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새해 벽두, 비채아트뮤지엄은 의미심장한 테마를 내건 2인전을 선보인다. 2025년 1월 7일부터 2월 4일까지 개최되는 ‘The proper time(本然之性…그러하였다)’전에는 한국 현대미술계에서 저마다 독특한 예술 세계를 구축해온 김선두와 김형길 두 작가가 참여한다. 이번 전시는 ‘고유시간(The proper time)’이라는 물리학적 용어이자 철학적 개념에서 출발한다. 고유시간이란 특정 관찰자나 존재가 자신의 궤적을 따라가며 주관적으로 경험하는 시간, 즉 ‘내재한 본래의 시간’을 의미한다. 외부 관찰자가 재는 객관적이고 균질한 시간과 달리, 고유시간은 각 생명체나 사물, 그리고 개인이 본질적으로 간직하고 있는 고유한 흐름, 본래의 생(生)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번 전시의 제목에서 ‘The’를 정관사로 사용한 것은, 인간에게 허락된 시간 중 ‘참된’ 의미를 가진 고유시간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또한 ‘헛된 시간’과 ‘진짜 시간’을 구분하려는 의식도 담겨 있다. 예술가들은 묻는다. 점점 희미해져 가는 본연(本然)의 시간, 본래 우리가 그러하였던 순수한 모습을 되찾는 길은 어디에 있을까? 김선두와 김형길, 두 작가는 각각 동양화, 입체-평면 혼합 조형 기법 등 서로 다른 형식을 통해 시간과 생명, 공간과 기억, 그리고 인간 내면에 잠재한 고유한 흐름을 그려낸다.
전시 ‘The proper time(本然之性…그러하였다)’은 고향, 자연, 도시, 전통, 기억, 그리고 삶의 변주 속에 있는 고유시간을 예술로 환기한다. 특히 전통 한지와 동양화 물감을 사용하는 김선두 작가는 오래된 기억과 밤하늘 별빛에 담긴 시간을 펼쳐 보이고, 종이상자를 해체·재구성한 조형물을 통해 자연과 인공, 생명과 무기물 사이의 순환 고리를 드러내는 김형길 작가는 사물 속 생명성을 회복하고자 한다.
전수미 비채아트뮤지엄 관장은 “두 작가의 작품 세계를 통해 관람자는 ‘본래 그러하였던 나’ 혹은 ‘내가 잃어버린 시간’을 다시금 불러낸다.” “현대인에게 관념적으로만 존재하는 시간의 속성을 ‘고유시간’이라는 개념으로 재조명함으로써 삶의 시간, 기억의 시간, 그리고 본질에 다가서는 진정한 삶의 의미를 되묻는다”고 설명했다.
김선두 작가는 한국 동양화 계에서 독자적인 길을 걸어온 화가다. 그는 전통 한지인 장지(粧紙)와 동양화 물감(분채, 석채, 먹)을 사용하며, 자연과 도시, 그리고 인간의 내면이 얽혀 있는 이미지들을 특유의 화풍으로 풀어낸다. 그의 대표작 ‘낮별’, ‘아름다운 시절’ 등은 낮과 밤, 계절과 시절, 그리고 인생의 순간들을 한 폭의 화면 안에서 펼쳐내며, 관람자에게 기억 속 깊은 곳에 숨겨진 시간의 풍경을 떠올리게 만든다.
김 작가에게 ‘시간’은 화폭에 담아내는 또 하나의 재료이다. 시간은 비가 내리는 여름 한 철, 싹이 움트는 봄, 낙엽이 흩날리는 가을, 앙상한 가지에 눈 내리는 겨울, 그리고 밤하늘에 별이 쏟아질 듯 빛나던 그때를 모두 ‘아름다운 시절’로 만들 수 있다. 그는 고향을 ‘상징적 공간’으로 끌어오면서도, 공간 자체보다는 머물렀던 시간의 결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고향의 의미는 특정 지리적 장소라기보다는, 그곳을 통해 체험한 시간의 흔적이다.
현대 도시인은 끊임없이 떠돌며, 그 과정에서 이방인이 된다. 이 이방인에게 중요한 것은 공간보다는 시간이다. 작가는 고향이나 밤하늘, 터널을 통과하는 자동차 등 다양한 은유를 통해 시간의 축 위에 서 있는 우리의 모습을 환기한다. 과거를 그리워하고 미래를 기대하며, 동시에 ‘지금 이 순간’에 무게중심을 두라고 이야기하는 듯하다. 그의 그림 앞에 서면 ‘본래 그러하였던 나’와 다시 마주하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김선두 작가는 “동양화, 장지, 먹, 석채 등의 전통 재료가 시간과 어우러져 새로운 의미를 담아낸다”라고 말했다. 또한 그는 “작품 속에 흐르는 시간은 어떤 특정한 에피소드나 시대를 가리키기보다, ‘그때 거기’에 있었던 우리 모두의 본래 모습, 본연의 시간에 대한 환기를 시도하는 것”이라며 전시 주제와 자신의 작업 철학을 연결했다.
김 작가는 고향과 밤하늘, 그리고 삶의 한순간을 작품에 담아, 특히 도시의 변두리나 텃밭을 떠올리게 만든다. 텃밭은 그에게 단순한 고향의 상징이 아니라, 시간의 퇴적층이며, 그리움과 삶의 근원적 풍경을 담아내는 상징적 공간이다. 도시인에게 고향은 육체의 정주지보다는 시간의 흔적과 의미를 고스란히 품은 추억이 된다. 이러한 추억은 그의 ‘낮별’, ‘밤별’과 같은 작품에 배어 있다.
그가 작품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지나간 시간을 그리워하거나, 다가올 날을 기대하는 데 그치지 말고, 지금에 충실하라”는 메시지다. 이는 시간의 본질을 되살려 내재한 고유시간을 되찾으라는 권유다. 특히 별이 가득했던 밤, 아무도 없는 길을 터벅터벅 걸었던 기억,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고요 속에서 느꼈던 순간들은 모두가 ‘본래 그러하였던 나’를 회복하는 시간이다.
김선두 작가의 예술은 잠시나마 관람자를 현실 밖의 꿈으로 이끈다. 장지에 번지는 먹빛, 분채가 층층이 쌓여 만들어내는 미묘한 색감, 그리고 고유시간을 일깨우는 상징적 이미지들. 이 모든 것이 그의 작품 안에서 시간이라는 재료로 버무려진다. 그에게 고유시간은 ‘개인의 본질이자 존재 이유’로 귀결된다. 그것이 바로 인간성 회복이자 자신의 본연지성을 찾는 일이며, 이번 전시가 담고 있는 궁극적인 의미이기도 하다.
김형길 작가는 회화적 요소와 입체적 재료를 결합하여 독특한 조형 세계를 펼쳐낸다. 그의 작업은 평면 위에 종이 상자를 해체, 재구성한 오브제를 얹고, 그 위에 아크릴 물감을 반복해서 칠하는 과정을 거치며 완성된다. 겉보기엔 기하학적 그물망 형태가 화면 위에 떠 있는 듯 보이지만, 사실 그 속은 빈틈없이 새로운 생명성을 띤다. 종이상자는 원래 나무였고, 나무는 생명이었다. 김형길 작가는 이와 같은 “무기물-생명-재구성”의 순환 고리를 예술로 펼쳐 보이는 것이다.
그는 통영 출신으로, 19살까지 남해안의 바다와 섬, 멸치 떼가 은빛으로 튀는 풍경, 해초가 춤추는 바다를 보며 자랐다. 서울에서 오래 머물렀지만, 최근 몇 년간 어머니 병간호를 계기로 다시 통영에 머무르며, 그곳에서 작업실을 두고 서울과 통영을 오가고 있다. 통영에서의 시간은 그에게 진정한 고유시간으로 다가온다. 도시의 복잡함과는 다른 호흡, 바다와 섬의 리듬 속에서 그는 종이상자를 자르고 붙이고 칠하는 반복 과정을 통해 또 다른 예술적 생명을 빚어낸다.
김형길 작가는 “예술은 삶에서 말과 글로 풀 수 없는 부분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또 하나의 언어”라며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언급을 빌려오기도 했다. 언어가 설명하지 못하는 세계를 표현하는 것, 바로 예술의 역할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 그는 종이상자라는 ‘버려진 소재’를 선택한다. 종이상자는 이미 나무에서 비롯된 생명의 흔적이지만 산업화, 소비사회를 거쳐 폐기될 운명에 놓인다. 그러나 작가는 이를 해체하고 재구성하여 생명성을 되살리는 ‘미술적 환생’을 구현한다.
이 과정은 해체와 재조립의 시간이며, 현실의 통영 바닷속 생명과 연결되는 상상적 은유이다. 자연의 끊임없는 순환, 해초와 물고기 떼가 만들어내는 리듬, 통영이라는 장소가 주는 ‘시공간적 특성’이 그의 작품에 녹아든다.
그에게 통영의 시간, 즉 ‘통영 시절’은 개인적 고유시간으로 축적되고 있다. 이는 “언젠가는 ‘통영 시대’로 남을 것”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장소와 시간, 그리고 예술적 생명력은 한 덩어리로 엮여 작품 세계를 형성한다. 그의 작업은 전적으로 시간의 축적물을 발현하는 과정이다.
“삶은 본래의 모습, 본연지성을 씨줄로 삼고, 그 삶을 살아가며 겪는 일, 감정, 교감 등을 날줄로 삼아 베를 짜는 것”이라는 김형길 작가의 말은 이번 전시의 핵심 메시지와도 겹친다. 그의 작품 앞에 서면, 얇게 잘린 종이상자 조각들이 그물망처럼 연결된 구조 안에 빛과 음영, 색의 변주가 일어난다. 이는 단순한 조형물 이상의 서사이며, 시간과 생명, 기억과 기대, 고유한 존재 양식의 상징이다.
그는 “종이상자를 통해 나무의 생명을 다시 불러올 수 있다고 믿는다”고 말한다. 이는 ‘시간을 재구성하는 예술 행위’이자, “인간이 본래 가졌던 본연의 고유시간을 회복하는 일”로 이어진다. 마치 김선두 작가가 전통 재료와 먹빛을 통해 내면의 고유성을 일깨웠듯, 김형길 작가 역시 산업사회가 남긴 폐기물로 새로운 생명을 창조한다. 이 행위는 미술이 ‘진짜 시간’을 되찾는 길일 수도 있다.
김선두와 김형길, 두 작가의 예술적 대화는 고유시간이라는 화두 속에서 깊이 호흡한다. 삶의 본질은 흐르는 시간 속에 있으며, 그 시간은 누구에게나 고유하다. 이번 전시는 관람자 스스로 ‘본래 그러하였던’ 자신의 시간을 기억하고, 그것에 귀 기울일 수 있는 귀한 기회를 마련해 줄 예정이다.
[박지훈 기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72호 (2024년 12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