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최초의 문학은 수메르 문명의 <길가메시 서사시>다. 주인공 길가메시는 인류 최초의 도시 국가 중 하나인 우루크(오늘날 이라크 남부)를 통치했던 실존 인물이다. 영웅이 처음부터 영웅이었던 것은 아니다. 숱한 모험을 치르고 온갖 고통을 겪으면서 성숙해서 내면의 위대함을 드러낸다. 물론 출생부터 다르긴 했다. 아버지는 우루크의 왕 루갈반다, 어머니는 닌순 여신이었다. 길가메시는 “3분의 2는 신이고, 3분의 1은 인간”이었으니, 보통 사람을 훌쩍 능가하는 아름다움, 건장한 체구, 강한 힘을 타고났다.
힘센 사람이 모두 위대해지는 건 아니다. 타고난 힘을 필요한 곳에 적절히 사용하지 못하는 사람은 오래지 않아서 몰락해 버린다. 힘은 산을 뽑고 기운은 세상을 덮었던 항우는 지배는 알았으나 통치는 몰랐기에 10년도 못 돼 천하를 내줄 수밖에 없었다. 힘 좋은 청년 길가메시는 한마디로 개차반이었다. 영웅다운 삶이 무엇인지 생각지도 않고, 힘을 이용해 막무가내로 약자들을 괴롭혔다. “시끄러운 길가메시! 오만한 길가메시!”라고 불릴 지경이었다. 길 가다 수틀리면 아들들을 쥐어팼고, 기분 내키면 처녀들을 약탈했다. 횡포를 견디지 못한 우루크 시민들의 분노와 슬픔이 메아리쳐서 신들에게 닿을 정도였다. 길가메시는 아직 자신의 위대한 소명을 알지 못했다.
인생 전체를 걸고 이루고 싶은 일이 없어서 한없이 방황하거나 눈앞의 욕망에 취해 살아가는 청년들은 어느 사회나 골칫거리다. 청년이 스스로 공동체를 위한 소명을 깨닫게 잘 이끄는 것이 어른의 의무다. 청년들이 이상하게 자랐다고 비난하고 한탄해 봐야 책임은 대부분 어른한테 있으니 제 얼굴에 침 뱉기에 불과하다. 시민들의 아우성을 들은 수메르 신들은 죽음이나 추방으로 길가메시를 징벌하는 대신 기꺼이 그를 창조해 세상에 있게 한 책임을 진다. 하늘의 신 아누가 창조의 여신 아루루를 불러 말한다. “그의 짝을 만드시오. 폭풍 이는 가슴은 폭풍 이는 가슴으로 상대해야 하는 법! 두 가슴이 맞대고 서로 싸운다면 우루크에 평화가 찾아들 것이오!”
아루루는 즉시 진흙으로 사람을 빚어 들과 산에서 짐승들과 어울려 사는 용사 엔키두를 짝으로 창조한다. “거친 숲에서 태어난” 그 역시 활력이 넘쳐서 “잠자지 않는 사람”이요, “보통 인간보다 키가 두 배나 큰” 비범한 인물이었다. 태양신 샤마시의 신녀 샴하트한테서 길가메시의 횡포를 들은 초원 영웅 엔키두는 우루크로 쳐들어와서 도시 영웅 길가메시와 제일 강한 자가 누구인지를 놓고 싸움을 벌인다. 문설주가 박살 나고 벽들이 흔들릴 정도로 격렬한 전투 끝에 길가메시는 간발의 차이로 엔키두를 메쳐서 승리한다. 엔키두는 바람의 신 엔릴의 이름을 빌려서 길가메시를 “모든 남자 중 제일 용맹한 자”로 인정하고, 완전히 쓰러지진 않았으나 한쪽 무릎을 꿇었던 길가메시는 입을 맞추면서 엔키두를 친구로 맞이한다. 이 일화는 도시 정착 문명과 초원 수렵 문명의 쟁투와 전환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만남에는 더 깊은 뜻도 담겨 있다. 이로부터 우애(Philia)라는 ‘새로운 질서’가 생겨난다는 점이다. 혼자일 때 두 영웅은 소명을 전혀 몰랐다. 타인과 어떻게 함께 살아야 하는지, 공동체를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길가메시는 방약무인으로 타인을 아랑곳하지 않았고, 엔키두는 타인과 떨어져 홀로 야생에서 짐승과 어울렸다. 나밖에 알지 못하는 인간은 아무 위대함도 이루지 못한다. 타자가 나만큼 똑똑하고 나만큼 능력 있음을 인정하고, 사람들과 우정을 나누고 협력해 일하는 방법을 찾지 못하는 인간은 길가메시처럼 악당이 되거나 엔키두처럼 외톨이로 머물 뿐이다.
갈 길 잃은 두 청년이 만나 친구가 되어 ‘쌍’을 이루자, 두 사람 내면에 새로운 가능성의 세계가 열리면서 자신을 증명하고 영원한 영광을 얻기 위한 위대한 여정이 시작된다. 두 친구는 힘을 합치고 서로를 격려해 가면서 원정을 떠나 삼나무 숲의 신 훔바바를 무찔러서 우루크의 거대한 성문을 마련하고, 이시타르가 보낸 불의 황소를 죽여 도시에 내린 가뭄을 해결하기도 한다. 혼자는 야만이고, 둘은 문명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한다. “우애 없는 삶은 가치도 없다.”
하나에서 둘로, 둘에서 여럿으로 나아가는 힘이 없을 때 인간은 결코 위대해질 수 없다. 공동 정체성을 이룩해서 서로 협력하고 경쟁하는 한 쌍은 창조의 기본 단위다. 우애 공동체 없이는 누구도 일상의 공허한 반복과 인생의 궁극적 허무에서 탈출할 수 없다. 인간은 자기 안에 갇혀 있으면 의미 있는 삶을 살지 못한다. 이 때문에 보들레르는 “한없이 내가 아닌 것을 갈구”했고, 랭보는 “나는 남이다”라고 선언했다. 혼자는 불모이고, 둘은 창조다. 길가메시처럼 적과 동침할 줄 아는 사람들만이 천하를 제패했다. 인간의 창조성은 낯선 존재를 곁에 두고 함께 일할 줄 아는 역량에 의존한다.
그러나 흔히 사람들은 인간이 이기적 유전자의 지배를 받는다고 착각한다. ‘이기적 유전자’ 같은 건 없다. 이 말은 비유일 뿐이다. 모든 생명체는 “유전자가 창조한 생존 기계”이고, 그 “행동은 유전자에 구속되어 있”으나, 유전자는 사실 이기주의 같은 건 알지 못한다. 유전자는 무한히 자기복제하는 성질을 띨 뿐이고, 그 방법은 신경 쓰지 않는다. 생명체는 자기를 우선 챙기는 것이 유전자 복제에 유리하면 홀로 움직이고, 함께하는 게 유리하면 기꺼이 협력해서 움직인다. 그리고 생명의 역사는 혼자보다 협력이 생존에 더 유리함을 알려준다.
마굴리스의 <공생자 행성>에 따르면, 생명 진화의 역사는 협력의 진화사다. 진핵생물의 세포 자체가 미토콘드리아, 엽록체 등 원핵세포의 공생체로 처음 생겨났다. 이어서 진핵세포와 산소 소비 박테리아가 공생하면서 동물 세계의 토대를 이루고, 진핵세포와 광합성 박테리아가 공생해서 식물 세계가 탄생했다. 또한 산소를 생산하는 식물과 산소를 소모하는 동물이 서로 협력함으로써 현재 같은 생태계가 마련됐다.
비유를 이어가자면 유전자라는 극미한 세계의 이기성은 세포 정도의 복잡성만 가져도 이타적 협력 없이 실현될 수 없다. 공생체로 존재할수록 이기적 유전자의 생존에 유리해지는 것, 어찌 보면 이것이 생명 진화의 진짜 원리다. <협력하는 유전자>에서 신경생물학자 요한 바우어는 협력과 소통이 생명의 두 원리라면서, 아예 유전자 자체가 RNA와 DNA의 공생으로 탄생했다고 말한다. 유전자, 세포, 생명체 사이의 지속적 소통과 협력 없이는 어떠한 진화도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세계적 영장류 학자 마이클 토마셀로는 인류는 ‘합리적 이기주의자’인 침팬지와 달리 ‘타고난 이타주의자’라고 말한다. 인류는 침팬지 등 사촌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는 대규모 협력 행동을 한다. 반복 협력이 엄청난 성공을 가져왔기에, 인류는 선천적으로 타자에 공감하고, 타자와 협력하며, 공평성에 따라서 행동하는 능력을 타고나게 진화했다. 물론, 인류가 다른 인류에게 항상 이타적인 것만은 아니다. 자기 집단 바깥의 존재에 대해서는 경쟁과 적대를 서슴지 않으면서 극도로 잔인한 이기적 존재이기도 하다.
20만 년 전 지구에 나타난 이래로 호모사피엔스는 나를 우리로 만들고, 우리를 마을로, 도시로, 국가로, 제국으로, 인류로 확장함으로써 적대를 우애로 바꾸어 왔다. 속도는 느렸으나 방향은 선명했다. 친밀성을 이룩해 협동하지 않는다면, 인류 전체가 번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류의 성인들은 모두 우애를 가르쳤다. 예수는 사랑을, 붓다는 자비를 권했다. 또 공자는 인(仁)이 “나를 극복해 예로 돌아가는 일(克己復禮)”이라고 말했다. 나를 다스리는 수기(修己)를 통해 기(己)의 범위를 집안을 돌보고(齊家) 나라를 다스리며(治國) 온 세상을 평화롭게(平天下) 하는 데까지 넓히는 일이야말로 군자(君子)의 과제였고, 인간 교화의 궁극적 목표였다.
길가메시와 엔키두가 만났던 문명의 여명에 인류는 이미 깨달았다. 경쟁은 야만이고, 협력은 문명이다. 우애를 모르는 인간은 결코 인간답게 살 수 없다. 알베르 카뮈는 말한다. “영웅들에게는 딱 하나의 사치가 있다. 바로 인간관계라는 사치다.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강렬하고 경건한 우애야말로 진정한 부이다.” 우애가 사치가 된 것, 어쩌면 이것이 우리 시대의 비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