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은 언제나 법과 제도보다 먼저 움직인다. 스테이블코인은 이 간극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자산이다. 과거에는 블록체인이 실험적 기술로 여겨졌다면, 이제는 개인의 송금·투자·자산이동뿐 아니라 금융기관과 국가의 통화정책까지 그 영향권에 들어오고 있다. 기술이 가져온 변화는 이미 시작되었고, 이제 필요한 것은 그 변화를 지탱할 제도의 설계다.
스테이블코인을 둘러싼 평가는 엇갈린다. 누군가에게는 금융의 문턱을 낮춘 혁신이고, 누군가에게는 규제의 사각지대를 넓히는 위험이다. 그러나 스테이블코인에 대한 시각이 어떠하든 하나의 원칙만큼은 분명해졌다. 신뢰를 확보하지 못한 스테이블코인은 시장에서 생존할 수 없다.
지난 몇 년간 테라 붕괴, FTX 파산, 셀시우스 사건 등은 스테이블코인의 취약성을 여실히 드러냈다. 준비금의 불투명성, 회계·감사 부재, 내부통제 실패, 규제의 사각지대가 한 번에 폭발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우리는 이미 경험했다.
이 사건들이 남긴 교훈은 단순하다. 스테이블코인은 기술이 아니라 거버넌스의 문제라는 것이다. 가격을 1달러에 고정한다고 해서 안정성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그 안정성은 투명한 준비금, 독립적 검증, 규제적 장치가 만들어낸다.
준비금은 어디에 있고, 어떤 형태로 예치돼 있으며, 언제든 현금화가 가능한가?
·검증은 누가, 어떤 기준으로 수행하는가?
·이 정보는 이용자에게 어떻게 공개되는가?
이 기본 질문에 명확히 답하지 못하면, 어떤 스테이블코인도 ‘안정성(stability)’이라는 이름을 스스로 증명할 수 없다.
한국도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제도화에 속도를 내고 있다. 디지털자산 기본법(안)과 개정된 특정금융정보법은 스테이블코인을 제도권 금융의 규율 아래 두기 위한 첫 단계다. 한국은행은 CBDC 파일럿을 확대하며 민간 스테이블코인과의 역할 분담을 모색하고 있고, 금융위원회는 스테이블코인의 발행·유통에 대한 ‘최소 규제 원칙’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특히 발행 주체에 대한 관심이 높다. 은행이 발행해야 하는가? 핀테크 기업도 가능해야 하는가? 담보 구조는 어떤 수준의 안정성을 요구해야 하는가?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이 바로 한국형 스테이블코인의 성패를 가른다.
규제의 목적은 금지나 억압이 아니다. 규제의 목적은 ‘지속 가능한 신뢰의 조건’을 만드는 일이다. 발행사는 준비금과 거버넌스를 투명하게 공개해야 하고, 거래소는 자금세탁방지(AML) 체계를 강화해야 하며, 사용자는 자신이 이용하는 스테이블코인 리스크를 이해해야 한다. 이 세 주체가 맞물릴 때 비로소 스테이블코인은 기술을 넘어 금융 시스템의 한 축으로 자리잡는다.
국제 규제의 흐름을 보면 이 방향성은 더욱 분명해진다. EU의 MiCA는 스테이블코인 발행사에게 은행 수준의 준비금·공시·감독을 요구한다. 미국의 GENIUS Act는 준비금 100% 원칙을 법제화했다. 싱가포르는 PS Act를 통해 안정적 스테이블코인을 디지털결제토큰으로 관리하며 발행사를 인가제 구조로 편입했다.
이들 규제의 공통점은 명확하다. ‘시장 실패가 반복되지 않도록 투명성을 제도화하라.’
스테이블코인을 막는 것이 아니라, 제도권 안에서 지속가능하게 기능하도록 ‘안전 장치’를 설계하는 데 초점을 맞춘 것이다.
한국도 이제 같은 질문 앞에 서 있다. CBDC와 민간 스테이블코인은 경쟁 관계인가, 아니면 함께 갈 수 있는가? 민간 발행 스테이블코인의 준비금은 은행 예금 중심이어야 하는가, 아니면 국공채·MMF 등도 허용할 것인가? 원화 스테이블코인이 지급결제 수단으로 쓰일 때 어떤 위험이 발생하는가?
이 질문들에 대한 정책적 설계가 한국형 스테이블코인의 미래를 결정할 것이다.
스테이블코인은 기술이 아니라 거버넌스의 시험대로 진화하고 있다. 초기 블록체인이 ‘탈중앙의 자유’를 강조했다면, 스테이블코인은 이제 ‘투명한 책임’을 강조하는 자산이 되고 있다. 책임 없는 자유는 시장을 무너뜨리고, 투명성 없는 기술은 신뢰를 유지하지 못한다.
따라서 스테이블코인의 과제는 기술적 혁신이 아니라 투명성·검증·감독이라는 질서 구축에 가깝다.
특히 고액자산가·패밀리오피스·금융기관이 스테이블코인을 다루기 시작한 지금, 시장 신뢰는 개인의 선택 문제가 아니라 금융 시스템 전체의 안정성 차원에서 논의될 필요가 있다. 송금·자산이동·결제·투자 어느 영역에서 사용되든, 스테이블코인의 기반은 기술이 아니라 신뢰다.
스테이블코인의 시대는 이미 도래했다. 이제 우리가 설계해야 할 것은 기술이 아니라 신뢰의 구조다. 정부는 최소한의 기준을 만들고, 시장 참여자는 그 기준 위에서 효율성과 혁신을 증명해야 한다. 전문가와 학계는 기술과 제도 사이의 간극을 좁히는 역할을 맡아야 한다.
돈은 눈에 보이지 않게 흘러가지만, 신뢰는 반드시 드러나야 한다.
투명하게 설계된 스테이블코인만 금융의 새로운 질서에서 살아남을 것이다. 기술이 속도를 만든다면, 신뢰는 방향을 만든다. 앞으로의 스테이블코인 시장은 속도가 아닌 방향을 증명하는 경쟁이 될 것이다.
정지열 한양대 교수
한국자금세탁방지연구소 소장이자 한양대학교 겸임 교수로, 자금세탁방지(AML)와 금융범죄예방 분야에서 국내 최고 권위자로 꼽힌다. 학문적 연구와 함께 금융당국, 국제기구, 민간 금융기관 등에 자문을 하며 제도 개선과 정책 수립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