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랫동안 글을 써오면서 몇 개의 장르를 스스로 만들고, 그 틀 안에서 사유를 확장해왔다. 문학은 반드시 정형화된 갈래 안에서만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형식은 사유를 담는 그릇일 뿐, 그릇의 모양은 작가의 체험과 철학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믿는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소묘시초(素描詩抄) – Rude Vignette’라는 형식이다.
‘Rude’라는 말에는 거칠고 소박하다는 뜻이 담겨 있다. 나는 이 단어가 지닌 투박함이 좋았다. 완성된 조각상보다,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원석의 표정이 더 진실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소묘(素描)’는 채색 이전의 선(線)이다. 색을 입히기 전, 사물의 본질을 잡아내는 가장 단순한 방식이다. 릴케의 시적 세계를 옮긴 김춘수 시인이 ‘꽃의 소묘’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도, 박목월 시인이 ‘보랏빛 소묘’라는 제목 아래 자작시 해설을 엮은 것도, 모두 본질을 향한 시적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한다.
내가 말하는 ‘소묘시초’ 역시 그러하다. 거창한 서사나 완벽한 운율을 추구하기보다, 그날의 공기와 빛, 그리고 마음의 떨림을 선으로 남기는 작업이다. 스케치처럼 빠르게, 그러나 진심을 담아. 완결된 대작이 아니라, 순간을 붙잡는 기록. 다듬어지기 전의 감정이 살아 있는 문장. 그것이 내가 지향하는 소묘시초다.
나는 이 형식을 골프에 대입했다. 골프장은 단순한 경기장이 아니다. 그곳에는 땅의 역사와 바람의 방향, 지역의 기억이 스며 있다. 티잉 그라운드에 서는 순간의 긴장, 드라이버를 쥐는 손끝의 미세한 떨림, 동반자의 호흡과 농담, 캐디의 한마디 조언까지도 모두 하나의 장면이 된다. 나는 그 장면을 스케치하듯 시로 남겨왔다. 그것이 바로 Traces de poe… sie, 곧 ‘시적인 흔적’이다.
‘Trace’라는 단어를 나는 좋아한다. 흔적은 크지 않다. 때로는 눈에 잘 띄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존재했다는 증거다. 발자국이 모래 위에 남듯, 바람이 지나간 자리에도 보이지 않는 선이 남는다. 우리는 대개 결과만을 기억하지만, 나는 그 과정의 흔적을 남기고 싶었다. 골프 한 라운드가 끝난 뒤 스코어카드는 숫자만을 말하지만, 나에게 중요한 것은 그날의 하늘빛과 바람의 체온이다. 여행에서도 마찬가지다. 낯선 도시에서 마신 한 잔의 와인, 우연히 마주친 노인의 표정, 해 질 무렵 골목의 그림자. 그 순간은 지나가면 사라진다. 나는 그 찰나를 붙잡고 싶었다. 그래서 시로 남겼다. 와인의 구조와 향, 타닌의 결까지 시어로 풀어 전문지에 기고하기도 했다. 순간의 감흥은 기록하지 않으면 증발한다. 남겨진 흔적만이 기억이 되고, 기억은 시간이 지나 역사가 된다.
사랑의 감정을 담을 때는 ‘Traces d’Amour’,자연과 감성의 결을 담을 때는 ‘Traces de poe… sie’.결국 내가 하는 일은 찰나를 붙잡는 일이다. 순간을 기록함으로써 그것을 영원에 가까이 두는 일이다. 이처럼 문학적 형식을 굳이 설명하는 이유는, 골프를 더 깊이 즐기기 위함이다. 많은 이들이 골프를 스코어의 경쟁으로만 생각하지만, 나는 골프를 자연 속에서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라 여긴다. 골프장을 찾을 때마다 그곳의 풍향과 지형, 지역적 맥락을 시로 표현하면 라운드는 전혀 다른 차원의 체험이 된다. 공을 치는 행위가 아니라, 자연과 호흡하는 시간이 된다. 인천 영종도, 국제공항 활주로 옆에 자리한 ‘스카이72 골프클럽’은 그러한 체험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 장소였다. 활주로를 오르내리는 비행기와 갯벌의 바람, 수평선 위로 번지는 노을빛이 어우러진 공간. 하늘·오션·레이크·클래식 코스를 포함한 72홀 규모의 장대한 무대는 단순한 골프장이 아니라 하나의 풍경시(風景詩)였다.
2005년 개장식 날, 나는 그 자리에 있었다. 조성 과정의 어려움을 회상하며 눈시울을 붉히던 대표의 모습은 지금도 생생하다. 기념 대회에서 내가 72타로 우승한 순간, 숫자 ‘72’는 상징처럼 다가왔다. 72홀의 공간에서 72타를 기록한 우연은 마치 하늘이 남긴 장난 같은 기적이었다.
특히 하늘코스는 품격과 난이도를 동시에 갖춘 코스였다. 티샷을 날리면 머리 위로 비행기가 지나가고, 바람은 바다 냄새를 실어왔다. 공이 하늘을 가르며 날아갈 때, 나는 잠시 승부를 잊고 풍경에 몰입했다. 그곳에서는 경쟁심보다 경외심이 먼저 일어났다. 클럽을 내려놓고 하늘을 올려다본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골프는 내기와 승부의 묘미도 있지만, 본질은 자연 속에서 자신을 돌아보는 데 있다. 바람을 읽고, 잔디의 결을 느끼고, 동반자의 표정을 살피는 순간 우리는 일상의 소음을 벗어난다. 그 깊이를 음미할 때 비로소 골프의 ‘진맛’을 씹게 된다. 스코어보다 중요한 것은 그날의 호흡이다. 스카이72에서 나는 하늘과 갯벌, 비행기와 갈대밭을 시로 남겼다. 그것은 단지 한 골프장의 기록이 아니라, 그 날의 나를 남긴 흔적이었다. 흔적은 작지만, 시간이 지나면 삶의 지도 위에 점으로 남는다. 나는 그 점들을 이어 나만의 선을 그리고 있다.
라종억 통일문화연구원 이사장
통일문화연구원을 설립하고 문화 진작을 통한 국격 향상과 통일 기반 조성을 실천해왔다. 핸디(O)의 골프 실력자다. 아시아 100대코스선정위원장과 대한프로골프협회(KPGA) 고문으로 활동하고 있다. 국민훈장 모란장과 대한민국 골프문화 공로상을 수상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