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내다보는 존재다. 과거를 분석하고, 현재를 진단하며, 미래를 구상하려 애쓴다. 연말이 되면 예측해서 내년의 계획을 짜고, 연초가 되면 전망해서 한 해의 희망을 부풀린다. 공중을 나는 새들은 내일을 염려하지 않고 들녘의 꽃들은 훗날을 걱정하지 않는데, 인간만 주어진 하루에 충실하지 않고 눈을 멀리에 둔 채 앞날을 생각하면서 살아간다.
‘내다보기’는 인류의 고유한 특질 중 하나이다. 다른 생명체들이 내다보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으나, 인류보다 이 일을 잘하도록 진화한 생명체는 아직 없다. 유일한 도전자는 알파고 같은 인공지능이 있을 뿐이다. 처음부터 인류가 내다보기를 잘한 것은 아니다. 약 200만 년 전에서부터 8만 년 전 사이, 어느 시기에 인류는 보이지 않는 존재가 있다고 믿고 행동을 지속하는 힘, 즉 내다보는 힘을 획득했다. 상상력 말이다.
예를 들면, 투사 무기인 창은 상상력의 존재를 알려주는 중요한 문화적 상징이다. 창을 던지려면 자신의 운동 능력에 대한 정확한 판단과 더불어 멀리 떨어진 표적의 위치를 가늠하고 궤적을 떠올리는 역학적 상상력이 필요하다. 지평선 너머로 사라져 눈에 보이지 않는 사냥감의 속도와 방향을 정밀하게 추론하는 능력이 없다면 창 던지기는 무의미한 헛손질에 불과하다. 돌팔매나 부메랑, 활 등도 마찬가지다. 인류학적으로 볼 때, 이러한 사물의 존재는 곧바로 상상력의 탄생을 의미한다. 상상력은 기술 혁신을 일으키고, 기술 혁신은 상상력을 강화한다.
<전망하는 인간, 호모 프로스펙투스>에서 피터 레일턴 미시간대학 교수가 말하듯, 행동은 예측에 기반을 둘 때 성공 가능성이 크므로, 앞날을 내다볼 수 있다면 먹잇감을 획득하고 위험을 회피하는 경쟁에서 극히 유리하며, 협조와 협력이 필요한 상황에서 지혜롭고 현명하게 행동할 수 있으므로 사회생활을 잘하는 데에도 필수적이다. 예측 역량을 발달시킨 존재는 자연선택에서 살아남을 확률이 높아지기에, 이는 당연히 진화를 촉진한다. 예측과 행위의 상호 되먹임을 반복하고 가속하는 문화를 구축함으로써 인류는 지구의 정복자로 올라섰다.
절망이란 무엇인가. 도무지 앞이 보이지 않는 처지에 빠져 자기 힘으로는 살아날 길이 없는 상태이다. 인간은 전망하는 힘을 상실했을 때 자신을 파괴하는 거의 유일한 존재이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엥거스 디턴은 이를 ‘절망사’라고 부른다. 그가 <절망의 죽음과 자본주의의 미래>에서 주장하듯, “사람들은 더 이상 사는 것이 무가치하고, 사는 것보다 죽는 게 더 나을 것 같을 때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상상하고 계획하며 이에 맞춰 자기를 통제할 역능을 빼앗긴 인간은 우울증에 시달리고, 도태의 공포 탓에 약물 중독, 알코올 의존증, 극단적 선택 등으로 자신을 몰아간다. 미래에 대한 극한의 부정적 예측은 인간 내부에서 질병과 죽음을 생산한다. 예측하는 힘을 상실한 인간은 살아 있어도 이미 죽은 자, 즉 허깨비에 불과하다.
세계적 심리학자 로이 바우마이스터는 인간 의식의 본질이 “미래의 가능성을 시뮬레이션하는 능력”이라고 말한다. 내다보는 힘은 인간 정체성의 핵심이다. 현재보다 더 나은 삶을 떠올리고, 그에 맞추어 행동할 힘이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다.
좋은 사회는 인간을 자꾸 내다보게 만들고, 나쁜 사회는 인간을 절망시킨다. 2017년 한 해 동안 미국에서는 15만8000명이 절망사로 세상을 떠났다. 만석으로 비행 중인 보잉 737 여객기가 매일 세 대씩 추락해서 승객 전원이 사망하는 것과 같은 수치이다. 절망사는 199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 물결을 타고 전 지구로 퍼져나갔고, 지난 30년 동안 그 어떤 전염병보다 더 많은 인간을 죽음으로 몰아간 사회적 팬데믹이다. 모든 기대가 다 충족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녹색 세계사>로 유명한 역사 고고학자 클라이브 갬블에 따르면, “새로운 목표를 상상할 수 있는 사회적 맥락”이 주어지지 않으면 어떤 혁신도 불가능하다. 자신이 속한 공동체에서 지금 여기의 삶을 바꿀 수 있다는 아무 신호도 주지 않을 때, 즉 어떤 기대도 충족할 수 없는 불안에 떨어질 때, 인간은 우울증에 빠져 자기 자신을 공격하거나 소시오패스가 되어 타자를 공격한다. 우울증과 소시오패스의 숫자는 비례한다.
모든 인간이 똑같이 내다보지는 못한다. 큰 테두리에서 전망의 궁극적 원천은 공동체가 제공하지만, 전망의 역능은 각자 체화해야 한다. 약 4만 년 전에서 2만 년 전까지 인류는 ‘내다보는 힘’을 길러내는 문화 체계를 진화시켰다. 예술이다.
<옥스퍼드 세계사>에 따르면, 직접적으로 실용적 목적이 전혀 없는데도, 인류는 기이하게 빛나는 조개껍데기 보석을 패용하고 그릇에 기하무늬를 새겨 넣었으며, 물감을 개어서 창끝을 알록달록 물들였다. 모두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를 보이게 하려는 안쓰러운 몸짓이다. 연상하고 실천하는 내면의 창조성 없이 이런 행동은 불가능하다. 보이는 것을 압축하고 축약해서 기호로 표현하는 상징도 나타났다. 오늘날 우리가 상징을 볼 때와 똑같이 상징이 작동하려면 이를 본래 형상으로 되돌리는 정신적인 역량이 필요하다.
어두운 동굴 속에서 인류 최초의 예술가들은 목탄으로 윤곽선을 스케치하고, 단단하고 뾰족한 돌로 암석을 파고, 물감으로 벽면을 물들이면서 더없이 아름다운 벽화를 그려냈다. 진흙으로 형상을 빚어서 굽고, 돌을 섬세하게 다듬어서 조각하기도 했다. 최초의 예술이 설령 주술적·제의적 목적으로 생산되었을지라도, 곧바로 실용적 기능을 넘어섰다.
유명한 경제사학자 펠리페 페르난데스아르메스토에 따르면, “예술은 정신을 자극하고, 상상을 담아내고, 행동을 고무하고, 관념을 나타내고, 사회를 반영하거나 사회에 도전하는 새로운 종류의 힘”이 되었다. 예술을 통해 인류의 내면에서 ‘내다보는 힘’이 더욱더 활성화되자, 서서히 삶이 예술을 모방하기 시작한 것이다. 상징적 의사소통이 출현하고, 삶과 죽음을 구별하고, 물질적 우주 너머의 존재를 발명하고, 영혼을 생각하고 내세로 가는 길을 열었다. 상상한 대로 살아가는 문화가 인간 삶의 굳건한 기초로 자리 잡았다. 인류와 다른 생명체가 결정적으로 갈라진 순간으로, 진화인류학자들은 이를 ‘인간 혁명’이라고 부른다.
‘내다보기’는 크게 둘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상상이고, 다른 하나는 예측이다. 상상이 눈앞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보는 힘이라면 예측은 아직 없는 것을 보는 힘이다. 예측은 상상력과 더불어 이후에 진화했다. 아직 없는 것을 미리 보는 힘이 생겨나자 인류 문명의 위대한 도약이 시작되었다. 예측은 주어진 자연에 맞추어 살아가는 대신에 자연을 인간에 맞추어 변혁한다. 없는 것에서 있는 것을 떠올리는 힘 없이 이런 행위는 전혀 가능하지 않다. 농업혁명이든, 산업혁명이든, 정보혁명이든, 가상혁명이든, 결국 인류 문명의 전 역사는 그 표현형에 불과하다.
<전망하는 인간>에서 긍정 심리학의 창시자 마틴 셀리그먼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교수는 “마음이 지식의 보고가 아니라 예측의 동력”이라고 이야기한다. 과거와 현재를 분석하고 통합하여 미래를 예측하는 능력인 전망이 인간의 존재 이유라는 것이다. 인간은 과거의 영향에 좌우되기보다 미래의 이끌림을 더 많이 받는 존재이므로, 상상하고 예측하며 전망하는 힘 없이 인간은 자신의 삶을 가치 있게 만들 수 없다.
셀리그먼에 따르면, 창조의 중심에는 예술을 통해 훈련할 수 있는 상상력이 놓여 있다. 상상을 예측으로 바꾸어 가능한 미래로 만드는 힘이 전망이고, 전망을 새로움으로 이끄는 힘이 독창성이다. 독창성 중에서 고객이 좋아할 것을 골라내는 힘이 감식안이고, 감식안이 있는 사람만 창의성을 발휘하며, 창의성의 산물을 사회 전체에 대규모로 실현할 수 있는 역량이 있으면 혁신을 일으킬 수 있다. 혁신을 바란다면 감식안을 길러야 하고, 감식안을 작동시키려면 독창성을 키워야 하며, 독창성을 끄집어내려면 전망하는 힘이 있어야 하고, 전망하는 힘을 얻으려면 상상할 줄 알아야 한다.
다행히 선조들은 우리에게 상상하는 힘을 기르는 방법을 남겼다. 예술이다. 한 해가 시작됐다. 앞날을 전망하면서 혁신적 사고를 하려면, 무엇보다 소설을 읽고 미술을 관람하며 음악을 감상하는 일부터 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