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이들이 위대해지기를 꿈꾼다. 하지만 막상 위대함이 무엇인지 물어보면, 잘 대답하지 못한다.
2007년 토니 마요 하버드대학교 경영대학원 교수는 경영자 7000명 이상에게 설문을 돌려 위대함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물었다. 설문 결과, 가장 많은 경영자가 ‘전략적 비전을 설정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을 때 위대하다고 답했다. ‘혁신가 또는 개척자가 될 수 있는 능력’ 등이 그 뒤를 이었다. ‘많은 돈을 버는 것’은 별로 중요하다고 생각지 않았다. 위대함이란 앞날을 내다보고 남들보다 빨리 움직이는 힘과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불가능해 보이거나 무모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가능한 현실로 만들어 낼 때, 사람들은 위대함을 느낀다. 성공하면 좋겠으나, 사실 실패해도 상관없다. 때로는 도전 자체가 큰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마르틴 루서 킹은 생전에 흑백 평등을 거의 이룩하지 못했으나, 인간이 추구할 가치와 사회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 평생 그 일에 헌신한 것으로 위대함을 성취했다.
일찍이 철학자 니체는 <아침놀>에서 성취가 위대함의 조건이 아님을 알려주었다. “멀리, 가장 먼 곳까지 날아가는 이 모든 대담한 새들, 분명 그들은 어딘가에서 멀리 날아갈 수 없게 되어 돛대나 보잘것없는 암초 위에 웅크려 앉을 것이다. (중략) 우리의 모든 위대한 스승과 선구자들도 결국 멈춰 섰다. (중략) 나도 그대도 그렇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게 나와 그대에게 무슨 상관이 있으랴. 다른 새들이 더 멀리 날아갈 것이다!”
우리 삶의 마지막이 우아하거나 고귀할 필요는 없다. 탐구의 종말이 겨울비 맞은 새처럼 비참하고 불쌍해도 할 수 없다. 그러나 새가 “멀리, 가장 먼 곳까지 날아가는 새”였는지를 우리는 물어볼 수 있다. 게다가 이 새의 더 날 수 없는 무력함은 ‘여기까지’나 ‘이 정도면’ 같은 의지의 소실에서 온 게 아니다. 더 날고 싶지 않아서 멈췄거나 지쳐서 그만둔 게 아니라 몸이 힘을 다해서, 육체가 정신보다 먼저 패배해서 멈추게 된 것이다. 능동적 중단이 아니라 수동적 정지일 뿐이다.
살아 있는 한, 몸이 쇠락하지 않는 한, 설령 뜻한 대로 이루지 못하고, 고귀하지도 위대하지도 않게 결국은 비참하게 스러질지라도, 열심히 날갯짓해서 날 수 있는 마지막까지 날아가는 것, 이것이 위대함이다. 어차피 한 인간의 끝은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다. ‘죽음’이다. 인간의 유한성은 필연적으로 우리를 패배자로 만든다.
실패나 패배를 찬양해선 안 된다. 니체는 말한다. “날 수 있는 최대한을 다 날았다고 추론해서는 안 된다.” 실패해도 괜찮다는 말은 나약한 사람들이나 하는 것이다. 성공이 좋고, 이룰 수 있는 것은 모두 성취해야 한다. 그러나 마지막에 다가올 패배 자체는 생명 전체에 주어진 필연이므로, 우리 삶을 평가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하지 않다. 더 멀리 못 간 것이 그 새한테는 억울하고 분통이 터지겠으나, 그의 비행이 무(無)가 되는 건 아니다. 그가 어떤 마음으로(의지), 어디를 향해(비전) 날아갔느냐 하는 점을 “더 멀리 날아갈” 다른 새들이 이어받아 기억하기 때문이다. 이 새가 멈춘 지점에서 이어받아 비행할 정도로 끝까지, 열심히 날아가는 것, 이것이 아마도 위대함일 것이다.
공자 역시 위대한 패배자였다. 도탄에 빠진 세상을 바로잡을 뜻을 품고, 열네 해 동안 천하를 떠돌았으나, 실제로 이룬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상갓집 개’라는 초라한 별명을 얻었을 뿐이다. 그러나 공자는 ‘이 길(斯道)’을 한순간도 포기하지 않았다. 사람이 마땅히 걸어야 할 크고 똑바른 길을 무한정 걸어갔다. 노자는 이 길을 ‘큰길(大道)’이라고 불렀다. 공자도 힘닿는 데까지 이 길을 함께 추구하자고 제자들한테 권하고, 스스로 그 길을 걸어갔다.
제자 중 한 사람인 염구가 선생님의 도를 좋아하지만, 힘이 달려 못하겠다고 하소연하자, 공자는 그를 준엄하게 꾸짖었다. “힘이 달리는 사람은 가다가 도중에 그만두는 법이다. 그런데 너는 지금 미리 선을 긋고 있다(力不足者, 中道而廢, 今女畵).”
염구는 재정 전문가였다. 계산이 무척 빨랐다. 평생을 걸어도 이 길에서 세속적 성취를 얻을 수 없음을 알았다. 힘이 달린다는 핑계로 이 길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다. 공문십철(孔門十哲)에 들 정도로 큰 재주가 있었다. 그러나 권력자의 사욕을 채우는 데 재주를 쓰다가 나중에 공자로부터 “내 제자가 아니다. 얘들아, 북을 울려 그를 꾸짖어도 좋다”라는 성토를 당한 적도 있다.
여기에서 공자가 말하는 역부족(力不足)은 단지 중도에 포기하는 일이 아니다. 공자는 강조한다. “하루라도 인(仁)을 행하는 데 힘을 쏟아부은 적이 있는가? 나는 아직 힘이 부족한 사람을 보지 못했다.” 역부족은 힘이 부족한 상태가 아니라 가고 싶어도 더 이상 갈 수 없는 상태를 뜻한다. 정약용은 이를 “가는 길 중간에 기력이 모자라 쓰러지는 일”이라고 풀이했다. 니체가 말하는 “어딘가에서 멀리 날아갈 수 없게 되”는 상태에 해당한다. 마음은 여전히 길을 가고 있으나, 몸의 기력이 따르지 못해 어쩔 수 없이 쓰러지는 것이다.
<예기>에서 공자는 말한다. “도를 향해 걷다가 중도에서 쓰러지더라도, 자신의 늙음도 잊은 채, 나이가 부족한 것조차 모르는 채, 나날이 힘껏 부지런히 행하다가 죽은 후에야 그만두는 것이다.” 늙음도 잊은 채, 시간이 없음도 알지 못한 채 하루하루 부지런히 자기완성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공자의 길이었다. 이 길을 걷는 것은 죽은 다음에야 비로소 멈출 수 있다는 것, 이것이 공자가 제자들에게 전하려 한 뜻이었다. 공자는 미리 선을 긋지 말라고 이야기한다. 선은 죽은 후에 저절로 그어지는 것이지 자신이 미리 긋는 것이 아니다. 공자는 니체의 새와 같았다.
니체와 공자는 인류의 역사 전체와 겨루면서 멀리까지 날아가는 방법으로 스스로 위대함에 도달했다. 희랍인들은 비극의 주역을 프로타고니스트(protagonist)라고 했다. 맨 앞(proto-)에 나서서 겨루는(agon) 사람 또는 겨루어 이겨서 맨 앞에 선 사람이란 뜻이다. 인생의 주인이 되려면 죽음이 닥치는 날까지 겨루기를 멈추면 안 된다. 나날이 자신을 이겨가면서 새로운 나를 건축하는 일을 한순간도 그치지 않는 사람만이 위대해진다. 니체는 말한다. “인간은 극복해야 할 무엇이다.”
선을 그을 때 위대함은 증발한다. 앞으로 나가지 않는 사람은 나날이 물러서는 것과 다름없다. <겨울 나라의 앨리스>에서 ‘붉은 여왕’이 말하듯, “제자리에 머물기 위해선 쉬지 않고 힘껏 달려야 하고, 어딘가 다른 곳으로 가고 싶으면 최소한 두 배는 빨리 달려야” 하는 법이다. 물론 ‘빨리’가 비유임을 잊으면 안 된다. 보노보는 환경 변화에 맞서서 느리게 진화하는 쪽을 택했고, 고래는 육지를 버리고 바다로 되돌아가는 쪽을 택했다.
흔히 착각하듯, 진화의 도정에서는 강하고 빠른 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다. 올바른 방향을 잡아서 쉬지 않고 걸어서 끝까지 변화에 적응하는 자가 살아남는다. 그래서 은나라 탕왕은 세숫대야에 선을 긋지 않고 죽을 때까지 걷는 법을 새겨 넣었다. “나날이 새로워지고, 또 나날이 새로워져라.(日新又日新)” 각자 나아가는 방향은 다를 수 있다. 더 높이, 더 멀리, 더 빨리, 더 강하게, 더 힘차게, 더 멋있게, 더 정확하게, 더 끈질기게……. 마침내 힘이 다해 멈출 때까지 매일매일 자신을 경신해 가는 것이다. 자신이 어디까지 왔는지, 무엇을 성취했는지 스스로 확인할 수는 없다. 더 멀리 날아갈 새들이 이어받아 기억한다면, 멈추어 선 자리를 확인하고 출발한다면, 당신은 위대함을 이룩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