이던 2005년, 마침 생테밀리옹 지역에 거주하고 있었다. 내가 당시 시음했던 샤토 파비는 기존의 생테밀리옹 와인들과 크게 달랐다. 무엇보다 오래 숙성해서 마셔야 하는 지역 와인들과 달리 샤토 파비는 어리게 마셔도 표현력이 좋았다. 또한 산도와 타닌의 균형을 강조하는 다른 와인들과 반대로 공격적이고 진한 맛이 입에 감돌았다. 프랑스 현지의 평론가들은 이에 대해 과일폭탄이라고 하거나 화장을 지나치게 하였다거나 어떤 사람들은 샤토 파비는 프랑스 와인이 아니라 나파 밸리 와인이라고까지 비난하였다. 샤토 파비는 비록 고향에서는 인정받지 못했지만 미국과 일본, 그리고 우리나라의 와인 컬렉터들에게 인기를 끌었다. 덕분에 적자에 허덕이던 샤토 파비는 제라르 페르스가 인수한 첫해부터 흑자를 내기 시작하였다. 물론 오랫동안 유통에서 경험을 쌓은 제라르 페르스의 경영능력이 더해졌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코로나가 유행하기 직전 생테밀리옹을 방문하여 지역의 와인들을 시음한 적이 있다. 대부분의 와인들이 매우 강하고 달고 공격적으로 느껴졌다. 아마도 눈을 감고 시음하면 이 와인들이 신대륙 와인인지 프랑스 와인인지 전문가들도 알기 어려울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만약 20년 전이었다면 지역의 유통업자를 찾기도 어려웠을 거라고 상상하였다. 마지막으로 샤토 파비를 방문했을 때 나는 샤토 파비가 오히려 지역의 다른 와인과 비교하여 얌전하고 균형 잡히고 오히려 지역의 전통에 가까운 와인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샤토 파비의 맛은 20년 전에 시음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변한 것은 세상이었다.
지난 170년간 메독의 그랑크뤼 등급으로부터 우리가 배운 것 중 하나는 와인의 품질이 등급에 영향을 미치기도 하지만, 등급이 와인의 품질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는 점이다. 1855년 당시 그랑크뤼 등급의 별을 단 와인들보다 더 뛰어난 와인들이 많이 있었을 것이지만, 지금은 눈에 띄는 와인들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와인 애호가로서 나의 마지막 질문은 오랫동안 지역의 맹주 역할을 해온 슈발 블랑이나 샤토 오존의 자리를 샤토 파비가 온전히 차지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점이다. 가능성은 없지 않다. 특히 지금처럼 아시아 소비자들의 영향력이 점점 강해진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