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쌀한 날씨에 보스턴백에 어떤 옷을 넣을지 머뭇거린다. 얇은 옷 몇 벌을 껴입을지, 그냥 편하게 두꺼운 옷 한두 벌 차림으로 갈지, 색상은 어떻게 할지 선택하기 어렵다. 지난주에는 일단 골프장에 가서 보자는 마음으로 여름과 겨울 옷 모두 함께 넣어 갔다.
빨강과 검정은 타이거 우즈(48)의 상징이다. 전성기 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다. 두 색의 조합이 우즈보다 각인된 스타도 찾기 어렵다. 우즈는 전성기 시절 우승을 겨루는 날이면 영락없이 빨간색 상의에 검은색 하의를 입었다. 미국프로골프(PGA) 입문 이후 변함이 없었다.
“빨강은 강한 자신감의 표현이죠. 열정적이고 당당한 심리의 발로이자 상대방에게 공격성을 투사합니다. 검정은 상대를 제압하고 에너지를 빨아들이는 블랙홀이죠.”
색체심리학을 연구하는 제이컬러이미지 김효진 대표의 분석이다. 김 대표는 우즈의 패션을 ‘열정과 카리스마’로 규정한다. 그가 승부사로서 얼마나 공격적이고 권력지향적인지 패션에서 드러난다.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에서 9승을 올리고 지난해 은퇴한 최나연(36)은 현역 시절 치마 입고 골프를 하지 않았다. 프로 입문 이래 오직 바지만 입고 출전했다. 그냥 치마는 스윙에 불편할 것 같아 입지 않은 것이 그대로 굳어졌다고 회고했다.
LPGA 통산 21승에 리우올림픽 금메달리스트 박인비(35)도 줄곧 바지를 고집하다가 2014년 혼다LPGA타일랜드 대회에서 처음 치마를 입었지만 여전히 바지파이다. 프로골프에서 최고 패션을 추구한 사람은 뭐니 뭐니 해도 미국의 내털리 걸비스(40)였다. 비키니 모델로도 등장한 걸비스는 훤칠한 키에 미모까지 겸비해 골프대회 단골 초청 대상이었다. 정작 성적은 2007년 에비앙마스터스 우승 외에 두드러지지 않았다.
신장 182㎝ 미셸 위(34)도 파격적인 패션의 주인공이었다. 2017년 HSBC위민스챔피언십에서 어깻죽지가 노출되고 몸 윤곽을 훤히 드러내는 붉은 민소매에 하얀 미니스커트로 출전해 골프계를 놀라게 했다. 레이서 백(Racer Back)으로 불리는 이 선정적인 골프 전용 셔츠는 후원사 나이키가 입혔다.
국내에서는 강수연(47)이 동양인으로서 원조 ‘필드의 패션 모델’로 미국에서 인기를 모았다. 뒤를 이어 서희경(37), 안신애(33), 유현주(29) 등이 ‘필드의 패션모델’ 계보를 이어받았다.
특히 안신애는 국내 여자골프계에 미니스커트 바람을 몰고 온 주인공으로 2017년 일본(월드레이디스살롱파스 컵)에서 화끈하게 데뷔했다. 당시 숱한 갤러리가 안신애를 보려고 열도를 달궜다.
여자 프로선수의 패션은 본인 취향이기도 하지만 대개 후원사 주문 때문이었다. 급기야 미국 LPGA는 2017년 선수들에게 과도한 복장 금지 조치를 내렸다.
가슴이 깊이 팬 상의나 스커트를 금지하고 하반신이 드러나는 레깅스는 치마바지나 반바지 아래에 걸쳐 입는 것만 허용했다. 치마는 엉덩이를 가릴 정도가 돼야 한다고 규정했다. 너무 외형에 치중해 골프 본연의 정신에 배치될 수 있다는 취지였다.
한국 아마추어 골퍼들의 패션도 화려하다. “외국 골프장에서 저는 한국인·중국인·일본인을 쉽게 구분해요. 필드에서 큰 소리가 나면 중국인, 뒤 팀이 따라오면 재빨리 공을 집어 다음 홀로 이동하면 일본 사람이죠. 화려한 패션에다 마스크까지 하면 바로 한국인입니다.”
오래전 LPGA에서 활동했던 여자 프로선수가 전한 경험담이다. 그만큼 우리나라 골퍼들이 패션에 신경을 많이 쓴다는 이야기다. 외국인이 한국을 방문하면 가장 놀라는 패션이 등산복과 골프복이라고 한다.
필자는 골프라는 단어 앞에 서면 항상 두 가지 고민에 봉착한다. 우선 어떻게 하면 좋은 성적을 올리느냐이다. 다음으로 어떤 옷을 입을까이다. 전자가 실력 문제라면 두 번째는 선택 문제다.
패션감각이 무딘 필자로선 일교차가 큰 날 아침 골프 부킹이 잡힐 경우 전날 저녁부터 머리가 복잡하다. 색상과 스타일에다 날씨까지 감안하다 보면 마치 고차방정식을 푸는 느낌이다. 아예 집에 있는 골프복을 통째로 싸들고 가서 로커룸에서 결정한다.
옷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은 다양하다. 멋을 추구하는 사람도 있고 그냥 편하게 실용적으로 접하는 사람도 있어 일률적으로 좋고 나쁘고를 정할 수 없다. 그래도 옷을 못 입는다는 말을 들으면 거북하다. 최소한 ‘필드의 패션 테러리스트’라는 오명은 피해야 한다.
헐렁한 패션은 피하자
일상복을 입을 때 루스(헐렁한) 피트와 오버(긴) 피트는 약간 시크한 멋도 있다. 그러나 요즘 필드에선 적당한 피트감과 몸 윤곽을 살리게 입는다. 막 흘러내리려는 셔츠와 통 넓은 바지는 아재 패션(?)의 상징이니 피한다. 바짓단도 발목 밑으로 너무 내려가 주름이 잡히지 않게 골프화를 살짝 가리는 정도가 좋다. 유대인의 자존감을 무너뜨리려고 독일 수용소에서 일부러 크고 헐렁한 옷차림을 강요했다는 얘기도 있다.
포인트로 승부한다
남들 눈에 과하게 보여도 자기만족이면 뭐라 할 수 없다. 하지만 상하의 모두 화려한 원색으로 물들이는 것은 촌스럽다. 노란 상의에 빨간 하의 이런 식은 곤란하다. 얼마 전까지 빨강, 노랑, 파랑 등 강한 원색이 유행했으나 요즘은 무채색의 점잖으면서도 세련된 스타일이 인기다. 하얀 상의와 검정 바지에 예쁜 골프화 하나로 포인트를 줘도 훈남룩(Look)이다.
양말은 패션의 완성
필드를 걸을 때 살짝 드러나는 양말은 패션을 완성하는 마지막 포인트이다. 겨울을 빼고는 가능하면 발목양말을 선택하되 걷거나 앉을 때 맨살이 보이지 않도록 최소한 복숭아뼈를 넘기면 좋다.
상의, 꺼내느냐 넣느냐
상의를 하의 안으로 넣을지 뺄지도 고민이다. 바지 안으로 넣는 게 원래 정석이지만 요즘엔 약간 다르다. 상의가 비교적 짧으면 밖으로 내고 길면 안으로 넣어 깔끔하게 처리하면 된다. 길고 헐렁한 상의를 밖으로 내면 미관상 괴롭다. 김효진 대표는 힘들고 지칠 땐 오렌지 계열 의상을 추천한다. 그는 “사람에게도 색 궁합이 있다”며 “오렌지색은 치유 색상으로 안정감을 주고 편안함을 불러오는 영혼의 모르핀제”라고 설명했다.
친목을 도모하고 즐거워야 할 골프가 복장에 너무 구속돼도 곤란하다. 취향과 여건에 맞게 좀 편하게 다가서자.
“옷을 자신의 가장 중요한 일부로 삼는 사람은 일반적으로 오로지 그 옷의 가치로만 평가받을 것이다.” (윌리엄 해즐릿)
정현권 골프 칼럼니스트
매일경제신문에서 스포츠레저부장으로 근무하며 골프와 연을 맺었다. <주말골퍼 10타 줄이기>를 펴내 많은 호응을 얻었다. 매경 LUXMEN과 매일 경제 프리미엄 뉴스에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